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대관절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리 대하시는 거요? 이보시오! 상현위(懸衛)! 말이라도 해보시오!”
한 노인의 피어린 외침이 허공에 메아리친다.
깡마르고 볼품없는 노인이다. 저런 큰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놀랄정도로 말이다.
“...........”
하지만 상현위라 불리는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상현위라 불리는 사람은 그저 고개만 푹숙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경장갑주를 걸친 것으로 보아 관직에 있는 사람이 분명한 듯 한데 왠지 일개 촌로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광경은 언뜻 이해가 가질 않는 광경이었다.
“우린 이나라 사람들도 아니라는 겁니까! 묘족이라고 해서 이렇게 막대해도 되냔 말이외다! 상현위! 입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 보시오! 우릴 지키는 것이 당신의 임무가 아니었소!”
연이어 들린 한 청년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가득 들어 있어고 꽉 쥔 양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의 외침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 작은 마을에는 혈풍이 불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송군(宋軍)에 의해 마을중앙에 사람들이 끌려 나왔고 그들이 살던 집은 거의 박살나다시피하고 있었다.
대관절 뭘 찾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이잡듯이 뒤져내고 있었다. 아니 뒤지는 것도 그렇지만 모든지 밖으로 집어 던친채 훓어서 찾는 바람에 이들이 가고 난 뒤에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지 그것이 의문이었다.
“상현위! 왜 말을 못하시오!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당신의 일이 아니었소이까! 헌데 당신이 우리에게 칼을 내미는 것이오!”
“.......초....촌장....”
상현위는 자신에게 피어린 외침을 퍼붓는 촌장을 보다 결국 다시 눈을 돌렸다. 그도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건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현위라는 위치는 마을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을의 안전을 위해 도적을 잡고 순찰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 바로 현위라는 직책이었고 상현위는 지금껏 그 누구보다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헌데 그런 자신이 지금 도리어 마을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니.....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별 도리가 없었다.
“죄가 없다면 그만한 보상을 받게된다. 그러니 그만 떠들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가에 울려 퍼지자 얼굴가득 불만을 담고 있던 사람들이 흠칫했다. 그 목소리에서는 인간적인 냄새가 나질 않았다. 장단도 고저도 없이 그저 자신의 말만 하는 목소리에서는 섬뜩한 기운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짙푸른 녹의를 입은 십여명의 사람들, 그들중 누군가 소리친 것인데 상현위는 그들의 위세에 꽉 눌려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대관절 누군지 모르나 적어도 상현위의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한 듯 했다.
“찾았습니다. 대인, 이마을에도 이미 퍼져 있군요”
후두두두둑.....
열심히 주민들의 집으 뒤지던 군사중 하나가 다가와 뭔가를 녹의사내들앞에 집어 던졌다. 꽤 상당한 분량의 서책이었는데 모두가 다 같은 책이었다.
한 녹의인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깔린 책중 한권을 집어 들더니 겉면을 슬쩍 살폈다.
“현몽도(現夢圖)라.....역시 네놈들은 현몽(現夢)의 무리들과 내통하고 있었구나.”
“무....무슨 말씀이시오! 그책은....”
“닥치지 못하겠느냐! 한낱 버러지같은 묘족이 어디 추밀원(樞密院)의 추밀특사(樞密特使)님께 말대답이냐!”
“ ! ”
현몽의 무리라는 말에 발끈하던 촌장은 입을 벌리며 눈을 크게 떴다. 추밀원......명실상부한 송나라 최고 권력기관의 사람이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인데 문제는 그가 지금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고있는데 있었다.
현몽의 무리라는 말, 그말이 바로 이를 증명하는 것인데 현몽의 무리란 묘족만의 국가를 꿈꾸며 송에 대항하는 비밀단체였다. 때때로 그들이 무력으로 송의 군사들과 교전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책이 네놈들에게는 별 것 아닌지 몰라도 현몽의 무리들에게는 경전(經典)이나 다름없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건 억지요...그책은 그저 글을 모르는 우리 묘족들을 위해 서현(徐泫)어르신이 만드신 책일 뿐인 것을 그것이 어찌 현몽의 무리와 내통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까!”
촌장은 얼굴빛을 하얗게 물들며 이야기 했지만 녹의인들의 얼굴은 차가웠다. 그들은 냉막한 웃음을 지으며 촌장을 향해 나직히 입을 열었다.
“서현......그래 그 사람이 이 책을 지었지. 그 때문에 우리도 이 궁벽한 곳에서 이고생을 하고 말이야...”
차갑게 말을 뱉은 녹의인은 신형을 돌리며 마을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사라질것만 같던 녹의인이 입이 갑자기 열렸다.
“다 죽여.”
그의 말 한마디에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창을 겨누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대로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트....특위님! 이건 말이 다르지 않.......”
상현위는 얼굴색을 파랗게 만들며 추밀특위에게 소리쳤으나 채 말을 맺을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이번엔 그들의 앞에 검은 흑의인들이 주욱 서 있었다.
그들의 눈. 너무나도 맑고 정광이 흘러 나오고 있었지만 나현위는 알수 있었다. 이들은 무림인들이 분명했다. 그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자신을 바라보는데 더 소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찾으시는 것은 찾았소이까?”
“유감스럽게도 없소이다. 아무래도 이마을엔 없는 것 같소만...”
“헛헛 이곳외에도 마을은 아직 많소이다. 아참, 혹 이것이라도 실마리가 된다면 가지시구려.”
추밀특위는 흑의인중에 한명에게 현몽도를 내밀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흑의인은 그 책을 물끄러미 보더니 갑자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부스스스.....
책이 반동강나더니 땅바닥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잠시 서있다가 신형을 돌렸다. 칠흙같은 어두움속으로 그들도 사라져갔다.
“크윽.....”
상현위는 귀를 막으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주민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비록 묘족이기는 하나 그들도 역시 소중한 생명임에 틀림이 없던 것이다.
휘영청 밝은 달만이 그저 묵묵히 대지를 비추는 가운데 대지는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핏빛이 진해지면 진해질수록 사람들의 안타까운 비명소리는 점차 사그러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