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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날 - 그녀 >
짹짹.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가 잠에서 깨 눈을 뜬다. 집에 그녀 혼자인지 새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다리 쪽으로 걷어내고 힘겹게 상체를 세운다. 그런 뒤, 불편한 다리를 제외한 나머지 움직일 수 있는 부위들을 최대한 활용해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양손에 깍지를 끼우고 여러 방향으로 기지개를 켜거나, 손으로 머리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당기거나 하면서 할 수 있을 만큼 몸을 풀어준다.
잠깐의 스트레칭을 마치고 옆을 보면, 서랍장 위로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와 아직 옅게 김이 나는 커피잔이 쟁반에 놓여 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아침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어 양 허벅지에 걸쳐 놓는다. 편안한 마음으로 남편이 출근 전 남겨뒀을 거라 생각되는 식사를 유쾌하게 음미한다.
‘병우씨가 오늘도 혼자서 출근했나 보네.’
병우, 그녀의 남편 이름이다. 그녀에게 남편 정병우는 너무도 고마운 존재였다. 그는 결혼 이후 내내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줬다. 또한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화를 낸 적이 없을 만큼 착한 남편이었다.
착하기만 한가? 사회적으로나 실생활에서나 남편으로서의 능력 또한 여러모로 출중했다. 능력 좋은데 착하기까지 한 배우자라면, 그만큼 좋은 남편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기에 그녀는 그와 결혼을 한 게 자기 생애 최고의 행운일 거라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그만큼 좋은 남편은 없다고 확신했고, 자기가 다른 건 몰라도 남편복은 최고라고 자부했다.
특히 그는 사고 이후 본인 몸이 불편함에도, 물론 그녀의 상태가 더 나쁘지만, 불평 하나 없이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돌봐 왔다.
‘그래도 속으론 가끔 화가 날 때도 있었을 거야. 병우씨도 인간인데.’
아무튼 그녀의 생각들이 그렇다는 거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는 그녀뿐 아니라 병헌의 아내, 그녀에겐 동서인, ‘정민’도 이 집에서 데리고 보살펴줬다.
‘아니, 그건 정민씨가 나와 병우씨 둘을 돌봐줬다는 게 더 맞지 않나? 하긴 정민씨가 사고를 당하지 않은 유일한 가족이고 몸이 정상이었으니, 이 집에 있을 때 몸 쓸 일은 그녀가 앞장서 했지. 다음으로 내 그이가 많이 했고. 그래도 그이가 동서를 자주 챙겨는 줬어.’
어쨌든 남편이나 동서나 모두 그녀에겐 고마운 존재다.
‘글고 어제 병우씨가 얘기했던 것처럼 동서가 정신적으론 힘들긴 했을 거야. 처음엔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많아지고, 히스테리도 부렸던 것 같아. 그때마다 병우씨가 그녀를 달랬었지. 어떨 때는 이층으로 데려가 진정시키기도 했어.’
식사를 일찍 마친 그녀가 쟁반을 치우고, 베개를 침대 등받침대에 붙여 세우고는 상체를 편히 기댄다. 그러곤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골똘한 눈으로 상념에 빠진다.
그 사고. 그날 차사고가 모든 원인이었다. 사실 그날 그녀와 그녀 가족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상대 택시가 교차로에서 한밤중에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해 그들이 탄 차 우측에 충돌해 차량을 박살냈으니까. 상대 기사는 운 좋게 경미한 부상만 입었지만, 그녀와 가족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거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녀는 두 다리를 다쳤고 그는 한 팔을 다쳤으며, 마지막으로 그의 형제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당시의 기억은 끔찍했다.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래서일까? 요즘은 그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 내가 분명 뒷좌석에 있었고, 병우씨가 운전석이고 병헌씨가 조수석이었던가? 아냐. 병우씨가 조수석이었고, 병헌씨가 운전석이었어. 왜 이런 게 헷갈리지? 아무래도 떠올리기 싫어선가?’
그녀가 고민을 접고는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옮기려 든다. 다리를 천천히 이동시켜 침대에 걸터앉더니 양손을 각각 서랍장과 침대 위에 지지대처럼 받히고는 조금씩 일어난다. 그러면서 바로 옆에 놓인 휠체어에 자신의 몸을 옮기려 든다.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마침내 그 위에 올라타는데 성공한다.
