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끝까지 내려와 맴돌고 있는 이 말들을 폭포수처럼, 천둥번개처럼 쏟아내버리고 싶었다.
그렇다면야 속은 시원하겠지만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뻔했다.
대신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고 일찌감치 상황을 종료시키기로 했다. 이를 악물고, 용기를 내어 입을 뗐다.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죄송하면 다냐!’ 식의 대꾸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거참, 들어나 봅시다!’라면서 중지시켰다.
“제가 이 일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저도 피해자에요. 여러분의 말씀대로라면, 동시에 저는 가해자이기도 하죠. 지금은 저도 혼란스러워요. ”
말이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공손하다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야. 나는 가해자가 아니야. 누군가가 나를 해치려고 한 건 아닌가요.
그렇지만 이 곳에서 속내를 드러낸다는 건 곧 약점이 된다.
그럼 불이 나는 동안 마드린느는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요즘 같은 수확철에 납품업체를 찾으려 다니려고 마드린느가 바쁘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혼자서 재배를 하다보니 소량으로밖에 수확할 수가 없었고, 조그마한 양의 농산물을 수입하려는 상인들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서 거래처를 찾아야 했다.
더군다나 제값을 쳐주는 상인들은 20대보다는 경험이 많고 노련해보이는 40대의 농산물을 수확했다.
아니면 최소한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일궈 어느 정도 책임감이 있어보이는 자를 원했다.
마드린느가 수확한 토마토의 품질은 나쁘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마드린느는 거래에 있어서 여러모로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자세한 정황을 알아보고 불길을 추적하는 것보다 먼저 이 난동을 끝내자.
그리고 다음을 생각하자.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을 안심시킬 방법이야 뻔했다. 배상.
“정황상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피해입은 분들에게 제가 드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보상해드리는 것,
그걸로 이 일을 넘어갈 수 없을까요?
갑작스런 사고였잖아요.”
그리고 이 마을을 떠나리라.
나가기 전에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는 바보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불은 손대지도 않는다.
그런 덤벙거리는 성격으로는 혼자서 매년 거래를 성사시키지도 못한다. 혼자서 모든 것을 신경써야 한다.
그래서 아예 불은 거의 켜놓지도 않는다. 애초에, 여기 그랑드는 그렇게 불이 필요가 없는 곳이다.
그랑드의 계절은 따스한 봄과 산뜻한 여름에서만 머물렀다.
이곳에서 가을과 겨울이란 머나먼 얘기였다.
아리따운 금발처럼 노랗기도 하고,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갛게 물들기도 한다는 낙엽을 보고 싶다면 이곳을 떠나야 했다.
차가운 목화처럼 생겼다는 눈을 보고 싶다면 역시 산맥을 넘어 이 지역에서 벗어나야 했다.
험준하기로 악명을 떨치는 ‘울지 않는 산맥’ 이나 ‘웃지 않는 산맥’ 을 넘어 그랑드, 올랑드, 머드랑드 등 여러 마을이 있는 셸 아일랜드(shell island)를 벗어나야 했다.
아니면 저 아래로 내려가 바다를 넘어서야만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있었다.
다만 그 바다의 물살에서, 한치 앞도 모른다는 바다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셸 아일랜드(shell island). 일명 ‘조개껍질 섬’.
실제로는 섬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분이지만, 울지도 않는, 그렇다고 웃지도 않는다는 묵뚝뚝한 산맥들이 사람들의 드나듬을 까다롭게 해 마치 섬과도 같다, 하여 부채꼴 모양을 본 따 ‘셸 아일랜드(shell island)’ 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예로부터 엘프들의 보금자리였다는 산맥들의 영향인걸까.
아니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적지만 대신 다른 종족들이 많이 머물러있으며, 호기심으로 무장한 손님들에게만 손을 내준다는 전설들로 가득해 유명세를 떨친 이 섬은 다른 대륙들과는 달리 아지랑이와 가까웠다.
날씨는 따뜻했고 햇빛은 부드럽게 대지를 적셨지만, 그랑드의 사람들은 부족한 찬바람이라도 대신 채워야겠다고 결심이라도 했는지, 한없이 차갑기만 했다.
찬바람 속에서 마드린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각 호(戶)당 3000체리씩 보상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모아 놓은 돈으로는 부족할테니, 시내에 나가서 돈을 빌려서 충당해드리죠.
6,000체리. 12호에 6,000체리씩이면 72,000체리. 각 가정에 돌아가는 돈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마드린느에게는 큰 돈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6,000체리는 다시 농사를 시작해 볼만한 금액이었다.
마드린느도 농사로 밥벌이를 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금액이 적당한지는 잘 알았다.
아니, 사실 그녀가 배상한다는 일 자체가 이상하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랑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 마지막 남은 자상함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마드린느는 갑작스레 준비된 상냥함이 달갑지는 않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어 한 움큼 받아들고서 입안에 넣어 씹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