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화장해 주는 남자, 머리 감겨 주는 여자
작가 : 세빌리아
작품등록일 :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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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실패한 계약 연애
작성일 : 18-02-06     조회 : 314     추천 : 0     분량 : 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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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랑이 그녀의 곁으로 가 벤치에 앉았다. 그날은 유난히 습하고 안개가 자욱했다.

 

  "사람도 없는데 위험하게 여기에 혼자 있었어요?"

  "위험은요? 여기저기 출몰하는 운동하는 아줌마들 안 보여요?"

 

 그러고보니 황사마스크를 쓴 중년의 부인들과 아저씨들이 줄곧 지나갔다.

 

  "아, 아까 저기 앞에서 나 너구리 봤는데."

  "너구리요?"

  "너구리가 요즘 도시 공원에 나타난다잖아요? 걔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요?"

  "너구리? 너구리가 뭘 먹죠? 물고기나 개구리?"

  "에이...노, 노. 너구리는 잡식성이라 아무 거나 잘 먹는데, 특히 순대를 그렇게 좋아한대요."

  "헐..."

  "분식을 좋아하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먹다 버린 순대나 김밥 요런 거 먹으려고 자주 나타난대요."

  "아..."

  "그런데 아까는 정말 내 눈 앞까지 왔다가 가버렸어요. 내가 먹을 게 없어보였나봐요. 생각보다 크고 빨라서 완전 깜놀했는데...뭐, 귀엽더라고요. 떠돌이 개 냄새를 풍기긴 했지만."

  "아...개..."

  "우리 아버지가 개장수였거든요. 그래서 내가 개 냄새는 귀신보다 더 잘 알죠."

  "개장수요?"

  "응, 요즘엔 개를 펫샵이나 동물병원에서 팔잖아요? 예전엔 안 그랬다고요. 아, 물론 우리 아버지는 애완견을 취급하지 않았지만. 자전거에 싣고 다녔죠."

  "에?"

  "아, 뭐 이렇게 세대차이가 나나? 아, 이건 세대 차이가 아니고 지방색의 차인가?"

 

 그러면서 그녀가 웃었다.

 

  "아니 뭐, 로사샘 나이가 몇 인데요? 기껏 나랑 얼마 차이도 안 날 것 같은데..."

  "그렇게 봐주면 땡큐고요."

  "진짜 몇 살이에요?"

  "그건 말할 수 없다니까요."

  "이제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되게 할 거에요. 나, 샘 좋아해요! 우리 사겨요."

 

 그의 패기 넘치는 고백에 비해 바구니 속 흔들거리는 흰 곰인형은 앙증맞기 짝이 없었다.

 

  "어무나...이건..."

  "좀 이른 감이 없진 않지만...화이트데이 1차 선물이에요."

  "1차? 그런 본 선물은 또 따로 있나요?"

 

  '어? 본 선물?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오는 건가?'

 

 속물인 로사는 일단 그의 선물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럼 일단 이걸 받으면 어떤 관계인 거죠? 사귀는 사이가 돼는 건가요? 아니면 일종의 계약금? 같은 건가요?"

  "계약금?"

 

 파랑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표현에 말문이 막혔다.

 

  "계약 연애 이런 거 하는 건가? 아, 그런 거 재밌겠단 생각은 했는데."

 

 순간 그는 고민이 들었다.

 

  '어? 이게 아닌데...하지만 계약 연애라도 하자고 해서 좀더 파고 들어볼까? 지금 싫다고 하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이렇게 미끼를 조금이라도 물었을 때 낚아보는 것도 방법인 듯 한데. 설마 선물만 받고 쌩하려는 수작인가? 아니, 그럼 선물을 점점 더 큰 걸 준비해야하는 거야? 그냥 질러 본 말에 이렇게 일이 커지나?'

 

 태어나서 이렇게 순간적으로 머리를 열심히 굴려본 것도 처음인 듯 싶었다.

 

  "그, 그렇죠. 계, 계약연애!"

  "와! 얼마 동안요? 그런 거 하면 뭐, 조약 같은 거 합의해서 쓰고 그러지 않나요? '진짜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요런 조항 같은 거?"

 

 이 여자는 정말이지 드라마를 많이 본 사람이었다. 진지하게 시작한 고백을 이렇게 예능으로 만들어버리다니 이것도 이 사람의 재주라면 재주일 것이다.

 

  '진짜 사랑에 빠지라고 하는 말인데 사랑하지 않겠다는 조건이라니...아, 진짜 미치겠네. 그래도 오케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그의 고뇌는 안중에도 없는 그녀가 곰인형을 쑥 뽑아들더니 큰 가슴으로 폭 감싸 안았다.

 

  "아, 귀여워. 얼마만에 보는 인형이람?"

 

  '가졌다고? 그럼 이 고백은 받아들여진 거지?'

 

 이런 게 그녀의 밀당이라면 그는 매일 머리에 쥐가 나는 연애를 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청춘의 올바른 지침 아니던가.

 

  "아, 그런데 어쩌지?"

  "왜, 왜요?"

 

 이제 공사가 마무리 됐다고 여기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사실 내가 마음에 든 사람이 있거든요."

  "네?"

 

 그녀가 곰인형을 다시 제자리에 넣었다.

 

  "미안해요. 파랑씨 나랑 죽이 잘 맞고 흥미로운 사람이긴한데...난 알다시피 허당기가 좀 있잖아요? 내가 고졸 출신에 개장수 딸이라 그런지 그런지 가난과 학력 콤플렉스도 심하고...그래서 나랑 반대인 사람이 눈에 들어와요. 보기엔 된장녀인데 알고보니 신파적인 스토리가 좀 있죠? 아, 나 이런 말 다른 사람한테 잘 안 하는데."

 

 파랑은 그제야 발목이 시큰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습하고 비 올 것 같은 날씨에는 부러졌던 발목이 욱신거리며 우천 예보를 해줬다. 그런데 오늘은 마음에도 우천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선물 고마운데 내 건 아닌 것 같아요. 학원에서도 계속 볼 사이라 어떻게 처신을 해야하나 고민이 좀 들었는데...그래도 마음이 다른 사람한테 있는데 억지로 계약까지 하면서 만나는 건 아무래도 양심에 찔려서요."

 

 무너지는 마음 가운데에서도 화살처럼 솟는 치기가 그의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양심에 찔려도 괜찮아요. 내가 괜찮아요."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지 그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생각보다 그녀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녀가 쉽사리 입을 떼지 못 했다.

 

  "티 안 낼게요. 다른 사람 봐도 뭐라 하지 않을 게요. 다른 사람 생각해도 나라고 착각할게요. 다른 사람 옆에 있어도 질투하지 않을 게요."

 

 그의 순정에 그녀 역시 놀랐다. 그리고 잠깐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파랑씨, 그게 바로 계약 연애에요."

  "네?"

  "그렇게 껍데기만 갖는 연애가 계약 연애라구요. 내가 처음에 꺼낸..."

  "그게 무슨?"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거잖아요. 연애는 관심이고 질투이고 싸움인데...그런 건 장난이지. 보드게임 같은 놀이고."

 

 그렇게 간단히 정리하더니 그녀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해요. 아직 메이크업 시험 보려면 날짜도 많이 남고 배워야할 것도 많잖아요. 난 모른 척 할게요. 내 인생에 오늘 일은 스킵하는 걸로. 파랑씨도 부디 그러길 바라요."

 

 그녀가 떠난 자리에 파랑이 홀로 남겨졌다. 정확히는 흰 곰인형과 함께, 둘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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