사고 직후 그녀가 두 다리에 깁스를 한 상태에서 몸을 움직인다는 건 여간 힘겹고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와 정민이 그녀를 보살폈고, 그들이 직장에 나가 없을 땐 도우미 아주머니가 집안일을 하면서 그녈 돌봤다. 시간이 차츰 지나 그녀의 처지는 점차 나아졌다. 휠체어를 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됐고, 필요시엔 목발을 짚고 잠시 일어서거나 몇 걸음 정도 걷는 것도 가능해졌다. 조금 시간이 소모되어도 혼자 침대에 오르내리고, 화장실에서 홀로 용변을 본다던가 하는 간단한 일들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게 됐다.
그러기에 아주머니가 집안에 초상이 있어 삼일간 별장에 안 나와도 되겠냐 했을 때, 흔쾌히 허락했던 것이다. 단, 그녀가 직접 아주머니와 얘길 한 게 아니라 그이가 중간에서 그녀에게 알려주고 허락 의사를 전달하고 한 것이지만.
여하튼 오늘이 이틀째이고, 지금의 그녀는 서랍장 위의 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전동식 휠체어를 탄 채 방을 나와 거실로 향하고 있다.
‘어제도 잘 있었으니 오늘도 괜찮을 거야.’
사실 그녀에게 당장의 고민거리는 오늘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까가 아닌 어떻게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까였다. 몸이 편치 않은 것 못지않게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건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일을 나가지도 않고 별장에 짱박혀 있으니 넘쳐흐르는 시간을 어떻게든 소비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TV 드라마 감상은 시간 죽이기에 딱이었다. 한 화에 한 시간 분량이니 몇 화만 보면 몇 시간은 뚝딱이다. 더욱이 몰입력 있고 흥미진진한 내용이라면 수 시간은 쉬지 않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집엔 IPTV가 설치돼 있어 몇십 부작 하는 드라마를 원하는 만큼 나눠보기가 용이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TV에 두 눈알을 끝없이 고정시킬 수는 없는 노릇. TV에만 처박혀 있지 않고,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 유지하는 요소도 필요했다.
여기에는 ‘민준이’가 적절했다. 민준이란 그이가 여기 지내기 적적할 거라며 데려온 개였다. 잘생기고 덩치가 크며 무엇보다 영리했다. 이름은 예전에 즐겨 봤던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아주머니마저 없는 낮 시간 동안 쓸쓸함을 달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존재다.
‘뜰에서 민준이하고 놀아볼까?’
그렇더라도 휠체어 신세인 그녀가 밖에 나가 민준이와 할 수 있는 게 많진 않았다. 상당 부분은 그녀가 민준이의 재롱을 그저 지켜보는 식이었다. 민준이는 마음껏 움직일 수 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으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민준이가 부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개를 다 부러워하네.’
하기야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한 것도 아니다.
이제 그녀는 선명한 햇빛이 드리운 거실 안에서 휠체어로 크게 원을 그리며 여전히 오늘은 뭘 할까 고민 중이다.
‘한번 이층에 올라가 볼까?’
휠체어를 멈춰 세우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며 고민한다.
이층. 이층은 이 별장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사고가 있기 전엔 저 계단을 마음껏 오르내렸는데.’
사고 이후론 계단을 탈 수가 없으니 갑갑할 따름이었다. 그이와 동서 그리고 아주머니 모두 이층을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데도, 오직 자신만이 사고 이후 단 한 번도 이층을 오르기는커녕 어떤지조차 구경도 못 했다. 지금의 그녀로선 ‘이층’은 미지의 영역이라 일컬어도 무방할 것이다.
‘가능할 것도 같은데.’
일주일 전쯤이었다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상태가 많이 호전된 지금이라면 불가능은 아닐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난간을 붙들고 한발씩 간다면? 그건 너무 힘드나? 그래도 기어서 간다면 해 볼 만할 거 같은데? 근데 그러면 영화 링에 나오는 사다코 같겠네. 너무 우스운 꼴일 거 같아.’
휠체어를 끌고 계단 앞까지 다가가는 그녀.
‘그런데 내려오는 건 어쩌지? 어찌 올라가더라도 아래로 내려오는 건? 가능이나 할까? 거기다 올라가는 것보다 더 위험할 걸.’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포기한 듯 휠체어를 돌려 세운다.
‘이층이야 그대로겠지. 근래에 병우씨가 자주 올라가는 거 같기는 한데, 작업실이 거기 있어서니까. 어차피 못 올라갈 거, 쓸데없는 상상은 집어치우고 스웨터나 마저 짜자.’
이제 휠체어를 소파를 향해 이동시킨다. 보면 소파 한구석에 그 자색 스웨터가 놓여 있다.
