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가장자리란 물리적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 이를테면 무한으로 수렴해 가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그곳은 예로부터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명계, 저승, 천국 혹은 지옥, 파라다이스, 연옥, 극락... 엘리의 존재가 시작된 지구에서도 시대, 종교, 지역, 문화에 따라 다르게 명명했다.
근 몇 나노 광년 동안에는 미남의 목젖이란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물질이자 비물질로 이루어진 그 세계는 그러므로 엘리와 같이 육체가 없는 영적 노마드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엘리는 무수한 은하와 차원을 넘어 그 세계로 나아갔다.
무수한 색과 냄새와 촉각의 우주를 지나 미남의 목젖에 닿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좀 더 확장되었음을 느꼈다.
미남의 목젖은 끝도 없이 펼쳐진 따뜻한 빛의 바다였으며 우주의 거대한 이면이었다.
부드러운 등불과 같았던 그녀의 에너지는 성스러운 힘의 세례 덕분에 더 크고 단단해졌으며 거의 사람의 형태를 띄었다.
그녀는 끝도 없이 긴 회랑을 걸어서 그를 알현하러 갔다.
은하계의 아름다운 문양을 본 따 은은히 빛나는 그 회랑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형태가 없는 그 세계는 오직 보는 자의 의지만으로 형태를 만든다.
엘리가 만나러 가는 그 혹은 그녀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할 터였다.
흔히 절대신, 또는 악마들의 왕이라고 불렸지만 근래에는 '우주이성과 부조리' 라는 이름이 더 알려졌다.
성별을 알 수 없는 우주이성과 부조리가 태양보다 높은 권좌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시리우스 자리보다 더 환하게 빛났으며 수천 수만 개의 별들이 수놓인 옷자락이 권좌 아래 물결쳤다.
어떤 밀로도 표현 할 수 없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그가 입을 열었다.
"딸아, 충만과 공허의 땅을 방문한 이유가 무엇이냐?"
그의 목소리는 우주태풍처럼 강렬해서 엘리의 에너지기 붕괴될 것만 같았다.
'우주이성과 부조리는 실재하지만 저 모습과 목소리는 내가 만든 허상이야'
엘리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우주이성과 부조리님, 저는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엘리는 용기를 짜내 그에게 아룄다.
"지금도 너는 자유롭다. 왜 욕심을 내느냐?"
그가 타이르듯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우주를 낳는 벌레를 만났습니다. 저는 자유롭지만 세계를 만들지 못합니다. 소울 노마드가 되어 창조의 힘을 지니고 싶습니다."
엘리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 기억하느냐, 너는 애초에 시공에 억매인 유한한 존재였다. 영적인 존재가 되어 네가 누린 것들로 이미 충분하다."
"네, 영광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순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저는 더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의 진노를 살까 두려운 나머지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는 고요 속에서 엘리를 굽어봤다.
" 향유하는 자는 창조자 보다 권태에 잠식되기 쉽구나."
그가 짧은 탄식을 뱉었다.
"좋다. 네가 창조의 권능을 지닌 소울 노마드가 되기 위해선 통과해야 할 어려운 관문이 있다."
그의 눈빛에 연민이 묻어났다.
"무엇입니까?"
엘리가 감히 여쭈었다.
"먼저 너는 죽어야 한다!"
우주이성과 부조리의 근엄한 목소리가 우주에 메아리쳤다.
"하지민 저는 이미 죽음을 벗어난 존재인데 어찌 죽겠습니까?"
엘리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까마득한 과거엔 그녀도 죽을 수 있는 유한자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가 지구력 5821년 육체 대신 영원한 에너지로 존재를 전환한 이래 쭉 그래왔다.
그녀는 유한자로서의 마지막 날을 마음의 창에 저장해 놓았다.
그녀가 진화를 선택받았던 그 방도 미남의 목젖처럼 빛으로 가득했지만 그 빛은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었다.
그 방에서 전지구적 상황과 생명을 관장하는 인공지능 가이아와 대면했다.
"L-4521번, 당신은 의지를 지닌 순수한 에너지로서의 전환에 적합합니다.. 진화의 선택을 받는 소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우리 은하는 중심블랙홀의 불안정과 엔트로피의 기형적 증가로 인해 소멸합니다. 진보한 우리의 과학으로도 살아있는 유기체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계산은 오차 확률 1%로 실현될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인간으로 남겠습니까?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겠습니까?"
물론 망설임 없이 그녀는 진화를 택했고 엘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녀는 옛 구약성서의 엘리야 선지자가 죽지 않고 하늘의 병거를 타고 승천했듯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무한한 존재가 됐다.
그런 그녀에게 죽으라는 말은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그 길 뿐이다. 죽을 수 있는 너를 찾아라!"
추상같은 그의 목소리가 엘리에게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