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판타지/SF
밤은 어떻게 오는가.
작가 : 아를르
작품등록일 : 2017.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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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코스모스 웜
작성일 : 17-07-24     조회 : 548     추천 : 0     분량 :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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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가 보이는 거야?"

"아니, 느끼는 거야. 나는 사물을 구별하는 감각기관이 없어. 너희들이 말하는 눈이라는 거."

"그럼 그렇지, 눈으로 보려고 하면 나를 볼 수 없어, 나는 유기체가 아니거든."

" 그럼 너는 뭔데?"

"글쎄, 난 뭘까? 과연..."

엘리는  다리가 여덟개이고 눈이 없는 벌레와 말이 통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녀는 황량한 불모지를 걷고 있다가 이 벌레를 만났다. 벌레는 긴 주둥이로 땅굴을 파고 있었다.

엘리를 눈치챈 벌레가 먼저 인사를 해왔다. 육체를 벗어버린 스피릿 노마드는 유령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그녀는 무척 당황했었다.

"난 육체가 없이 존재해. 그래서 차원에 구애받지 않고 우주를 여행할 수 있어. 우리는 스피릿 노마드라고 불려."

엘리는 벌레에게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랬구나. 그래도 네겐 에너지가 있어? 그렇지 않니?"

"맞아, 넌 그걸 느낀 거구나."

"그래. 난 그걸 느낀 거야."

말을 마친 벌레는  엘리가 옆에 있든 말든 굴을 파는 일에만 전념했다.

엘리는 살짝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짜증이 났다.

언제든 에너지를 흘려보내면 저런 굴 따위는 붉은 흙더미로 메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넌 뭐가 그리 바쁜데?"

엘리는 오랜만에 만난 생명체에게 친절해지려고 애를 썼다.

"아, 난 보시다시피 굴을 파고 있어. 이 굴을 파면 알들을 낳을 거야. 동그랗고 튼튼한 알을."

"그런 일이 스피릿 노마드를 상대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거야?"

"물론이지. 그 알들은 하나하나 새로운 우주니까."

"너 꽤 식상한 비유를 좋아하는구나"

불쾌해진 엘리기 빈정거렸다.

"아니야. 정말 내 알들은 우주 그 자체야."

"거짓말, 여러 차원의 우주를 여행했지만 그런 바보같은 소린 처음 들어."

"난 거짓말 안 해. 난 우주를 낳는 코스모스 웜이니까."

엘리는 우주파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아주 오래 전 엘리가 육체를 벗기 전, 그러니까 스피릿 노마드가 되기 전, 인간의 어린아이였을 때 들었던 동화가 생각나서였다.

엄마가 읽어주던 짧은 그림책에서 우주를 낳는 그들을 얘기했다.

"코스모스 웜이란 게 어떻게 존재하지? 더구나 너 같이 작은 벌레가..."

"작다고 무시하지마. 우리 종족은 유한이나 무한에 종속되지 않아. 넌 차원에서 자유롭지만 우린 공간을 넘어선 존재야. 이제 곧 싱싱한 우주가 탄생할 거야. 한 백만 나노 광년이면 돼. 언젠가 네가 이 우주들을 방문해도 좋겠지."

엘리는 깊은 패배감을 느꼈다. 스피릿 노마드가 된 순간, 그녀는 자신이 신에 한층 가까워졌다고 느꼈지만 정작 이 작은 벌레만도 못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녀는 자신이 진화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666 나노 광년을 여행했다. 이 날의 우연한 만남으로 그녀는 소울 노마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름 없는 붉은 거품 우주를 떠나 시간의 가장자리에 있는 미남의 목젖 행성으로 떠나야 했다.

엘리는 코스모스 웜의  둥그스름한 몸과 여덟개의 다리와 긴 주둥이를 마음의 창에 새겼다. 어쨌든 신비한 생명을 만난 것은 각인될 만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그녀에게  처음으로 진화의 의지를 심어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다.

"잘 있어, 멋진 굴을 파길 바래. 네가 알을 낳는 순간을 보고싶지만 백 만 나노 광년이나 허비할 수 없어. 급한 일이 생겼거든."

" 또 와 줄 거지?"

" 물론이지. 네 존재와 이곳의 좌표는 마음에 창에 새겨넣었어."

"우리는 우주에서 외롭기 때문에, 안녕"

"우리는 우주에서 외롭기 때문에, 안녕"

그들은 여행자들의 아주 오래된,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엘리는 미남의 목젖으로 가기 위해 우주를 관통하는 흰 빛이 되었다.

은하계의 아득한 곳에서 새로운 조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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