‘어제 스웨터가 맞질 않았지. 사고 후에 병우씨 몸 사이즈를 체크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거의 다 만들었으니 완성은 해야지.’
♪~~♪~~♪~~. 난데없이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폰을 꺼내 발신번호를 확인한다. 지역번호를 포함한 숫자들이 떠있다.
‘모르는 번혼데? 아마도 광고 전화겠지.’
평상시라면 그런 전화는 일절 끊어버리겠지만, 마땅히 할 게 없는 현재 처지에선 그런 전화라도 외로움을 달래줄지 모른다. 이런 생각에 최근 그녀는 나름 인내를 가지고 그런 전화들을 가끔씩 경청해주기도 했다. 물론 오로지 듣기만 했다.
‘일단은 받아나 볼까?’
이윽고 결정을 내린 그녀가 통화 표시를 스윽 터치한다.
“이연미씨 맞죠?”
어떤 남자의 ‘낭랑하면서 절도가 있는’ 목소리가 너머에서 들려온다. 정체를 모르는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알고 대뜸 묻고 있다.
“네에. 누구실까요?”
“박은수 원장님 아시죠?”
“네.”
그녀가 사고 이후에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겪었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한동안 다니고 진료 받았던 정신과 병원의 의사 이름이 바로 박은수다.
‘근데 이 남자는 누구지?’
너머의 남자가 다시 말하기 전, 그녀가 먼저 의문을 얘기한다.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박원장님은 어떻게 아시구요?”
“전 박원장님 밑에서 일하는 남자 간호사입니다. 이름은 김철수라 하고요.”
“김철수요?”
“혹시 제 이름 기억납니까? 김.철.수.”
남자가 끝에 김철수라는 단어를 일부러 한 음절씩 또박또박 발음한다.
‘김철수? 아는 이름인 거 같은데, 누구지? 아니면 너무 흔해 보이는 이름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죄송하지만 기억이 안 나네요.”
“그렇군요.”
그녀는 통화를 하면서 불현듯 이런 의혹이 생겼다.
‘근데 박원장님 병원에 남자 간호사가 있었나?’
의혹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새도 없이 남자가 또 말을 건다.
“박원장님이 이연미씨 상태가 어떤지 전화로 점검을 하라고 해서요.”
“그래요? 원장님이 직접 통화하지 않으시고요?”
“원장님이 바빠서요. 질문 몇 개만 할 겁니다.”
“그래요? 그럼 하세요.”
“괜찮다면 바로 질문을 하겠습니다. 문제 없죠?”
“네.”
그녀는 남자의 말투가 간호사답게 친절하지가 않고 오히려 다소 퉁명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허나 그냥 무시하고 묻는 대로 답하기로 한다.
“먼저 최근에 거기 지내면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거나 한 건 없습니까?”
“이상한 점이요?”
“일단 아무거라도 본인이 평소와 다르다고 느끼거나 혹은 그렇게 생각된 게 없나요?”
“아뇨. 없어요.”
‘오히려 질문이 좀 이상한 거 같은데.’
“갑자기 어떤 장면이나 영상이 떠오른 적은요?”
“전혀요”
“정말인가요?”
남자가 힘주어 되묻는다.
“네. 그런 적은 없어요.”
“이거 심각하군요.”
“네? 뭐가 심각하다는 거죠?”
남자가 잠시간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한다. 곧장 답을 않자 초조해지는 그녀.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
“여보세요. 지금……”
“정신 차리고 잘 들어요.”
그녀가 깜짝 놀랄 정도로 남자가 불쑥 말을 재개한다.
‘이 남자 뭐야?’
어쨌든 남자의 더욱 진지해진 톤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녀.
“저는 박원장의 간호사도 아니고, 김철수란 사람도 아닙니다.”
난데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아니, 그게……”
“우선 듣기만 해요. 사실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 전화를 건 겁니다. 당신은 지금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있어요.”
“네? 뭐가 위태……”
그녀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또 자른다.
“당신 남편은 어떤가요?”
“남편이요? 남편이 어떻다뇨?”
“일단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보시죠.”
그녀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얘기를 하는 남자의 말을 굳이 따라야 할까 망설인다.
“이연미씨?”
‘하긴 밑져야 본전이야. 미친놈이라도 전화로 얘기한다 해서 크게 해가 되진 않을 거야.’
이윽고 그녀가 입을 뗀다.
