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국은 급하게 출장 나갈 일이 생겨서, 의뢰 본부로 향하고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는 대원들을 출근시키지 말자는 연호의 지시가 잘 지켜지고 있다는 증거로, 의뢰 본부 사무실은 빈 의자들이 널려있었다.

　그는 텅 빈 사무실의 책상들 사이를 지나, 의뢰 본부 사무실의 안쪽에 있는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깔끔하고 단정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은국은 책상의 서랍에서 인감을 찾아 자신이 들고 온 서류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서 연호에게 전화를 걸며 사무실을 나가려고 뒤돌아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려오더니, 연호가 전화를 이내 받았다.

　[네, 형님.]

　아직 11시가 되지 않은 시간의 주말인데도 연호는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가 안경을 벗어서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일본에 다녀와야 해.”

　그는 의뢰 본부의 사무실을 나서며 왼쪽 손목의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아··. 일전에 마무리가 덜 된 일 때문이죠?]

　“그래. 진탁이 아까 전화를 안 받아서. 지금 비행기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지?”

　[지금 선우가 일을 쉬고 있어서, 전용 조종사가 시간 비었을 거예요. 제가 지금 연락해서 이륙 대기 시킬게요.]

　“알았어.”

　은국은 통화 종료를 누르고 핸드폰을 정장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며칠 전, 일본으로 급한 임무를 나갔었을 때였다.

　bloody ellipse의 기밀 파일을 가지고 있다며, 같은 blood bones의 산하 조직의 15위 정도 되는 스페어 조직에서 협박을 받았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실제 기밀 정보를 예시로 들며 돈과 중요한 인력을 양도한다는 서류를 요구했고, 이에 간부 긴급회의가 열렸다.

　수요일이었던 그날은 하필이면 모두가 제각기 일이 있었고, 본부에 시간이 되는 사람은 4명이었다.

　우목은 당시 다휘의 보살핌 담당이었고, 은호는 전투를 하지 못하며, 민환은 항상 본부에 있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자신이 ‘말살’을 맡기로 되었다.

　최대한 피해 없이 -같은 모 조직을 두고 있기도 했으니- 정보 말소를 위해 출장을 갔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에서 숨어있던 전투인력들과 혈전을 벌이게 되었고, 그는 수도 없이 쏟아지는 적들의 사이에서 홀로 싸우느라 정보 말소는 잊게 되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다 주말에는 방심할 것 같아서 급한 출장을 계획하게 되었다.

　“하필 이런 날씨에···.” 은국이 말했다.

　그는 복도의 중간에 서서, 끊임없이 창문을 때려대는 빗줄기를 보며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은국은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 * *

　“크흠.”

　도담은 다휘의 작업실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그가 다휘의 당번이었다.

　도담의 손에는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꽃 장식이 달린 라탄 바구니가 있었고, 팔에는 얇은 노트북을 끼고 있었다.

　그는 작업실에 노크하는 것을 망설이는 건지, ‘답지 않게’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하아··.”

　이따금씩 한숨을 쉬고 목을 가다듬기도 하며, 마치 시험을 앞두고 긴장을 푸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주말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에게는 길고도 짧은 20분이었다. 그는 20분이 지나서야 굳은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도담은 팔을 들어 작업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다휘가 문을 열면서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 도담 씨?”

　“·· 바쁘냐?”

　“아뇨, 괜찮은데··. 무슨 일 있으세요?”

　“내가··· 오늘 너 담당이야.”

　“··· 아.”

　두 사람 사이에는 일순간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도담은 자신과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문을 오른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들여보내주지그래?” 도담이 말했다. “무거워, 이거.”

　그리고 그는 손에 든 바구니를 슬쩍 들어 보였다. 사실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는데, 어색한 공기를 깨뜨리기 위함도 있었다.

　“아. 죄송해요. 들어오세요.”

　다휘는 그에게서 바구니를 받아 들면서 문을 활짝 열었다.

　“··· 일하는 중이었나 보지?”

　“네, 네에. 친구가 이번에 솔로 곡을 하게 돼서요. 그걸 조금··.”

　도담의 물음에 다휘가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옆에서 쭈뼛거리며 말했다.

　어째서 자신이 그런 사정까지 얘기하고 있는지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도담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친구가 가수?”

