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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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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29
작성일 : 19-10-15     조회 : 399     추천 : 0     분량 : 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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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평일 낮 한정식집은 한산했다. 손님은 은정 씨와 나, 딱 둘뿐. 은정 씨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복잡한 내 심경을 그녀가 아는 듯 시종 굳은 얼굴로 나를 대한다. 그런 그녀의 인상에 가슴이 뜨끔하다. 그렇게 좋아하는 그녀의 웃음인데 오늘따라 웃질 않으니 더욱 그 미소가 그립다. 어떻게든 웃게 해주고 싶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는커녕 오히려 나도 그녀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염려가 앞선다.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을 하고 종업원이 밑반찬을 내오는 걸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 말이 없는 그녀. 뭔가 가슴에 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종업원이 물러가자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곤하게 안부를 묻는다. 대화의 내용은 여느 때와 다름없지만 나와 그녀의 목소리가 사뭇 다르게 들린다. 생기가 없달까 착 가라앉아서 톤이 담담하다.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같다. 그녀가 그걸 알아차릴지 신경이 쓰이지만 떨림을 멈추려 할수록 더 심해진다.

 종업원이 밥과 찌개를 가져와 대화가 멈췄다. 음식이 상 위에 놓이는 사이 머릿속에서 문장을 골랐다.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변명조가 되긴 싫었다. 이럴 땐 솔직함이 최선이겠지. 그녀와의 관계는 머리로 받아들이기 앞서 마음이 먼저 움직였고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게 됐을 땐 이미 이만큼 진전된 상태였다고. 그녀가 날 용서해줄지 모르겠다. 그저 그녀가 최소한의 상처만 받길 바란다고 하면 위선일까. 갑자기 그녀의 말이 빨라진다. 내가 첫사랑이라고 한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던데 역시 옛말은 틀린 게 없나 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평생 간직하게 된다고 했으니까 은정 씨에게 평생 소중히 간직하며 살겠다고 하면 어느 정도 위로가 되려나.

 잠깐만, 은정 씨. 마지막 사랑이요? 평생, ∙∙∙∙∙∙, 함께 하자구요? 은정 씨가 반쯤 일어서서 엉거주춤 한쪽 무릎을 꿇더니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청혼한다. 목구멍이 반쯤 막혀 허억, 하는 숨소리가 작게 새어나온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겠다. 은정 씨가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은정 씨가 뒷말을 잇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해야 했다. 이건 아니다. 힘들게 마음을 정하고 왔는데. 은정 씨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나에 대해 아무런 얘기를 듣지 못한 걸까?

 “저기, 음, 은정 씨. 그게 말이죠.”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게 프러포즈하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녀를 실망시켜야 한다니 차라리 그냥 돌아서서 도망쳐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다. 더 이상 그녀를 힘든 상황으로 밀어 넣으면 안 된다. 이제 이 칙칙한 감옥에서 빼내주어야 한다.

 “은정 씨.”

 이름을 불러봤다. 언제부터 이 이름이 내게 이토록 깊은 의미를 갖게 된 걸까. 함께 동행했던 사진 전시회 이후였던지 아님 그녀 집 앞에서 나누었던 첫 키스부터였는지.

 “살면서, 정말 살면서 이런 행운을 가져볼 거라고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은정 씨 미소는 내 삶에 큰 활력을 주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지 않고 침대에서 눈을 뜨면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기대하는 모습엔 스스로도 놀라곤 했죠. 그만큼 은정 씨는 제게 특별한 존재였어요.”

 그녀 얼굴 위로 희미하게 미소가 피어오른다. 아니다. 그녀에게 어떤 희망을 주는 말을 지금 해서는 안 된다. 괜히 질질 끌다 보면 결국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할 거다. 더욱 단호해져야 한다.

 “미란 누님이랑 얼마 전에 우연히 마주쳤어요.”

 은정 씨가 다급하게 말을 받는다.

 “아, 그 얘기 언니한테 들었어요.”

 “얘길 들었다구요?”

 은정 씨가 손을 들어 앞머리를 잡아당겼다 놓는다.

