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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중의 스마트폰으로 뉴스특보를 보고 있는 박형사와 상중. 선방TV는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죽었는데도 단독보도에 혈안이 되어 경찰에서 공개하지도 않은 사건자료는 물론, 수사 중 형사가 쓰러졌다는 이야기, 구토를 했다는 이야기, 편의점에서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는 이야기까지 새벽에 벌어진 그들의 모든 행적을 낯낯이 까발렸다. 상중과 박형사는 이를 모두 지시한 조준 부회장에게 치를 떨었다. 어쩌면 그들은 곧 닥칠 사자후에 떨고 있는 게 더 맞았다.
“미친 새끼!”
“이제 우린 죽었어요, 선배.”
그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복도 저 끝에서부터 열 받은 곽과장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박형사는 눈치 빠르게 책상 구석에 밀어뒀던 사건현장 사진 출력물을 챙겨 상중을 데리고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붙여.”
“네?”
“붙이라고. 죽기 싫으면.”
박형사가 문 쪽으로 눈치를 주며 말을 하자 상중은 그제야 눈치를 채고 사진을 챙겨 화이트 보드에 붙이기 시작했다. 박형사는 그 사이 보드 위에 사건 내용 요약과 사진 관련 내용을 보드에 열심히 기록해 나가며 열일의 흔적을 조작해 나갔다. 역시나 문이 열리고 화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곽과장이 거친 숨을 내쉬며 상중과 박형사에게 걸어왔다. 그들의 손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곽과장에게 향해 있었다.
“개새끼! 이래서 족보를 따지는 거야, 족보를!”
“족보요?”
곽과장이 분을 못 참고 소리를 지르는 동안, 알 수 없는 족보 타령에 상중이 박형사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박형사는 그걸 왜 모르냐는 듯 그를 보다가 상중이 재일교포였다는 걸 기억하고,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선방일보의 과거사를 이야기해주었다.
“친일이야.”
“친일이 왜요?”
“친일이면서 극우성향이 강하니까 뭐라고 하는 거지.”
“극단적 우익파는 일본사람들도 안 좋아해요. 그리고 일본을 친하게 느낀다고 다 극우인가? 그건 편견이에요.”
“야, 이게 편견이냐? 하는 짓을 봐라. 지 아비 팔아서 유명세를 더 얻으려는 꼴을. 나라 팔아 먹은 놈이랑 뭐가 다르냐?!”
상중의 말에 박형사가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치자, 상중이 당황해 눈으로 곽과장 쪽을 보며 눈치를 줬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박형사가 곽과장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곽과장은 자신이 화낸 것은 잊고 박형사의 고함에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박형사는 놀라 바로 허리를 숙여 죄송합니다 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곽과장은 이전과 다르게 더 이상의 호통도 치지 않고 자리에 앉아 기면을 찾았다. 기면은 눈치도 없이 그때 기지개를 펴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박형사는 재빨리 곽과장의 눈치를 살피고는 상중을 끌고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걸으며 밖으로 향했다.
“미친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라고 말했지만, 기면은 곽과장의 반응은 신경도 안 쓰며 자리에 앉아 엎드렸다.
“네가 그러고 사건을 총괄하는 팀장이야?! 꼴통들 머리 위에 올려놨다고 너도 꼴통 짓이야?!!!”
“과장님이 맡기지 않았습니까.”
기면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곽과장을 보며 대답했다. 그런 기면의 행동에 곽과장은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더 화낸다고 들어먹을 기면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화를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지만 분노에 몰려오는 두통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박형사, 약 있냐?”
“항상 상비되어 있습니다!”
거의 문 가까이 다다른 박형사였지만, 곽과장의 부름에 재빨리 달려와 책상 가장 안쪽에 있던 두통약을 꺼내 곽과장에게 건넸다. 상중은 언제 또 왔는지 이미 종이컵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왔다.
“과장님 여기 물이요!”