　“아, 네. 같은 소속사인데·· 저보다 먼저 데뷔했었어요. ‘디온’이라고 들어보셨어요? 해외에서도 유명한 아이돌 그룹인데···.”

　다휘는 자신의 작업실의 벽에 붙여뒀던 포스터 중, 다섯 명의 미남이 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도담은 그녀와 함께 포스터 앞으로 향하며,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나는 아이돌은 잘 몰라. 그래도 꽤 큰 회사인가 봐?”

　“네··. 일단은요. 대표님이 사업 쪽으로도 관심이 많으셔서, 이것저것 하시는 모양이던데···. 저는 그런 쪽은 잘 몰라서요··.”

　다휘가 등 뒤로 뒷짐을 지고, 디온의 포스터를 올려다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 그래. 하던 일 계속해. 나는 여기서 내 일을 할 테니까.”

　도담이 들고 있던 노트북을 빈 책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다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를 향해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저기, 간식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서 입을 가리며 작은 기침을 했다.

　그녀의 기침소리에 도담이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시선에 대해 눈치가 느린 다휘는 복잡한 기기가 놓인 작업대 앞에 앉아 헤드폰을 끼며, 다시 작은 기침을 했다.

　.

　.

　도담은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현재 자리를 비우고 있는 진탁과 로이드의 업무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는 노트북 화면의 하단에 있는 시계가 12시 30분인 것을 확인하고서, 팔을 공중으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현다휘.” 도담이 그녀에게 점심시간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름을 자그맣게 불렀다.

　그는 워낙 조용한 작업실이라 들릴 거라 예상했지만 그녀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의문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휘가 있는 작업대로 향했다.

　“점심 먹으러 ㄱ·· 이런.”

　다휘는 헤드폰을 낀 채로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단잠에 빠져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여서 도담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휘의 눈 밑에 있는 시커먼 다크서클이 그녀의 피로도를 예상하게 만들었다. 도담은 작업실 안을 둘러보며, 그녀에게 덮어줄 만한 것을 찾고 있었다.

　“오··빠···.”

　회색과 옅은 분홍색의 체크무늬 담요를 발견해서 가지러 가고 있던 차에, 그는 다휘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제바ㄹ·· 가ㅈㅣ 마···.”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웅얼거리는 입술에 뭉개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미간 사이를 만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서둘러 담요를 가져와서 다휘의 위로 천천히 펼쳐서 그녀를 덮어주었다. 다휘는 웅크리고 있던 몸을 꼼지락거리며 좀 더 편한 자세를 찾는 듯했다.

　도담은 그녀가 끼고 있는 헤드폰이 불편해 보여서, 다휘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헤드폰을 들어냈다.

　헤드폰에서는 잔잔한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도담은 자연스레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편안한 기분이 드는 음이었다. 그가 감상에 빠져 천천히 눈을 감자, 예술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일반인 정도도 되지 않는 자신인데도 무언가가 그려졌다.

　고요한 숲속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내리쬐는 햇볕은 나무들이 막아주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저절로 몸에 긴장이 풀어졌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눈을 뜨자, 이성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채워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의 머리가 다휘의 음악에 점령당한 것 같았다. 그는 그런 기분을 느낀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도담은 서둘러 헤드폰을 작업대 위에 올려두고, 다휘의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아주 미묘한 세상에 다녀온 듯, 그가 붉은 카펫을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오케스트라 무대에 있는 것처럼 큼지막하게 들려왔다. 그는 이내 몰아쉬고 있던 숨에 여유를 주면서, 다휘의 작업실 문의 옆의 벽에 몸을 기대었다.

　“뭐야, 이거··?”

　일체 예술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자신의 심장을 이토록 뛰게 만든 다휘의 음악에 그는 아직 두근거리는 심장의 위로 손을 올렸다.

　쿵··

　쿵··· 쿵··

　도담은 자신의 감정을 부정해야만 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히 용납되지 않는 감정인데, 그 불편한 느낌은 몸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도담은 이내 식당에 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무작정 복도를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점차 템포가 빨라져서, 그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숨을 몰아쉴 정도였다.

　눈앞이 아찔했다. 벼랑 끝에 서있는 것처럼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