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테마파크] /가족, 영원한 동반자/ 폭포가 장관을 이루는 도봉산 아래 6대조의 묘에 제사를 지내러가다.
글쓴이 : 한작협  16-04-12 13:29   조회 : 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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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경오년(1630년, 인조 8년) 이정구와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영의정은
의정부에서 같이 재직하였다. 그런데 하루건너 의정부에 모여 공무를 끝내고 서로 한담을 나누었다. 이야기 중에 이정구의
5대 조상 시위사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좌의정으로 추증된 휘(諱, 죽은 이나 높은 이의 이름) 회림(懷林)에 대해 말하였다.
회림은 연성부원군 저헌 문강공의 아버지다. 그런데 충실한 행동으로 헌능 참봉에 제수되었다.
임금의 총애가 두터웠는데 대호군은 한동안 임용되었다. 그 묘소는 우이동에 있다. 후대에 와서 한식(寒食) 때 제사만 올리니
매우 안타깝다. 추탄 영의정이 말하기를, “나도 외가에서 자라며 그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생각대로라면 말을 타고 달려가서
산소를 다듬고 절을 올리고 싶다. 그러나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대개 추탄 영의정의 모친이 그 분의 6대손이기 때문이다. 이정구가 적극적으로 말하기를, “제 마음도 그러합니다.
전에 경기 관찰사로 있을 때 산소를 다듬고 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대충 보았을 뿐 두루 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묘소는 도봉산 아래에 있는데, 산줄기 하나가 동쪽으로 뻗었으며, 이 줄기는 구불구불 돌며 언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지관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기가 바로 이 혈(穴, 기가 모이는 곳)에 뭉쳐있다고 하였습니다.
묘소의 왼쪽은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여 긴 폭포가 아주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조계폭포입니다.
평생 한 번 구경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영의정께서도 가고 싶으면 같이 가서 묘소에 절도 올리고 조계동 물과
바위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요즘은 급하게 처리할 일도 없고 바람과 햇빛도 좋으니 멀리 경치 구경 나가기는 지금이
적당한 시기입니다.”라고 하였다. 영의정이 흔쾌히 승낙하였다. 마침내 날짜를 정해서 서울에 사는 자손들에게 묘소 아래에
모이도록 하였다. 경기도 목사도 이 소식을 듣고 제사의 형식과 준비에 대한 서한을 보내왔다.
이정구가 우의정으로서 초헌(初獻, 제주가 첫 번째 술잔을 올리고 재배하는 절차)이 되고 연평부원군 이귀는 아헌(亞獻),
그리고 영의정 오윤겸은 종헌(終獻)이 되어 깃발을 앞세우고 묘소로 갔다.
제사에 참여한 사람은 행사직 홍영, 참지 이명한, 직강 이소한, 전 현감 박대화, 전 정언 이시직, 연양군 이시백, 광주 목사 이시방,
사직 이시담, 활인원 별좌 이시정, 유학 이시훈, 장성 현감 원이길, 승문원 권지 이일상, 진사 이가상, 유학 오달주, 전 현감 이징,
유학 이환, 전 판관 이시웅, 행 부사용 이정량과 이활, 첨지 이정상 등이었다. 30여 인이 묘소 아래에 차례로 앉았다.
주관(州官)이 여러 차례 술을 따라 올렸다. 묘비에는, ‘증 의정부 좌의정 이공 회림지묘(贈議政府左議政李公懷林之墓)’라고 쓰여 있다. 그 앞에는 서쪽 여섯 시 방향으로 풍수관들이 말하는 소위 거북 등이 깨지는 형상의 들판이 있는데, 경태(景泰, 명나라 경제(景帝) 때의 연호) 2년 신미년(1451년, 문종 원년)에 장사하였다.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박씨의 묘소는 그 뒤에 있다.
영락(永樂 명나라 성제(成帝) 때의 연호) 22년 갑진년(1424년, 세종 6년)에 장사하였다. 정덕(正德 명나라 무종(武宗) 때의 연호)
15년(1520년, 중종 15년)에 비석을 새로 세웠다.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조상 숭배
 조선 시대의 조상숭배는 유교의식인 제례(祭禮)와 민간신앙의 가신신앙(家神信仰)이나 무속(巫俗)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제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유교신앙의 기저를 이루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성을 표현하는 덕(德)과 그 덕을 이루는 가장 기초이자 근본이 되는 효(孝)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라는 것이다. 조선건국의 주도세력인 신흥사대부들은 고려 멸망의 원인을 예제(禮制)의 붕괴에서 찾았다. 우선적으로 예제정비에 착수하여 천지 산천에 대한 사전(祀典)을 정비하고 이에 해당하지 않는 제사는 음사(陰祀)라 하여 금지하였다.
