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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그리스 강가에서
작가 : 애플타운
작품등록일 : 2016.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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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리브 (2)
작성일 : 16-06-06     조회 : 432     추천 : 0     분량 : 4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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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옛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 있어 주었다.

 

 이 세상을 무엇으로 살아가느냐고 묻는다면, 이미 떠나가 버린 이들이 보여줬던 사랑으로, 그들이 남기고 간 기억으로 마음을 데피며 살아간다고 답할 수 있으리라.

 

 “ 리브, 네 심정이 이해가 가. 네가 지금 왜 이렇게 됐는지도 이해가 가고. 나도 아버지 얼굴은 몰라. 1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이후로 쭉 혼자서 생계를 유지해왔어. 물론 너처럼 다른 아이들의 삶까지 책임진 건 아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아주 고달프고, 외로워. ”

 

 “ 그렇군요. 마드린느 양도 대단하시네요. ”

 

 리브가 생긋 웃어주며 말했다.

 

 리브의 청색 눈동자에 모닥불이 비쳐져 눈동자 속에 장미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아직 꽃봉우리를 만개하게 피우지 못하고서 힘겨워하는 장미였다.

 

 “ 그래서 네가 어머니 이름에 예민하게 행동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

 

 “ 가족의 이름 앞에서야 모두들 발끈하는 게 정상이지. 그게 어떤 의미든 말이야. ”

 

 잠자코 듣고 있던 가이온이 말했다.

 

 “ 나야 부모님 두 분이 다 계시고, 어릴 적부터 저택에서 살아 다른 사람들 힘든 거에 비하면 투정 부리기도 미안하다고 여기겠지. 그런데 난 티그리스 여신과의 계약으로 가문의 사람들이 미쳐가는 걸 22년 동안 보면서 자란 사람이야. 나만 빼고 미쳐가는 가족들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절망적이지 아나? ”

 

 “ 그래서 당신은 계약을 철회하기 위해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러 가는 겁니까? ”

 

 “ 여신이 명했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와 나는 만날 일은 커녕 서로 얼굴도 볼 일이 없었겠지. ”

 

 “ 역시 티그리스 여신의 속은 짐작이 안 되는군요. ”

 “ 마드린느도 티그리스 가문과는 아무런 상관은 없지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계약에 참여를 하게 됐네. 도망가려고 한다면 우리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가 우리 목을 죄어 저 세상으로 보내버릴거라 하더군. ”

 

 리브는 목에서 반짝이는 얇은 목걸이들을 바라보았다.

 

 희미했지만 금과 은이 물결처럼 얇게 그들의 목을 감싸며 찰랑거리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유함의 상징이 될 법 했으나 그들에게는 끊어버리기 위해 먼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올가미였다.

 

 삶에 쫓기며 말을 박차며 부리나케 달리는 듯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 셋은 서로의 생이 약간은 닮아 있는 면에 어색한 동질감을 느꼈다.

 

 다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공감대를 얻기도 했다.

 

 인생은 모두에게나 힘든 것이다.

 

 그게 다른 부자든, 고아이든, 영주든, 농부든, 인간과 많이 닮아버린 엘프든 말이다.

 

 “ 엘프라면 17살이라 해도 아이의 모습을 하기 마련인데 왜 사람과 같은 속도의 성장을 하고 있는 거지? ”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가이온은 이제서야 물어보았다.

 

 물어보지 않고서야 배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 엘프들은 종족을 불문하고 노화가 느리다고 했다.

 

 그래서 겉모습만으로 나이를 짐작하는 실수는 하지 않는 게 맞다고 들었거늘, 이 엘프는 17세, 그나이대로 보이는 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 태어날 적부터 인간들의 마을에서 생활해왔습니다. 어머니도 그 때문인지 일찍 돌아가셨구요. 주변에 엘프가 없으니 몸이 자연스럽게 인간이라 인식해 버린 모양입니다. 저희는 항상 주변에 동화되기 마련이니까요. 엘프는 발자국을 따라 갈 뿐입니다. 숲이면 숲을, 사람이면 사람을 따라 걷습니다. ”

 

 아무리 엘프라 해도 인간들과 오래 생활하면 그 능력을 다 잃어버리는 모양이다.

 

 주변과 동화되어버리는 능력은 축복이라기에는 잔인한 면이 많았다.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주변과 닮아갈 필요가 있는건지.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굳이 인간의 삶을 닮아갈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그 누가 리브를 같은 인간으로 칭할 것인가?

 엄연하게 따지면 결국 다른 종족인 것을.

 

 아무리 다른 사람들을 닮으려 애써도, 그는 이방의 세계에 속해 있다.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애써봐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꾸역꾸역 기다리는 삶.

 

 “ 아버지가 인간이라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온전한 엘프는 아닙니다. 순수한 혈통은 아닌 셈이니, 이도 저도 아닌 삶입니다. ”

 

 “ 그래도 가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거잖아? ‘투르크’ 라면서. 엘프 족을 다스려 왔다면서. ”

 

 “ 그건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연락 한 통 없었는데 이제 와서 찾아간다니. 냉대를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네요. ”

 

 “ 그래도 엘프는 종족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다. 넌 돌아가야만 해. 아무리 반만 엘프라 해도 엘프가 아니라 할 수 있나?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주변과 동화되어버리는 자, 종족을 떠나버리면 쓸데없이 고생한다고. ”

 

 가이온은 무조건적이라는 믿음을 가진 채로 말했다.

