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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어떻게 오는가.
작가 : 아를르
작품등록일 : 2017.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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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빛의 공- 우리 은하 최후의 날
작성일 : 17-07-24     조회 : 590     추천 : 0     분량 : 2,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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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는 천천히 우주를 유영했다.

미남의 목젖을 향할 때는 가장 빠른 길을 가로질러 왔다면 지금은 구불구불한 공간을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우주이성과 부조리의 명령을 이해하고 지금까지의 삶을 반추하기 위해서였다.

천천히, 라고 하지만 빛보다 빠른 속도 때문에 엘리를 스치는 우주의 풍경은 빛무더기처럼 뿌옇게 번져 보였다.

우주이성과 부조리는 그녀에게 죽음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대한 힌트를 주었다.

"13개의 우주에는 너와 같은 에너지 파장을 지닌 생명이 하나씩 있다. 그들의 육체를 빌려라. 그리고 죽어라."

엘리가 지구을 떠나 여행한 우주는 너무나 광대했다. 자신과 에너지의 파장이 같은 생명은 만나본 적도 없고 그런 일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존재가 있다해도  인간과 닮지 않은 전혀 새로운 생물일 확률이 높았다. 과연 생소한 생물들의 삶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할까, 엘리는 자신이 없었다.

인간이라는 육체를 벗어버린지 오래지만  아직도 엘리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자아는 '인간형'이었다.

그녀의 에너지가 때때로 인간의 형태를 취하는 것도 당연했다.

오래 우주를 떠돈 결과,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 지성체가 아주 희귀하다는 것을 알았다.

드물게 인간형 지성체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녀가 알던 보통의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때로 그녀가 알던 생물의 범주를 넘어선 존재들을 만나면서 그녀는 외로움을 느꼈다,

인간의 고향인 지구를 '우리 은하'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을 실감했다.

유기체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삶을 보낸 우리 은하에서의 짧은 시간들은 무한자로 유랑한 길고 긴 그녀의 시간들과 같은 무게를 지녔다.

엘리는 아직도 지구에서, 우리 은하에서 탈출한 최후의 날을 마음의 창으로 들여다 보곤 했다.

그녀가 마음과 의지, 기억과 성격까지 지닌 순수한 에너지로 변환한지 얼마되지 않아 최후의 날이 다가왔다.

빛나는 방에서 가이아가 말했다.

"우리 은하 전역의 구원받은 자들에게게로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에너지화 되어 탈출할 수 있는 객체는 지구와 지구형 식민지에 살고 있는 999명으로 최종 집계되었습니다. 엘리, 당신이 999번째 객체입니다. 이제 곧 우리 은하의 시공이 닫힙니다. 저는 우리 은하의 유용한 에너지를 모두 이용해 999개의 빛의 공을 우리 은하 밖으로 쏘아 올릴 것입니다. 처음엔 제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한 번 얻은 추진력은 무한 동력이 되어 여러분들을 영원에 가깝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어머니 우리 은하와 요람인 지구를 위해, 경이로운 진화의 대열에 선 여러분들을 위해 축배를 듭니다. 우주에서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이기에, 건배"

물론 가이아나 999개의 에너지 덩어리들이 실제로 건배 따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장 고전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축복했을 뿐이다.

최후의 날, 우리 은하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은하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포식자, 블랙홀 때문이 아니었다.

대폭발을 일으켜 우리 은하를 녹여내고 있는 것은 가이아였다. 은하 전체가 용광로처럼 끓어올라 유용한 에너지가 되었다.

마침내 그 무시무시한 힘이 단 999개의 빛의 공을 쏘아 올렸다.(스피릿 노마드란 명명은 한참 뒤의 일이다. 이때만 해도 형태와 성질에 맞게 빛의 공이란 비유가 쓰였다)

넓고도 넓은 은하계에서 고작 999개의 공이란, 위대한 관찰자의 눈으로 본다한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미했다.

엘리는 붉은 불덩이가 되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지구와 별들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는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우리 은하를 벗어났다.

그녀의 등 뒤에서 거대한 블랙홀이 입을 벌렸고 불타오르던 우리 은하가 서서히 사라졌다. 마침내 우리 은하의 시공이 흔적도 없이 닫혔다.

만약 엘리에게 육체가 있다면 최후의 날을 회상하면서 몸을 떨거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가 경험한 그 무엇보다 강렬하고 아름답고 슬프고 끔찍한 기억이었다. 모든 우주가 닫히고 마침내 영원까지 소멸하는 순간에라도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먼발치로 보이던 나그네의 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가 묵어갈 첫번째 경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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