 주자가례(朱子家禮)는 고조부모까지의 4대를 가묘(家廟)에서 신주로 모시고 봉사한다. 그렇지만 경국대전 예전봉사조(禮典奉祀條)에서는 6품 이상은 증조부모까지 3대, 7품 이하는 조부모 2대, 서민은 부모만을 봉사하는 차등 봉사를 규정하였다. 장자가 벼슬이 없고 차자가 벼슬이 있으면 차자를 기준으로 장자를 제사지내야 하였다.그러나 인조반정 후 사회에서 명분과 정통을 더욱 강조하게 되어, 신분에 관계없이 4대 봉사를 하였다.제사는 사후봉양(死後奉養)과 가계계승의 두 측면이 있다. 조선전기에서 후기로의 이행은 제사의 의의가 사후 봉양에서 가계계승으로 바뀌었다. 전기에는 외손봉사 등 비종법적인 제사 승계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종법의식이 강화된 후기에는 적장자 단독 봉사만이 주도적인 것으로 존속하였다. 그리고 일제시대 부터의 가계계승을 강조하는 호주제 등 가부장제 도입은 이를 더욱 강화하였다. 제사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통하고,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마당이다. 한국인의 제례는 유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유교성 제례에서 제사의 의미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행하던 효행의 연속이다. 나아가 의식을 통해서 가족 친족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친목 도모하는 측면도 중요시 되었다. 유교식 제사에 의식을 거행하는 주체는 큰아들이다. 다른 형제나 자손들은 제사에 참석할 뿐 주재자는 되지 못한다. 맏며느리는 재물과 제수준비를 전담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조선개국 직후인 태조 1년 9월 도평의사사 배극렴(裵克廉)과 조준(趙逡) 등은 ‘위로는 재상에서 아래로는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묘를 세워 선대를 제사하고 서인(庶人)은 침(寢)에서 제사지내도록 건의’하고 태종 때에는 ‘가묘제를 따르지 않는 관직자를 파직하자’고 건의하였다. 가묘를 보급하기위하여 많은 노력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유교식 제례를 바탕으로, 전통방식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제사형태가 생성되었다. 그중 특징적인 점은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기일재의 중시’와 ‘4대 봉사’, ‘윤회봉사’ ‘외손봉사’ 등이다. 조선초기에는 3대 봉사를 권장하였으나, 16세기 중반 이황 문인들에 본격적으로 4대 봉사가 시작되어서 김성일(金成一), 김부필(金富弼) 등을 중심으로 고하에 관계없이 4대봉사가 인정되었다. 또한 조선전기에는 큰아들이 제사를 전담하지 않고 자손들이 돌아가면서 한차례씩 지내는 ‘윤회봉사’가 지배적이었다. 조선후기에는 가계계승을 위해 양자를 입양하는 일이 일반화되고, 친족 집단도 부계친족 중심으로 족계가 결성되었다. 분묘 또한 친손 중심으로 입장(入葬)하는 이른바 종산(宗山)이 형성되었다. 상제례에서도 철저하게 유교제사 방식이 지켜졌고 전통적이거나 불교적인 분위기가 배제되어, 오늘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전통적인 제례의 원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주자가례에 규정된 4대봉사의 확립, 윤회봉사가 약화되고 장자가 제사를 주관하여 부계중심의 종법적 질서가 확고해졌다.
 즉 조선 초기에 행용(行用)의 차원에서 강조되던 주자가례가 중기에 이르면 이론적 탐구와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이와 함께 제례서가 대거 등장하고 제례에 관한 논쟁이 활성화되는데, 그것은 사림에 의한 성리학 이론의 심화와 예론 및 예학의 발달이라는 사상적 배경 위에서 가능하였다.이 시기 제례에 관한 일련의 논쟁들은 한국사회에 일반화된 유교적 제사문화의 정착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즉 주자가례가 일상의례의 전범으로 자리 잡기까지, 경합하는 다양한 차이의 논쟁을 겪어야 했다. 제례의 쟁점들은 절차나 형식 그 자체에 목적이 있기보다 재산상속이나 신분승계와 같은 사회적 권력을 분배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주자가례를 전범으로 하는 명분론과 국속(國俗)을 존중하는 현실론이 대립하였고, 결국은 의리 명분론이 득세함으로써 조선 후기에 주자가례의 대중화가 가능하였다.
 제사의 본 뜻이 조상과의 친교를 통해 삶의 근본적 의미를 성찰하는 ‘보본반시(報本反始)’에 있다면, 그 의례 형식은 사회적인 다양한 권력관계를 관철시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조선 중기의 제례문화는 결속과 배제의 범주를 부계주의, 적계주의, 장자주의, 남성주의로 재편성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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