 “미란 언니가 지선이 때문에 학교에 갔다 진우 씨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목이 칼칼하다. 물을 한 모금 마시려 물잔을 들다 그만 엎어버렸다. 아주 바보 같이 굴고 있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닦으면 돼요.”

 그녀가 황급히 앞에 놓인 물수건을 들어 엎질러진 물을 훔친다. 그녀가 젖은 물수건을 옆으로 치우며 말을 잇는다.

 “진우 씨, 아이가 있다면서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고개를 숙인다.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도 그녀가 평생 같이 하자고 말을 꺼낸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

 대답할 말을 찾기 힘들다. 고개만 끄덕였다.

 “저, 솔직히 처음 미란 언니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땐 상당한 충격을 받았어요. 물론 진우 씨가 굳이 저에게 그런 얘기를 할 이유가 없었죠. 우리 사이에 무슨 혼담이 오간 것도 아니고. 제가 진우 씨에게 가족 관계 물어본 적도 없잖아요. 그래도 충격은 충격이었어요. 그러다 오히려 깨달은 게 있어요.”

 이제 내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어떤 말을 꺼내려는 걸까.

 “진우 씨가 애 딸린 남자라는 상황을 상상하는데도, ∙∙∙∙∙∙, 그런데도 진우 씨가 싫어지지 않는 거예요.”

 은, 정, 씨.

 “오히려 나 잘 하겠다, 다짐하게 되는 거 있죠. 내 피가 섞이지 않으면 어때. 진우 씨 아이니까 내 아이처럼 소중하게 아끼며 키우겠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죠. 아, 내가 이만큼 진우 씨를 좋아하는구나. 진우 씨가 얼마나 좋으면 진우 씨 아이가 있다는 게 내게 흠으로 다가오지 않고 더욱 내 마음을 굳히게 하는 건가 감탄했어요. 그러면서 만약 진우 씨가 아이가 있다는 문제로 헤어지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을 해봤는데 그게 오히려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나, 그러면서 확실하게 깨닫고 마음을 굳혔죠. 이 사람 없이 못 살겠구나. 진우 씨 놓치면 안 되겠구나 다짐했어요. 그렇게 용기를 냈어요. 알아요.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하는 거 흔치 않고 내 그런 행동이 진우 씨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걸. 그렇지만, 그런 거 하나도 안중에 없을 만큼 진우 씨를 원해요. 진우 씨, 지금 내 모습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한 치 거짓도 없는 순수한 진심이에요. 나, 잘할 자신 있어요. 부디 저와 함께 해주세요. 최선을 다해 섬길게요.”

 어떻게든 은정 씨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막으려 하다 보니 거의 고함조로 말이 튀어나왔다.

 “은정 씨! 은정 씨! 잠깐만요! 그게, 그게 말이에요!”

 내 높은 톤에 그녀가 동그랗게 놀란 눈을 한다. 이제 여기까지다. 정말, 미안해요, 은정 씨.

 “은정 씨, 그 마음 잘 알겠습니다. 얼마나 저를 아껴주는 줄 절절히 전해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은정 씨. 제겐 아들이 둘 있습니다.”

 “둘, 둘이요? 아, 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 미, 안, 해, 요.

 “그리고 아내가 있어요.”

 “∙∙∙∙∙∙.”

