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기억이라는 놈은 말이야 참 질긴 놈이야. 놔 주질 않아. 그냥 놔 버리며 되는데 왜그리도 붙잡고 있는지 아직도 한경이가 살아 있는 것 같아."
"나도 그랬어. 엄마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한참을 말이야. 엄마가 서 있던 동구 밖의 정자 아래 할머니들을 보면 다 우리 엄마 같고 그랬거든 차를 몰고 가다가 건널목을 건너는 할머니들을 봐도 다 우리 엄마 같았어. 그래서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곤 했어."
"그렇구나. 나만 그런 졸 알았지. 청수에 출장을 갔었는데 어떤 여자가 꼭 한경이 같았어. 한경이 라면 절대 입지 않을 옷을 입고 한경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머리를 했는데도 나는 꼭 그 여자가 한경이 같았어. 뭐라고 해야 하나? 걸음걸이가 휘적 휘적 걷는게 꼭 같았거든. 한경이 뒤를 보면서 참 휘적거리며 걷는다고 한 마디 했었거든 애들을 임신하고 나서 그게 습관이 되어서 그렇다고 했어. 그 습관이 바뀌질 않는다고...... 그런 걸음을 걷는 여자를 봤어. 한경이가 아닌 줄 알면서 쫒아 갔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한경이 일리 있냐? 한경이는 죽은지 벌써 일년이 지났는데......"
"그래. 이해해. 나도 그랬어 한 일년은 그렇더라 실은 아직도 한 번씩 뜨끔뜨끔 하고 놀란 다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엄마랑 하나도 안 비슷 한데. 순간 보여지길 그렇게 보여 지더라고."
"잊어야 하는데 평사시는 괜찮은데 가끔 생각 나면 사람 돌겠어."
"맞아. 그게 원래 그래 살만은 한데 한 번씩 생각 나면 그게 아주 사람 죽이거든."
"그렇겠지? 그냥 그런 거 겠지?"
"그렇지 뭐 다른게 있겠냐?"
"자꾸 한경이가 어딘가에서는 살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말이 되냐?"
"그러니까. 그런데 망상 같긴 한데 그래서 나 미쳤나 싶기도 하는데 그게 마치 확신처럼 눌리는 기분 있잖아."
"네가 그랬으면 하고 원하니까 그런 거야."
"그런건가?"
"임신한 여자가 어디 하나 둘이냐? 그리고 임신 했던 여자가 그렇게 걸음이 굳어 버린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냐고?"
"그렇겠지?"
"어쩌면 자살 했다는 것 때문에 네 의식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일 수도 있고."
"응 그래. 한경이가 자살 했다는게 제일 마음 아파 내가 더 잘 해 줬다면 달랐을까?"
"한경이 없는 거 현실이잖아. 현실이 아프지만 인정을 해야지. 애들은 어때?"
"속은 모르지 그런대로 잘 적응 하는것 같기도 하고 사춘기 잖아. 속을 모르겠어. 그냥 학교 가고 학원 가고 집어 오고 나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부분만 겨우 해주고 있어. 아이들 한테 엄마란 어떤 존재 일까?"
"너는 어떤데?"
"나? 뭐 말인데?"
"너 한테는 한경이는 어떤 존재 였어?"
"아 그거 ......모르겠어. 그냥 있던 사람 지금은 없는 사람?"
"그냥 그대로 받아 들여 일부러 감정 따위는 일으키지 말고 네 속을 더듬어서 어떻지? 하고 되 새기지 말고 그냥 그대로 있어. 아이들도 그러고 있을 거야 분명히."
알면서도 그렇게 다짐하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가 죽고 나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지수 만은 달랐다. 워낙 말도 잘들어 줘서 그런지 지수를 만나면 마음 편히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지수와 한경 역시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동창이고 한경과 대학동창이라 둘의 사정을 잘 알았고 그래서 더 편하게 대화 할 수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하고 말을 늘어 놓고 혹은 동정심이 가득한 눈으로 어찌 해줘야 할 지 몰라 하는 주변 사람이 부담 스러웠다.
그런 면에서는 지수는 여자이긴 하지만 자주 만날 이유가 있는 친구였다. 남자와 여자가 밤에 술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고 하면 오해를 하기 쉽지만 영한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말 묻긴 그렇지만 한 번도 묻지 않은 이야기 인데......"
"뭔데?"
"혹시 한경이가 너 한테 어떤 이야기 한거 없어?"
"어떤거?"
"너는 좀 뭐랄까?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잘들어주니까 마음을 쉽게 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한경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에게 달리 뭔 이야기를 한 것이 있나 싶어서."
지수가 정색을 했다.
"아니. 그런 말 없었어. 한경이랑 한동안 연락도 하지 않았는걸."
"왜?"
그냥 나온 말이었는데 지수의 얼굴에시 비취는 경직된 기운이 낯설었다.
"그냥 사는게 바뻐서. 그렇지. 뭐 네 말대로 이제 와서 좀 웃긴다."
한경과 지수는 꽤나 친했다. 그즈음 지수의 말대로 서로 연락 하는 것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친한 사이인데 전혀 연락이 없었다고 하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한경이 나가는 것은 문화센터 소설 창작 수업이 다 인 것 같았다. 그것도 그녀가 실종 되기 전 몇달 뿐이었다.
그래도 만나는 친구정도는 있는 것 같긴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 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알아 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아내가 없으니 지수가 말한 것 처럼 현실을 살아야 했다.
일년이었다. 아내가 죽은지 일년 그 일년은 아내를 잊기에 충분한 시간일까? 영한은 잠시 전자 시걔 속의 날짜를 보면서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