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백합은 항상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빨간 무당벌레가 와서 햇빛을 피해도,
허리가 잘록한 개미가 와서 잠시 머물러도,
위풍당당한 뿔 뽐내는 장수풍뎅이가 와서 놀고가도
잠시 고르고 하얀 치아 보이며 배시시 웃어줄 뿐
다시 누군가를 기다린다던데.
그 누가 와도 백합은 항상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노란 나비가 다가와 소곤소곤 속삭여도,
동네 꽃처녀들 놀러와 꺄르르 웃고 떠들어도
재간둥이 토끼들이 발놀림으로 재롱을 부려도
백합은 절대 누군가를 잊지 않고
하얀 기다림만을 보여줄 뿐이라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게 진짜라면,
백합의 그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요?
-예로부터 그랑드에 전해 내려오는 시구 중 하나-
마드린느는 소가 이끄는 달구지 뒷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너무 오래 신어서 이젠 한 몸 같기도한 갈색 장화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3일 후면 시내에 도착한다. 그럼 해방이야. 다들 안녕이지. ’
울퉁불퉁한 길에 몸을 부딪치며 시내로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배상을 하겠다는 말이 끝나자 마자, 사람들은 금방 웃어주었고 아껴두기라도 했었는지 전혀 보지 못했던 친절함을 베풀어주었다.
부족한 돈을 빌리러 시내에 가겠다는 말에 달구지까지 구해주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린느의 말을 쉽게 믿을 만도 했다. 그 동안의 마드린느는 고지식했다. 묵묵하게 자기 할 일만 하는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쓰잘데기 없는 투정이나 트집에도 말 없이 고개를 네네-하고 숙였다. 씀씀이조차 어린 사람답지 않게 동전 하나 허투루 쓰지 않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그렇게 한다면 언젠가는 보다 나은 삶이 자기를 맞이해 줄거라고 믿었다. 화재가 있기 전까지는. 몸은 힘들었어도 마음에는 작은 희망이 새싹을 피우고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라도 나중에는 달라지겠지. 조금만 더 모으면 더 큰집에서 살 수도 있겠지. 어쩌면 강아지와 같이 살 수도 있을지도 몰라. 2층에는 서재를 두는 건 어떨까.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이야기들. 늠름하고 멋있는 백마 탄 왕자님들과 아름답고 수줍은 공주들의 사랑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야지. 화실도 두면 좋을 것 같다. 잠들기 전에 간단하게 그림을 그리고 자는 거야. 그럼 침실이랑 화실이 가까워야겠지.
허망하게 보이는 희망으로 버텨왔다. 환상이 손 안에 들어오는 그 날이 오리라 믿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지금은 부끄럽고 또 한심해서 헛웃음만 계속 나왔다.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붕 떠서 살았구나. 어쩌면 화재가 난 게 다행일지로 모른다. 집이 타들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뇌리 속에 박힌 것은 슬픔과 충격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 감각이었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대신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먹혔고, 탈출할 기회가 왔다. 시내로 가는 데만 일주일이다. 거기에 돈을 빌리기까지 해야하니, 대략 2주 정도는 기다려줄 것이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돈에 눈에 먼 건지, 그나마 사람들이 인심이 남아있다고 해야 할지… 지금까지 모아 놓은 돈을 선뜻 내놓겠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믿다니.’
어떻게 모든 돈인데. 9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작은 레이스 조각조차 사본적이 없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만 소비했을 뿐, 그 외적인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레몬 파이? 사치다. 식사를 배를 채우면 그만일 뿐 사람들이 잘 사지 않아 딱딱하게 굳어버린 밀가루 빵을 싸게 구매해 수프에 적셔 부드럽게 만들어 먹으면 그만이었다. 포도주? 크림맥주? 역시 사치다. 물로 목을 축이기만 했다. 향기가 나는 마실 것, 뭔가 색이 도는 마실 것은 멀리서 향을 맡아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른 아이들이 서로 눈이 맞아 연애를 하고 서로의 눈동자 색이 얼마나 황홀한지에 대해 속삭일 때에도, 가끔씩 시내에서 축제가 벌어진다고 해도, 마을에 경사가 나 잔치가 일어나든 말든 마드린느의 하루는 오로지 일로만 가득 차 있었다. 포도, 토마토, 오이, 감자, 페퍼민트, 로즈마리 등 키울 수 있는 건 다 재배했다. 항상 그을렸다 못해 검게 변해버린 피부였고, 손에는 초록물이 들 정도였다.
수입이 생기는 족족 모아서 시내의 ‘버그만 대금’ 에 맡겨놨다. 대금업자인 버그만 씨가 운영하는 ‘버그만 대금’ 은 돈을 맡기면 조금씩 이자를 붙여줘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돈을 빌려주기도 하는데, 적지 않은 이자를 내야 했다.
그나마 버그만 씨에게 돈이라도 맡겨놓은 게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리고 믿을 사람 하나 없는, 다른 사람들은 없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 흔한 피붙이조차 없는 마드린느에게 돈이야말로 떠나지 않는 친구였다. 남을 어떻게 믿냐며 버그만 씨에게 돈을 맡기는 마드린느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 사람들이 이 상황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지금 가면 이자가 더 붙었을 지도 몰라. 돈을 챙기고, 수소문을 해서 항구로 내려가 배를 타던지, 아니면 산맥을 넘던지 해서 그랑드에서 날 추적할 수 없도록 해야겠어. ’
‘그래, 지금까지 사람들 눈치만 보면서 살았어. 나도 내 인생을 찾아야지. 그랑드에서는 뭐 내 할말도 다 못하고 살았지만, 이래뵈도 22살의 어엿한 성인이지.’
한스 아저씨가 싸준 빵을 한입 크게 베어물며 달구지 위에서 새 삶에 대한 다짐을 하고 있는 동안, 소는 이런 마드린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음메-하고 울며 덤덤히 걷고만 있었다.
간만의 여유를 즐기던 마드린느에게 바람이 다가왔다. 머리를 살짝 헝클어뜨리고, 볼을 간지럽히는 산뜻함. 그랑드에서의 화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개껍질 섬은 여전히 따스한 기운에 젖어 있었다. 오늘의 섬은 아름다웠다. 나들이라도 하는 듯 노란 개나리들이 병아리떼들 마냥 만발해있어 길 가장자리를 꾸며놓고 있었다. 조그맣게 민들레도 하나 둘씩 띄엄띄엄 피어있었고, 유채꽃들도 모여있었다. 햇빛을 받은 길은 요정들이 황금이라도 솔솔 뿌려놓은 듯 했다. 누가 애써 꾸며놓은 것도 아닌데, 정원사 없이도 섬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