 은정 씨가 뭔가 말을 하려 입을 벌리다 그대로 다문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다. 내 이마에서 땀이 솟는다. 목이 간절히 마르다. 엎어져서 비어버린 물잔이 야속하다. 물 한 모금만 마시면 좋겠다. 딱 한 모금만. 은정 씨가 고개를 숙인다. 머리카락이 그 위를 덮는다.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더욱 불안해진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선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있을까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녀의 머리가 아래위로 흔들린다. 우는 건가? 그래, 그녀가 울고 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남자가 살면서 하지 말아야 하는 세 가지가 있다 하셨다. 첫 번째, 기억 못할 만큼 술 마시지 않기. 두 번째, 빚을 질 만큼 노름하지 않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여자를 울리는 못난 놈이 되지 말라고 하셨지.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 세 가지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지금 이때까지 한 번도 필름이 끊길 만큼 술을 마셔본 적 없고 도박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난 마지막 세 번째를 지키지 못하고 진심으로 아끼는 여자를 앞에 두고 울렸다. 그녀의 턱 아래로 눈물방울이 흘러내린다. 조금씩 상체의 흔들림이 커져 간다. 난 이제 그녀가 우는 걸 달랠 자격조차 없다. 감히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은데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보이라고 하는 건 그녀에게 못할 짓이겠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뇐다. 이제 와 아무리 사죄를 하고 용서를 빌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이제 그녀의 마음은 베어졌고 그 큰 상처 때문에 그녀가 몸서리치게 피를 흘리고 있다. 아, 어떻게 해야 그 피가 멈출지. 그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 상체의 흔들림이 격해지고 그녀의 울음소리가 커져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 보는 종업원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 내 품에 안고서 그녀의 쓰린 마음을 달래주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녀를 울게 한 장본인이 나인만큼 그건 과분한 욕심이다. 그녀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린다. 울고 있는 그녀를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가만히 지켜봐야만 하는 건 고문이다. 견디기 힘들다. 가능하다면 은정 씨를 만났던 때로 다시 돌리고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자신이 너무 무기력하다. 이런 결말을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건 멍청한 변명이다. 알면서도 그 길에 올랐던 거다.

 그녀가 일어선다.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저기, 은정 씨.”

 허둥지둥 팔을 휘저어 본인의 물건을 챙기더니 나를 지나쳐 간다.

 “은정 씨, 잠시만요.”

 그녀의 어깨를 잡는 내 손을 뿌리친다. 신발을 신으며 휘청거려 잡아주려 했지만 오히려 그녀가 더욱 화를 내게 될까 봐 차마 잡진 못했다. 그저 바로 뒤에서 혹시라도 넘어지면 받아주려 준비만 했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은 채로 뛰듯이 밖으로 나간다. 그녀를 따르려다 ‘계산하셔야죠,’ 라는 종업원의 말에 멈춰야 했다.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간다. 불안하다. 차라리 이럴 바엔 그녀 집 근처에서 만날 걸 그랬나 보다. 그럼 힘든 그녀의 발걸음이 먼 길을 밟아가야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이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사진 동호회 모임에도 더 이상 나오지 않겠지. 그녀를 볼 면목이 없다.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녀가 그랬다. 나와 헤어지는 상상을 하니 감당이 안 되더라고. 이게 그녀를 보는 마지막이라니 현재로선 감당이 안 된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무릎이 후들거리며 떨려온다. 그녀는 멀리 가버렸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정말 끝이다. 그렇게 그녀가 떠나갔다. 차 앞으로 가서 문을 열려다 열쇠를 떨어뜨렸다. 그걸 주우려다 그만 휘청하고 발목에서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은정 씨를 받아주기는커녕 내 스스로도 지탱하기 힘들다. 바닥 위에 널브러져 허리를 구부리니 겨우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눈앞이 뿌옇게 탁해진다. 이렇게 완전히 망쳐버렸다. 모두 내 잘못이다. 가슴에 고이 간직했던 하얀 새 같았던 그녀가 날아갔다. 제대로 잘 보내줬어야 했는데 상처만 입힌 채 피 흘리듯 허덕이며 갔다. 빨리 상처가 아물기를 바란다. 그녀가 어서 회복해서 그 예뻤던 웃음을 항상 간직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숨이 가빠온다. 가슴 위로 뜨거운 뭔가가 흘러내린다. 세상사는 게 힘겹다. 이대로 드러누워 아무 생각 없이 한숨 자고 일어나면 좋겠다. 그러면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바뀌어 있을까. 말도 안 되는 바람이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눈을 뜨기 힘겹다. 다 놓아버리고 싶다. 주위에서 나를 옭아매던 모든 끈을 풀어버리면 나도 은정 씨를 따라 새처럼 날아갈 수 있으려나. 그러면 그녀에게 다가가 알려줄 거다. 은정 씨를 위해 새집을 지었으니 나랑 같이 거기서 살자고. 은정 씨 원하는 대로 평생 서로 섬기며 살자고. 내가 은정 씨보다 더 잘할 테니 그저 행복기만 하라고.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가장 듣고 싶었을 그녀인데. 머릿속으로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흐려진다. 이렇게 보낸다. 잘 가요, 은정 씨.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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