[스토리테마파크] 왕의 피란 결정을 묵인했던 영의정, 탄식했던 좌의정 모두가 파직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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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야 16-05-19 03:28
조회 :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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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왜적이 쳐들어와 서울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중국으로 갈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이 생각을 곧장 드러내어 말로 표명하는 것은 왕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파천은 해야 했다. 이 역시 선조의 생각이었으나, 이러한 말을 신료들 앞에서는 넌지시 할 수밖에 없었다.
왕의 신료들은 왕이 파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왕이 파천해서 안 된다는 주장은 이미 아무 쓸데없는 명분일 따름이었고, 더욱이 간관(諫官)들이 파천 여부를 논쟁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어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선조는 파천을 하겠다는 전교(傳敎)를 내린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은 재상 반열에 있는 가장 높은 신하였다. 전료를 받았을 때, 영의정 이산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좌의정 유성룡은 “파천 계획은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는데 이 무슨 말씀인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영의정이 밖으로 나오면서 “옛날에도 잠깐 피한 적이 있었는데 어찌해서 꼭 만류해야 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유성룡이 파천을 완강히 반대한 것은 아니다. 유성룡은 3월부터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여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황을 그 어느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유성룡의 말은 단지 왕에 대한 하소연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1592년 5월 1일 왕이 개성에 이르자마자 개성부의 청사에 모여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이산해를 탄핵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이산해가 가장 먼저 파천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많은 신료들도 이에 동조하며 파천 계획의 실수를 모두 이산해에게 돌렸다. 심지어는 감정에 사로 잡혀 이산해의 다른 비리까지 언급하며 목을 베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파천의 계획은 선조 자신이 세운 것이다. 선조는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산해를 도리상 어느 정도 변호해야 했다. 파천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기는 하였지만, 선조는 신료들 앞에서 이산해에게 죄를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선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죄를 주려면 파천을 함께 계획한 유성룡까지도 죄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내의원제조(提調)정탁(鄭琢)은 “종묘사직을 잘 지키지 못하고 어가가 파천한 것은 그 죄가 재상 반열의 신하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 모두에게 있습니다”라며 상황을 정리하려 하자, 선조는 “이는 나의 죄이다. 경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선조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선조는 오히려 유성룡의 허물을 논하였다. 이제 문제는 파천이 아니었다. 당시 유성룡은 군사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적을 미리 막지도 못하고 선조 자신이 왜적들에 대해 근심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유성룡이 자신의 말을 비웃었다며 유성룡 한 사람에게만 죄를 돌렸다.
조정 신료들은 영의정 이산해에 대해서는 비우호적이었고, 좌의정 유성룡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신료들은 계속 이산해를 탄핵하였지만, 유성룡은 감싸고 있었다. 이에 신하들은 선조에게 재상을 두 명씩이나 한꺼번에 파직하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니라고 까지 하였다.
이날 선조는 마지못해 영의정 이산해만을 삭탈관직시켰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5월 2일) 유성룡까지 파직시켰다. 그러면서 정철(鄭澈) 등 몇 사람을 조정에 다시 기용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5월 9일 우의정이던 이양원(李陽元)까지 체직(遞職)시켜 모든 재상을 교체하였다. 그리고 신료들의 미움을 샀던 이산해는 5월 17일 삼척으로 유배하도록 명하였고, 6월 1일에는 풍원부원군 유성룡을 다시 서용하라 하였다.
◆ 원문 번역
만력(萬曆) 임진(壬辰: 1592, 선조 25) 4월 30일 기미일 축시(丑時: 새벽 1시~3시)
임금의 행열[大駕]이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을 나와 돈의문(敦義門: 서울 서쪽의 정문으로 서대문)을 거쳐 벽제관(碧蹄館)에 잠시 머물렀으며, 동파관(東坡館)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날 큰 비가 내려 궁계(宮㜎)들 가운데 혹 비를 맞고 걸으면서 흰 홑옷을 머리에 쓰고서 가는 사람도 있었다.
당초 주상(主上)께서 도성을 떠나실 때 가는 길의 동네마다 곡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 때 약방(藥房)에 있다가 이윽고 주상을 호종(扈從)하여 임진강에 이르렀다.
날이 저물자 바람과 물결이 매우 거세어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의관(醫官) 남응명(南應命)이 강나루 주막으로 인도하여 밤을 지냈다.
1592년 5월 1일(경신)
임진강에서 주상을 쫓아 동파관으로 갔다. 이날 주상께서는 개성부(開城府)에 묵으셨다.사간원(司諫院)이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를 논박하여, 주상께서 삭탈관직을 명하였다.5월 2일(신유)최흥원(崔興源)이 우상(右相)이 되었다.
주상께서 남성(南城)의 누각에 올라 부로(父老)들을 위로하였다. 주상께서는 좌상(左相) 류성룡(柳成龍)을 파직을 명하셨다. 이에 앞서 이미 정철(鄭澈) 등 몇 사람들을 모두 서용(敍用)하라 명하였다.
5월 9일(무인)
상께서 명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체직(遞職)시켰다. 최흥원(崔興源)을 영상으로 삼으시고, 윤두수(尹斗壽)를 좌상으로 삼으셨으며, 유홍(兪泓)을 우상으로 삼으시고, 이항복(李恒福)을 형조 판서로 삼으시며, 신잡(申磼)을 이조 참판로 삼으셨다.
나는 평양에서 처음에는 서윤(庶尹)의 관사에 머물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융경부(隆興府)의 동쪽에 사는 지인(知印) 김억룡(金億龍)의 집에 옮겨 기거하였다. 이날 비바람이 쳤다.
5월 17일(병자)서생(書生) 강인립(康仁立)이 와서 만났다. 상께서 이산해(李山海)를 중도부처(中道付處)하여 삼척(三陟)에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1592년 6월 1일(기축)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도순찰사(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장계가 이르러 행재소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전 영의정 유성용(柳成龍)은 다시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으로 서용되었다.
출전 : 피난행록(避難行錄)
저자 : 정탁(鄭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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