상중이 칭찬을 받기 위해 선한 일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곽과장에게 힘차게 물잔을 건넸다. 하지만 과도한 선함으로 오히려 잔 안에 물이 튀어 곽과장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중과 박형사는 사무실 밖으로 튀어 나가고 곽과장은 그들을 향해 고함을 쳤다. 그 어수선한 틈을 비집고 한 여인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매우 세련되고 정갈한 모습의 오피스 우먼은 누가 봐도 조준이 보낸 조훈의 비서였다.
“일찍 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기면은 여인이 그들을 찾기도 전에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여자는 당황한 기색 없이 기면에게 목례하고는 회의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차라도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인은 자리에 앉아 들고 온 서류 가방에서 서류철과 함께 작은 명함케이스를 꺼내 곽과장과 기면에게 명함을 건넸다.
“선방기업 비서실장이며, 조훈 회장님의 전담비서였던 유영희입니다.”
곽과장과 기면도 미리 준비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조훈 사장님 사건 수사를 맡은 곽도원 수사과 과장입니다.”
“김기면 특별수사전담팀 팀장입니다. 수사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조훈회장님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싶다고 하셔서 사건 이전부터 이후에 잡힌 스케줄 총 1년치를 준비해 왔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더 정리해서 전해드릴 수 있습니다.”
괜히 대기업 비서실장이 아니었다. 보통은 이런 경우 스케줄 확인을 요청하면 사건 당일과 전일, 이후의 일정만 공유하려 하지 이렇게 철저히 많은 분량을 준비해 오진 않는다. 수사에 있어서 많은 정보가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많이 전달해야 귀찮게 하는 횟수가 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1년치로 충분히 많습니다. 역시 선방기업은 다릅니다.”
곽과장이 입에 발린 말을 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선방기업은 선방일보를 기점으로 언론사업은 물론 호텔사업과 기타 여러 사업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기업입니다. 당연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저희 어르신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검찰이나 경찰에 출두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케줄 관련한 자료는 항상 기본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업무에 지장은 없으십니까?”
기면은 혹시 모를 인터뷰가 길어질까 봐 먼저 양해를 구했다. 비서도 이미 마음에 준비를 하고 온 듯 충분하다고 답했다.
"오늘은 간단한 사건 전후 스케줄에 대해서만 여쭙고 주신 파일 확인 후 나중에 연락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당일 바로는 어려울 수 있으나 사전에 연락주신다면 가능할 거 같습니다."
비서의 답변은 모든 VIP라인에서 들을 수 있는 답변이었지만, 그 한마디만으로도 앞으로의 수사가 다른 사건처럼 풀기 어려울 거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아니 짐작보다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확실하게 통보받은 쪽이었다. 기면과 곽과장은 서로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답변을 들을 수 없다는 걸 감각적으로 깨달았다.
곽과장은 회의실 밖에 서 있는 박형사에게 손을 뻗어 들오라고 했다. 그리고 말없이 그에게 1년치 스케줄표를 건넸다. 박형사는 스케줄표를 받아 절반을 나누어 상중과 함께 스케줄표를 검토했다.
“부회장님 스케줄부터 물어보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비밀리에 만난 사람이 누굽니까?”
기면은 부회장이 감추고 있는 부분부터 물었다.
비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준비한 대답을 이어나갔다.
"부회장님도 회사 직원입니다. 휴가 중에 벌어지는 일이나 만남은 저희 비서진도 모릅니다."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사건당일 현장에서 어떤 분과 웃으면서 통화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디로 통화하셨는지 아직 확인 안 했으나 저희가 따로 조사해도 되겠습니까?”
기면은 뒤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건 비서도 마찬가지인 거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자 곽과장이 말을 돌렸다.
“휴가는 당연히 일이 아니라 모르는 게 당연하십니다. 근데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목격자가 용의자 1순위라는 거 아시죠?”
곽과장이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했지만 그 또한 비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비서는 이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한 후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 사건이 생기지 않았다면 부회장님 사건이 언론사 메인기사가 됐을 겁니다.”
