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증이 커진 마드린느가 먼저 말했다.
“ 안개 속의 티그리스이시여, 저는 마드린느 테르피 입니다. 티그리스 가문의 저택에서 보내 오게 됐습니다. ”
마드린느가 팔꿈치로 툭 치자 사내도 말했다.
“ 저는 가이온 아벨 티그리스 입니다. 여신이시여, 저도 티그리스 가문에서 왔습니다. 로첸 티그리스의 막내 아들이자 후계자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
그 말을 들은 마드린느는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꽤나 놀랐다.
건방진 태도며, 흰 피부며, 긴 검과 저택과 가문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가문의 막내 아들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같은 저택에 있던 영주 부부 얼굴도 모르는 데 어떻게 막내 아들 얼굴을 알겠는가.
그런데 막내 아들은 하빈 학원에 가 있다고 했는데?
아, 모르겠다.
머리를 굴려보자면, 그럼 이 남자는 나를 제물로 바칠 속셈이었던 건가.
여신에게 소원을 빌고 나를 제물로 바칠려고?
그렇다면 그냥 수면제를 먹이면 될 거 아닌가.
그리고 그 거창했던 설명들은 다 뭐지?
뭔 생각을 하는 지 도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여신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은 가이온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한 번만 더 눈을 깜박이면 눈물이 흘러내릴 듯한 눈으로 여신에게 고개를 들며 주먹을 쥐고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여신이시여… 여신이시여… ”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는 가이온을 여신이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작지만 노파와 같은 세월을 살아온 영혼이 저 앞에 있었다.
가이온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강해지자.
이 순간을 위해 학원에서 몰래 도망쳐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 저희 가문이 티그리스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여신의 수호 아래서라 들었습니다. 저의 아버지이자 가문의 주인이신 로첸 티그리스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와 영광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의 계약은 필요치 않습니다. 티그리스 가문의 일원이자 벨체 라 돌리아 저택의 일원으로써, 로첸 티그리스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실질상 현 가문의 주인으로써 말씀드립니다. ”
아무런 표정도 없이 먼 풍경을 보는 사람처럼 소년을 쏘아보는 여신 앞에서 가이온은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그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어릴 적부터 숱하게 생각해왔던 이 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이 방식밖에 없다고 여겨지던 이 일.
유일한 해결책.
“ 계약을 철회해주십시오, 여신이시여. ”
“ 아버지와의 계약을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제 옆의 소녀는 더 이상 제물이 아니며, 앞으로도 저희 가문이 제물을 바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절대코! ”
말이 없던 여신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만 갔다.
여신을 비추던 꽃들이 다 시들어가며 봉우리를 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사람 주위에 있던 안개꽃들도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자취를 감췄다.
여신 뒤에 곱게 서 있던 호랑이가 서성이기 시작하더니,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낮게 포효했다.
으르르르…..
땅이 진동하며 몸까지 덜덜 떨렸다.
바짝 긴장한 마드린느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손에 힘을 꽉 주며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긴장감에 무릎을 덜덜 떨었다.
차가운 공기가 온 몸에 찰싹 달라붙어 파충류가 목을 감싸며 서서히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호흡이 가빠졌다.
후하, 후하…
정신 차리자, 마드린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들 했잖아.
이 와중에 옆에서 키득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높은 목소리들이 위에서, 아래에서, 아니 사방에서 들려왔다.
푸훗- 하고 작게 웃는 소리, 대놓고 깔깔거리며 비웃는 웃음소리, 냉소가 가득한 웃음 소리와 딱딱 거리며 이를 부딪치며 어리석게 굴지 말라는 소리.
“ 어머, 대체 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 무식한 자가 제일 빨리 죽는 법이지. ”
“ 계약 철회라고? 그러면 그 동안 먹은 밥이 얼만데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자 이거야? ”
“ 여신이 실망했어, 실망했어! ”
“ 고작 그런 말을 하려고 이런 데까지 왔어? 이런 바보를 봤나… ”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성인 여자의 목소리도 있었다.
“ 그만들 하시게. ”
계속되는 얼굴없는 수다를 진정시킨 여신은 호랑이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개도 물러가며 주변에 흐르고 있던 강물들이 보였다.
달빛은 다시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풀밭은 작게 생동감을 깨우치고 있었다.
“ 가이온 아벨 티그리스여, 이 어리석고 건방진 자여… 내가 특별히 그대의 아버지를 아껴 강의 이름을 성으로 쓸 수 있게까지 해주었건만. 그만큼의 은혜도 네게는 필요없다 이건가? 젊은이여, 이 오만한 이여… ”
앳되고 맑은 음성이 계속됐다.
“ 과거에는 부와 명예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고 말했던 로첸과는 달리 너는 내게 이제 아무 것도 필요없다 말하는구나. 그래, 너는 아버지와는 다른가? 아니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자인가? 티그리스란 이름 아래 누린 호사와 기쁨이 너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느냐? 그것들이 없다면 너는 지금까지 해오던 생활을 버리고 평민으로 돌아가 항상 쪼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피부는 그을려지고, 몸은 허기지고, 사기에 피바다를 당해도 할 말이 없지… 네 옆의 아가씨처럼 윗사람들 말 몇 마디에 제물 처지가 될 수도 있고 말이야… ”
“ 잘 알고 있습니다. 젊음의 패기로 이뤄진 결정이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소망해오던 것입니다. 값비싼 향신료를 쓴 음식과 여러 날 마셔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잔들보다 저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혼이 편안해지는 걸 원합니다. 이는 오직 계약 철회로만 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티그리스여, 저희 가문을 여러 날 동안 보살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으나 그 은혜는 저희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것들이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돌려놓고 싶을 뿐입니다. ”
“ 원래대로라면 계약의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한 계약을 철회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그대들의 가문을 후손대대로 수호하기를 약속했으니… 어찌 이를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이 계약을 철회하면, 그대는 내게 무엇을 해줄거지? 이제 나는 더 이상의 제물도 받아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버리는데 말이야. ”
“ 당신이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제 목숨이라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다만 이 옆의 아가씨는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부디 보내주십시오. ”
“ 그대는 왜 그리도 애를 쓰는가? 바람에 맞서는 젊은이여, 나와의 연을 끊으려는 그 심정은 어디서로부터 온 것인가? 안심하게. 내가 그대들을 해치지는 않아. 다만 안쓰러울 뿐이지. “
“ 저희 가문의 비극은 오만함과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생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께서 지치고 쓰러졌을 때 그 앞에 기꺼이 나타나 주신 여신께 생명을 건져주신 기적을 체험하고도 감히 먼저 다른 소원을 들어달라 청을 드렸습니다. 그 처지에서는 가진 것이 없어 넘볼 수 조차 없는 그런 소원… 대륙의 저 거상들이나 왕족들 못지 않게 사치를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부리고 자신의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그런 힘과 부를 달라고. 군림하고 통치할 수 있는 영주의 자리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