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계, 스파티윰.
그중에서 물의 기운이 가득한 이곳, 엘라임의 영역.
오늘따라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자신의 영역에 물의 기운이 풍만하다고 느낀 엘라임은 오랜만에 정령들을 탄생시키기로 마음먹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엘라임의 아름다운 음색이 물의 영역에 널리 퍼졌다.
「탄생하라, 나의 아이들이여.」
잔잔한 엘라임의 멜로디에 물의 영역 이곳저곳에서 물방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숲의 이슬을 닮은 물방울들은 귀여운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운디네로.
험난한 계곡의 폭포를 닮은 물방울들은 성숙한 소녀의 모습을 한 운다인으로.
고요한 호수를 닮은 물방울들은 늠름한 푸른 늑대의 모습을 한 엔다이론으로.
그리고 드넓고 짙은 바다를 닮은 물방울들은 아름다우며 위엄있는 수룡의 모습을 한 엘레스트라로 탄생했다.
순조롭게 물의 정령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을 때, 딱 하나.
숲의 이슬 색을 가진 한 물방울이 크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엘라임이 그 고동을 느꼈을 때, 물방울은 점점 커지더니 순식간에 엘라임을 집어삼켰고, 동시에 그의 힘을 반이나 앗아가기 시작했다.
「윽······! 뭐, 뭐지?」
당황한 엘라임은 신음을 뱉으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생각했다.
그 순간, 엘라임의 힘을 앗아갔던 물방울은 갑자기 뚝! 고동을 멈추더니 이내 조용히 엘라임을 응시하듯 빛나기 시작했다.
숲의 이슬을 닮았던 물방울은 시간이 지날수록 폭포를 닮아가고, 호수를 닮아가고, 바다를 닮아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유일무이한 최초의 물방울이자 스파티윰의 색인 아쿠아마린의 물방울이 되어버렸다.
엘라임의 언령에서 시작된 물방울은 결코 색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물방울은 색이 변한 것은 물론, 하나뿐이어야 할 엘라임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물방울을 본 엘라임은 또 하나의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일무이한 산호초 바다 같은, 보석의 색을 뚜렷이 담은 물방울.
그녀는 천천히 물방울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러자 자신에게 반응하듯 울려 퍼지는 그 물방울만의 맑은 음색에, 엘라임은 곧 물방울이 ‘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루만지면 만질수록 이 물방울이 자신의 힘을 가져갔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아이야······. 네가 내 힘을 가져갔구나. 왜 이리 슬프게 울고 있는 것이냐?」
그것은 상냥한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엘라임의 목소리에 물방울은 작게 고동쳤지만, 대답은 그것이 다였다.
엘라임은 기다렸다.
이 물방울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물방울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이 물방울에서 터져 나오더니 이내 물방울은 곧 작은 소녀가 되었다.
감겨있는 눈동자는 분명히 엘라임과 같은 색일 것이었다. 물결치듯 아름답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엘라임과 같이 색이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형태가 점점 완성되었을 때, 울의 영역이 작게 고동쳤다.
그것은 정령왕이 태어났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엘라임은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눈을 떠 보렴, 나와 같은 기운을 가진 유일한 아이야.」
포근한 존재의 목소리 덕분일까.
감겨있던 눈이 점점 아쿠아마린의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바람결에 날아가 버린 머리카락들은 작고 맑은 물방울이 되어 사라졌다.
참으로 신비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작은 소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소녀였다.
소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어, 어머···니?」
‘어머니’라는 울림을 처음 들은 엘라임은 마음에 왠지 모를 벅참을 느꼈다.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모든 물의 시초이자, 이를 관장하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다. 그리고 너는 내 힘을 가진 유일한 정령 운디네다.」
「운···디네? 하지만 전······!」
「아이야. 너는 원래 정령으로 태어났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네가 태어날 때 나조차 네가 나의 기운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가르쳐줄 수 있겠니?」
엘라임의 질문에 소녀, 운디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어머니’란 느낌의 존재를 만나서 그랬을까.
운디네는 마치 혼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붉은 입술이 오밀조밀 움직이는 게 너무나도 신기할 정도였다.
「사람들에게······상처를 받았어요. 내 이곳에 슬픔과 분노가 가득 찬 것 같아요.」
운디네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엘라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운디네의 머리에 살포시 손을 얹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잘못한 것은 없다고 위로하는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
그 손길 덕분에 가슴 속에 가득 찼던 슬픔과 분노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지, 운디네는 천천히 미소를 그렸다.
