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너에게 닿기를
작가 : 리아스트
작품등록일 : 2019.9.20
  첫회보기
 
12. 별은 우릴 닮아 슬픈 만큼 빛나
작성일 : 19-11-10     조회 : 277     추천 : 0     분량 : 2911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의겸이가 그대로 향한 곳은, 정궁. 다시 말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침소가 위치한 궁이었다.

 

 "폐, 폐하."

 

 나와 서의겸, 둘 다 한창 집무를 보고 있을 시간이었으니.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방을 정돈하고 있던 궁인들이 갑작스러운 우리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모두 물러가라."

 

 평소 사근사근하던 서의겸답지 않게 딱딱해져 있는 얼굴과 낮게 깔린 목소리에, 잔뜩 겁에 질린 궁인들의 낯빛이 새하얗게 변해 갔다. 혹시나 본인들이 무언가 큰 실수라도 저질렀는지, 다급하게 기억을 되감아 보고 있을 터였다.

 

 나 역시도, 서의겸의 웃는 얼굴이 연기이며 현재의 행동이 그의 본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저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저들과 그리 다를 것 없이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을 법한 것은, 그들이 서의겸의 위압감으로부터 느끼는 공포 탓에 그에게 붙잡힌 채로 태연함을 가장하지도 못하고 있는 나를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다시 명할 때까지, 그 누구도 이 궁 근처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 그리하겠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던 저들은 물론이고 주변의 궁인들마저 전부 물리고 방 안으로 들어선 의겸이가, 문을 거칠게 닫고 난 뒤에서야 손목을 놓아주었다.

 

 "벗어."

 

 "뭐......"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생각치도 못했던 말에 시선을 피하던 것도 잊고 서의겸을 올려다보았다.

 

 마주한 눈동자는, 내게로 향하는 때이면 언제나 그렇듯 시리도록 차가워서, 푸른 빛의 이채가 도는 것과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벗으라고, 내 말 안 들려?"

 

 두려웠다. 첫날 밤의 정사 때보다도 더 고압적이었기에, 그의 말을 거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머리가 굳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무런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떨리는 손을 들어, 옷고름을 하나 둘 풀어냈다.

 

 "흐......!"

 

 그런 내 옷이 흘러내림과 동시에 또다시 깊게 입을 맞춰오며 던지듯 이불 위로 넘어뜨린 의겸이는, 숨을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 탓에, 미처 삼켜내지 못한 타액이 작은 틈새를 비집고 나와 흘러내렸다.

 

 한참을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덜덜 떨리는 내 턱 끝을 꼭 쥐고는, 엄지손가락을 내어 흘러내린 타액을 닦아내는 의겸이었다.

 

 "아, 아......"

 

 "얌전히만 있어도 되는데, 굳이 나서려 하지 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던 그 날 밤처럼, 서늘하다 못해 소름이 끼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귓가에 낮게 속삭였으니까.

 

 내 반응에 가늘게 조소를 머금은 그는, 그로부터 한참 동안이나 내 시야를 어지럽게 흔들어 놓았다.

 

 "......처신 잘 해."

 

 시간이 꽤 흐르고, 내가 입을 열 힘마저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늘어질 즈음. 뺨에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살갑게 떼어 주며 몸을 일으킨 서의겸이, 비웃듯 웃음지었다.

 

 명백한 경고의 의미였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말라는.

 

 나 자신이 스스로 사고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으며, 단지 본인의 인형으로 살아가는 것만을 허용하겠다는.

 

 

 

 ***

 

 

 

 곧 있으면 한 해의 일곱 번째 달에 접어드니, 여름에 거의 가까워지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유월에서 벗어나지 않은 날짜였다. 그럼에도 한층 텁텁해진 날씨와 더운 공기가 훅-, 끼쳐 오기 시작하는 것은 꽤나 불쾌한 기분이 들게 했다.

 

 언제나 허리의 미약한 통증이 가실 법하면, 서의겸은 무리하게 관계를 요구해 왔다. 마치 내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관계는 매번 내가 울음을 터뜨리고, 지쳐서 그에게 매달릴 즈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와는 달리 언제나 마냥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애초에 나에게 권리가 없음을 떠나서,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매번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순간의 감정에 이끌렸던 나를 탓하면서도.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한 것은,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졌을 즈음이었다.

 

 "......."

 

 항상 그러했지만 유독 잠에 빠져들기 어려울 것 같던 기분이 들던 저녁이었다. 잠시 바깥의 공기라도 쐬면 조금이나마 나아질까 하여, 결국 늦은 밤에 조심스럽게 궁의 앞마당으로 나왔다.

 

 청화국의 수도는, 여름이 되면 지방에 비해 비교적 시원한 날씨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덥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는 종종 더운 공기가 느껴지는 것은 한낮뿐이었던지라, 시간이 늦은 만큼 얼굴에 와 닿는 밤공기는 조금 차게 느껴졌다.

 

 이대로 달아나고 싶다.

 

 목덜미에 와 닿는 서늘한 공기에 옷자락을 여미며, 담벼락 앞에 서 보니 갑작스레 든 생각이었다.

 

 몇 겹 씩이나 깔려 바깥과 내부를 온전히 차단시키는 이 높고 두터운 벽이, 답답하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만큼 답답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서의겸의 바로 곁에서 복수를 꿈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오히려 궐을 나가 밖에서 준비를 하는 편이 더 나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나에게는 조력자가 없으며, 왕족만이 지닌, 왕가의 혈통을 증명하는 특징적인 외모는 지나치게 눈에 띄기 쉬웠다.

 

 그러니 그가 나를 찾고자 한다면 쉽게 발각되어 다시 붙잡혀 오거나,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떻게 해도."

 

 제아무리 빠져나갈 방도를 찾아보려 해도 결국은 그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내가 당면해 있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더 깊은 절망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그래, 마치 벗어나고자 발버둥쳐도 점점 빠져들게 만드는 늪과 같이.

 

 좋지 않은 생각을 떨쳐내보려 고개를 흔들자, 대신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귀를 가득 울렸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새벽이었다.

 

 탁-

 

 ".......!"

 

 음계를 연주하는 듯한 청명한 소리만이 가득한 가운데에서 미세하게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비교적 빠른 자각과 반응 속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쳐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목에 닿는 둔탁한 느낌과 함께 눈앞이 금세 검게 물들어 갔다.

 
 

맨위로맨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