“애첩입니까?”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한 4년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만나셨는데 그분 때문에 안 피우시던 파이프담배도 피우시고, 약 2년 전에 한국으로 데려와 따로 거처를 마련하려고도 하셨습니다. 물론 받지 않으셔서 두 분의 밀회소가 되었습니다.”
“사건 당일에도 그분을 만난 겁니까?”
“네. 본래 계획이셨습니다. 제가 모셔다드렸고 자택에 모셔다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선방일보가 나서서 특보를 내보낸 이유를 알만했다. 자신의 사생활을 가리기 위해서는 더 큰 사건이 필요했을 텐데 마침 조회장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져 좋았을지 모른다. 박형사가 말한 환한 미소는 그 때문이었으리라고 곽과장은 확신했다.
“혹시 회장님도 애첩과 만나는 비밀장소가 있습니까?”
기면은 선방일보 사모 자살사건때 그에게 애첩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하였으나, 밀회소를 확인한 바 없어 그에 대해 물었다. 비서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을 이었다.
“회장님은 그분들을 자택에서 만났습니다. 여성분들이 오고 가는 걸 도운 건 접니다. 그날은 제게 데려다 달라 말씀하신 부분이 없었고, 제가 여쭈어봤을 때 사건 당일에는 집에서 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애첩들을 안 만난게 사실입니다.”
“네. 혹시 몰라서 제가 연락드려 확인했고, 알리바이는 확실했습니다.”
철저한 여자였다. 용의선상에 그 조회장의 애첩이 오르면 그의 사생활이 기사화 되고,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모의 사건이 다시 기사화되면 회사에 큰 타격이 갈 거라는 걸 알고 직접 확인을 했던 모양이었다. 가장 급한 건 오히려 선방일보니 그녀의 말은 믿을 만 했다.
그때 박형사가 아까 가지고 나간 스케줄표 중 몇 장을 가지고 들어와 형광펜 된 부분을 곽과장에게 보여주고 귓속말로 무언가 얘기 후 밖으로 향했다. 비서는 그 모습을 보며 표정을 정비했다.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 그녀의 표정은 비즈니스 미소로 장착이 됐다. 곽과장도 그녀의 상태를 파악하고 긴말하지 않고 서류를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설명해 주시죠. 이런 주기적인 개인 일정은 무엇입니까?”
“저도 회장님의 일정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만나는 장소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아까 말씀 하신거로는 애첩과의 관계와 그들과의 만남도 실장님이 다 관여하시는 건데 이 일정을 비밀로 하셨다는 걸 믿으란 말씀이십니까?”
곽과장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매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비서는 준비된 상황이라 흔들리지 않았다.
“전부를 모른다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정확하게 답변드릴 수 있는 게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를 이어 이용하시는 개인적인 일정이고 약속이시며 그 부분은 대를 이어 대표회장만 알고 있기 때문에 부회장님도 저희 비서진도 그곳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래도 대략적으로 비슷한 위치에 내려달라고 했겠지요. 과거 언론을 통해 조회장님의 다리가 문제가 있다 들었습니다. 집에서도 실내외용 지팡이를 확인했고요. 그렇다면 최대한 인근에 내려달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택시를 이용한다면 오히려 소문이 빨리 퍼질테니 가장 비밀을 많이 알고 비밀 보장이 확실한 사람에게 그 장소 인근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을 겁니다. 그게 가장 안전한 보완 방법 아닙니까?”
곽과장의 말에 비서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이 그녀가 당황했다는 걸 말해줬다. 곽과장은 더 밀어붙였다.
“어딥니까? 거기가?”
비서는 약간의 시간동안 말없이 눈만 깜빡이다 머릿속이 정리된 듯 입을 열었다.
“복수동입니다. 거기까지 밖에 알지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곽과장은 아까와는 다르게 처음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는 비서를 회의실 밖으로 안내했다.비서도 끝까지 비즈니스 예절을 철저히 지키며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달라는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회의실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형사가 나갈 채비를 하며 곽과장에게 물었다.
“갈까요, 복수동?”
곽과장의 끄덕임에 기면과 상중, 박형사가 곧바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