 

 그는 가문의 이름, 가족, 이런 요소들이 개인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 여기며 살아왔다.

 

 인생에서 부는 빼놓을 수는 있어도 명예나 명성 같이 눈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쫓아야만 진정한 사내라고 여기며 말이다.

 

 그가 여신과의 계약을 철회하려 애쓰는 이유도 그의 낭만적인 가치관과 관련이 있었다.

 

 돈이야 인생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니, 잃으면 벌면 된다.

 

 그러나 가족, 가문의 일원이 편안하지 않은 채로 지내는 것은 모두의 수치이자 죄였다.

 

 핏줄에 따라 내려져온 의무와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법이니, 모두들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듯, 호랑이는 고기를 먹어야만 했다.

 

 몽상가여,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잡으려 달리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자여.

 

 타 죽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을 향해 제 한 몸 날리는 나방과도 같은 운명이 자네와 함께 한다 해도 멈추지 않을련지.

 

 어찌 보면 세상사에 맞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보다는 허울에 좋은 일을 신경쓰는 사람이라고 핀잔어린 시선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이들도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그물망에 구멍이 났을 때, 걱정하며

 다시 그물망을 깁기 위해 애를 쓴다는 면은 다들 인정하리라.

 

 별을 쫓는 자, 가이온과는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은 마드린느 테르피 였다.

 

 그랑드 마을에서 화재로 궁지에 몰리자 명예 따위를 챙기기보다는 얌전하게 쌓아왔던 이미지를 이용해 거짓 술수를 뿌렸다.

 

 일단 도망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그녀는 우연찮게 걸린 기회에 저택에 오게 되었다가, 지금은 돈도 잃고 목숨만 겨우 건진 채로 가이온과 동행하게 된 신세였다.

 

 돈은 집사가 가지고 있으니 가이온 티그리스를 돕는 대가로 집사에게 맡겨놓았던 돈 주머니와 일했던 급여를 받아낼 것이다.

 

 거기에 여신에게 제물이라며, 자기를 이용하고 속인 만큼의 배상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얼굴 반반한 도련님이야 계속해서 가문을 들먹이니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그 정도는 돈을 내어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남은 게 뭐가 있겠는가.

 

 안녕이다, 안녕.

 

 잘 있어요, 여러분.

 

 나는 갑니다.

 

 어디로?

 

 해안가로 내려가 항구에서 배를 타고 대륙으로 갈 겁니다.

 

 아니면 산맥을 넘어서라도 위쪽으로 올라갈 겁니다.

 

 대륙으로, 다른 곳으로.

 

 혹시 운이 좋으면 수도로 갈 수도 있겠지.

 

 더 이상 이 희한한 섬에서는 있지 않을 거야.

 

 계약만 끝나면 말이지.

 

 마드린느는 그녀 자신을 나름 ‘현실주의자’ 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렇게 엘프, 그것도 혼혈 엘프인 ‘리브’ 라는 소년을 만나게 될 지는 몰랐지만 지금 이대로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느껴졌다.

 

 마드린느의 양 옆에 앉아있는 두 남자는 다른 색을 내었지만 모두 미남자였고, 불은 따뜻했다.

 

 밤하늘에는 북두칠성 자리가 빛나고 있었다.

 

 여행하는 이들을 수호하며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는 큰곰자리의 꼬리.

 

 마드린느는 가이온을 몰래 겉눈질로 바라보았다.

 

 그가 눈치채지 않게, 아무도 모르길 바라면서 그의 높은 이마에서부터 날카롭게 턱까지 흘러내리는 선을 손바닥에 그렸다.

 

 그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북두칠성보다 마음에 더 들었다.

 

 마음이 콩닥거렸다.

 

 그 눈빛을 계속 기억해두고 싶었다.

 

 지칠 때 지금의 기억을 한 조각, 한 조각씩 꺼내 본다면 아마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이온도 지금이 마음에 들었다.

 

 마냥 힘든 일만 계속 될 줄 알았는데 밤하늘과 함께 맞이하는 잠자리는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마드린느가 편해 보였다.

 

 다행이었다.

 

 계속 불편해 한다면, 자기도 계속 죄책감을 느낄 터였다.

 

 평화롭게 고아원을 운영할 줄로만 알았던 리브의 짧은 생에도 자신 못지 않은 굴곡과 소외감, 외로움이 있다는 사실도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하빈 학원에 있을 때에는 무조건 괜찮으면서 다 잘 되는 척 밝고 유능한 인격만을 꺼낼 수 있었다.

 

 약점이나 감정을 내보인 다는 것은 약한 짐승이라는 뜻이기에, 질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다들 자신의 고민이나 아팠던 시간을 드러내도 아무도 무시 하지 않는다.

 

 비웃지도 않는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시간이었다.

 

 가이온은 사랑 받는 어미 품으로 돌아온 강아지가 된 것 같았다.

 

 

 고요한 밤이 계속 되었다.

 

 더 이상 말은 오가지 않았다.

 

 다들 잠을 청했다.

 

 간만에 셋 모두 꿈 한번 꾸지 않고서 쭉 이어지는 단잠을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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