「이리 오거라. 내 무릎에 누워 그동안 네가 겪은 쓸쓸하고 아팠던 이야기를 모두 해주렴.」
엘라임은 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는 조용히 그녀의 무릎을 베게 삼아 누운 뒤, 천천히 눈을 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운디네의 이야기는 조금 긴 이야기였다.
그러나 엘라임은 운디네가 가슴 속의 울분을 모두 다 토해낼 때까지 신경쓰지 않았다.
엘라임은 운디네가 순수한 정령의 마음으로 돌아갈 때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울 리 없었던 운디네의 고운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엘라임은 그런 운디네를 다정히 꼭 껴안아 주었다.
「울지 마라, 아이야.」
엘라임은 인간처럼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처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정령이 있다는 걸 신기해하며, 운디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운디네의 눈물은 곧 엘라임의 손끝에 곧바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제야 얼굴이 조금 붉어진 운디네는 살며시 고개를 숙인 후 곧장 울음을 그쳤다.
엘라임이 상냥하게 말했다.
「기분은 많이 나아졌니?」
운디네는 엘라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디네는 가슴에 다시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요. 이미 떠나간 삶인데도 그들이 용서되지 않아요.」
엘라임은 그런 운디네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손을 잡아주었다.
엘라임은 자신과 똑같은 아쿠아마린의 눈동자를 가진 운디네를 바라보았다.
엘라임은 물의 정령왕으로서 아니, 어쩌면 ‘어머니’로서 지을 수 있는 가장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운디네에게 말했다.
「이미 떠나간 삶이라도, 용서되지 않으면, 용서하지 말거라. 네가 원하는, 네 뜻대로 하거라. 아이야. 내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이름으로 이를 허락한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
「어머니···.」
「너를 축복한다, 아이야.」
엘라임은 조용히 눈을 감은 운디네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서 시작된 엘라임의 고동은 이마를 타고 운디네의 몸으로 퍼졌다.
영롱한 눈동자가, 맑은 목소리가, 부드러운 물의 기운이 소녀를 향한다.
「나와 닮은, 내 작은 아이야. 누가 뭐라 하든 나는 항상 네 편이란다. 자, 이제 네가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가렴. 인간의 손이 닿은 적 없는, 맑고 영롱한 호숫가 ‘라이라’로······.」
엘라임의 말에 운디네의 몸은 곧 작은 물방울로 변하여 사라졌다.
* * * *
아쿠아마린의 푸른 호수, 라이라 호수에 작은 물방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새로 태어난 운디네의 물방울이었다.
그러나 이 물방울은 평범한 운디네의 물방울과는 어딘가 조금 달라 보였다.
엘라임을 빼닮은 아쿠아마린 빛의 물방울···.
곧 라이라 호수에 푸른 빛이 그윽하게 펼쳐지더니 이내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한 운디네가 나타났다.
「드디어 ‘라이라’의 주인이 돌아왔어!」
운디네는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여러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숲을 닮은 은녹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날개 달린 존재들이 운디네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운디네가 한국에서 보았던 은빛의 존재들과도 같은 것이었다.
「···누구야?」
「난 바람의 정령, 실프야.」
「실프···?」
실프라는 말에 은녹빛의 머리칼이 바람결에 따라 흩날리기 시작했다.
운디네의 말에 대답하듯 실프들은 곧 그녀의 주위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듯 보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미동조차 없던 라이라 호수가 실프의 춤사위에 맞춰 잔잔하게 물결쳤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라이라 호수가 마치 다른 정령들을 불러 모으기라도 했는지 속속히 다른 정령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록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나뭇잎 옷을 입고 있는 정령, 또 다른 실프, 라이라 호수에서 태어난 물의 최하급 정령 나이아스, 땅에서 고개를 내미는 난쟁이 정령, 숲에서 살짝 몸을 보이는 호박 빛깔 머리칼의 꼬맹이 정령까지······.
「아하하!! 네이핀에 실프에 니트라스에 나이아스에 놈까지?」
「모두 정령? 나의 친구들?」
「이상한 소릴 하네. 같은 정령이면 친구인 것이 당연하잖아? 이 호수의 주인은 이상한 정령이네.」
소녀에게 말을 걸었던 실프가 또 다른 실프를 불러 호수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인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이아스도 실프의 춤에 이끌려 호수 속에서 춤을 추었고 빛의 정령 니트라스는 지나가던 빛길의 방향을 바꾸어 호수 위에서 춤을 추었다.
숲의 정령 네이핀은 처음으로 만난 라이라의 주인에게 환영하는 뜻으로 실프들과 함께 노래했으며 땅의 정령인 놈마저 온 몸으로 땅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굳어있던 운디네의 표정이 너무나 귀여운 소녀의 미소로 변해있었다.
‘라이라’ 숲이 호수의 주인인 운디네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아하하!!」
「아하하!!」
라이라 숲의 근처에 있는 마을의 사람들도 즐거운 정령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밭을 갈며 농사짓고 있었는데 바람에 실려 온 정령들의 웃음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힘겨운 것을 잊고 있었다.
“라이라 숲이 노래하고 있군.”
“그러게요. 라이라 숲이 노래하고 있어요.”
“얼마만의 즐거운 노랫소리야. ‘그 사건’이 있은 후로 한 번도 노래하지 않았던 라이라 숲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니.”
사람들도 숲의 노래에 따라 노래하고 웃었다.
나이칼 제국의 커다란 숲, 라이라에서 시작된 웃음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그 사건···.
‘라이라 황녀 암살 사건’은 1년이 지났지만, 끝내 암살범을 잡지 못하고 안 좋은 결과로 끝나 나라 안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이다 못해 곧 내전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1년 만에 황녀의 이름과 같은 그 라이라 숲이 노래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람들을 웃음 짓게 만들었다.
숲의 노래는 빛의 정령 니트라스가 달빛에 심취해 춤을 추는 밤이 되어야 끝이 났다.
「내가 웃을 수 있다니···. 얼마만의 웃음인지 몰라.」
호수 위에 앉은 운디네가 실프를 보며 말하였다.
은녹빛의 빛을 발하는 실프가 운디네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상한 말이야. 너는 지금에야 태어났어. 그러니 얼마만의 웃음이란 건 이상한 말이야. 안 그래?」
「······그러네.」
운디네가 작게 웃었다.
실프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지금 다시 태어난 것이다.
얼마만의 웃음이란 건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실프가 작게 말하였다.
「운디네, 너도 이제 가꿔야해.」
「···무엇을?」
「주인이 없던 라이라 호수를 말이야. 아쿠아마린의 빛이 더욱 더 맑고 아름답게 빛나도록 너는 그렇게 만들어야해. 이것은 바람의 정령인 나도 나이아스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오직 주인인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나의 호수···.
운디네는 호수의 수면을 매만졌다.
그러자 물속에 있던 나이아스가 고개를 내밀며 운디네를 향해 인사했다.
그녀는 곧 호숫가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나에게 맡긴 일.」
「어머니?」
실프는 이상하다는 듯이 운디네에게 다시 되물었다.
자신들에게 ‘왕’이란 존재는 있었지만, ‘어머니’라는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디네는 상관하지 않았다.
황녀였을 때, 그녀도 엘라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모든 물의 정령들의 왕. 잔인한 4대 정령 중 하나라고···.
그러나 그녀가 운디네로 새로 태어났을 때, 모든 정령들이 ‘왕’이라고 불러야 할 때, 엘라임은 그녀에게 ‘어머니’라고 불러도 된다고 허락 아닌 허락을 했다.
진짜 ‘어머니’처럼 그녀가 상처 받았을 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너무나도 포근해 황녀였을 적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자신의 어머니 황비보다 더 어머니 같다고 느꼈다.
엘라임은 그녀의 능력을 믿고 라이라 호수를 맡겼다.
운디네는 눈을 감고 엘라임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실프. 어머니의 소리가 들려.」
「···어머니의 소리···?」
「응. 어머니의 소리. 숲에도 이 호수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전부 다 어머니의 소리야. 어머니의 소리는 제각각 다르지만, 어머니께서 응원해주고 계셔. 작은 우리들을 위해···.」
「···역시 넌 이상한 정령이야.」
운디네는 실프의 말에 싱긋- 미소를 짓더니 물 위에 몸을 눕혔다.
그녀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닮은 라이라 호수가 맑은 빛깔로 빛나기 시작했다.
밤새 떠들던 실프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고, 모습을 보이지 않던 많은 정령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늦은 밤, 운디네의 노래였다.
모든 정령들이 각자 자신의 정령왕 품에 안긴 것처럼 운디네의 노래는 맑고 투명하고 포근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음색···.
가사도 없다.
그에 걸맞은 춤도 없었다.
그러나 멜로디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인간계에서도 정령계에서도······. 그건 역시 이 ‘운디네’ 고유의 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