“좋아요. 내 남편은 정병우고, 지금 저와 이 별장서 같이 살고 있어요. 직업은 약사고, 지금은 출근 중이죠. 그와 결혼한 지는 삼 년 됐고, 친절하고 좋은 남편이에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을 정도로. 얼마 전 차 사고로 왼쪽 팔을 다쳤는데 여전히 저를 잘 챙겨주고 있어요. 같은 사고로 두 다리를 다친 저를요. 뭐, 이 정도면 됐나요?”
마무리는 힐난하는 듯한 어조로 한다. 개략적인 사항만 얘길 했지만 괜히 입을 놀린 게 아닌가 걱정이 몰려온다.
“그게 남편에 대해 기억나는 전분가요?”
“네”
그녀가 쌀쌀맞게 답한다.
“좋습니다. 그럼 병헌씨하고 정민씨 얘기도 해보겠어요. 기억나는 대로.”
‘이 남자, 병헌씨와 정민씨를 아네.’
그녀로선 더 이상 이 남자 말에 따라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다.
“저기, 정말로 누구시죠?”
“죄송하지만 지금은 그걸 밝힐 순 없습니다. 다만 당신을 도우려는 사람인 건 분명합니다. 실은 박원장이 저한테 도움을 청했어요. 자세한 건 차후에 설명할 테니까 당장은 제 말에 따르세요.”
그녀는 남자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지만, 박원장이 도움을 구했다는 말에 조금은 수긍이 되는 듯 했다.
“알았어요.”
“그럼 다시. 병헌씨하고 정민씨 둘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정병헌씨는 제 남편의 동생으로 저한텐 시동생이죠. 남편하곤 나이 일 년 차이로 연년생 형제구요. 직업은 중학교 교사였죠. 오정민씨는 병헌씨의 아내로 제겐 동서가 되죠. 직업은 은행원이구요. 병헌씨는 우리 부부가 당한 차사고 현장에서 사망했어요. 같이 타고 있었거든요. 정말 애석한 일이죠. 정민씨는 사고 이후에 이 별장서 저희들과 같이 살았는데, 일주일 전에 여길 나가 본래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어요. 여기 지내면서 심적으로 힘들어했던 거 같아요. 이 정도면 됐을까요?”
남자가 살짝 뜸을 들이고 답한다.
“네, 그렇군요. 그렇게 알고 있군요.”
“더 물어보실 게 있나요?”
“아닙니다. 이젠 됐어요.”
“그럼 더 하실 말씀은요?”
그녀는 이제 이런 불편하면서도 다소 불쾌한 통화를 그만두고 싶었다.
‘박원장님이 시켰다 하는데 남자의 말투가 뭔가 맘에 안 들어. 글고 진짜 박원장이 시킨 게 맞을까? 굳이 이런 걸 전화해서 묻게 할 리가?’
남자는 또 뜸을 들이면서 그녀의 애를 태운다. 고요히 기다리는데 싫증이 난 그녀가 폰을 귀에서 떼어내려는 찰나, 남자가 대뜸 무거운 어조로 말한다.
“이제 중대한 얘기를 하죠.”
“네? 중대한 얘기요?”
“네. 그러니까 잘 들으세요.”
‘도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란 거지? 물어본 질문들도 그렇고, 마땅한 게 있나?’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남자의 다음 말에 탁 막힌다.
“지금 당신은 속고 있어요.”
“뭐요!”
적잖이 당혹스러운 그녀. 남자는 차근차근 자기가 할 얘기를 이어간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숨기고 있다구요? 도대체 뭘요? 글고 그 사람은 또 누구고요?”
“숨기고 있는 거에 대해선 지금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우선 당신을 속이고 있는 그 사람이 누군지부터 먼저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구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진다.
“그 사람이 누구겠어요?”
도리어 여유롭게 반문하는 남자.
‘이 남자 뭐야? 나보고 생각하라고?’
그래도 남자의 말마따나 생각을 해본다.
‘나를 속인다? 여기 있는 나를. 그러면 여기서 나하고 같이 지내는 사람들 중 하나란 뜻인가? 그런데 현재 나하고 같이 있는 사람은 사실상……’
그렇다. 정민은 일주일 전에 떠났고, 아주머니는 이틀 전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설마 그 사람이? 아니야. 어쩌면 아주머니나 정민씨일 지도……’
그러나 그런 일말의 기대는 폰 너머의 남자가 바로 박살내 버린다.
“그 사람은 지금 현재 그리고 오늘 바로 당신과 함께 있었고, 이제 있을 사람입니다. 이젠 알겠죠?”
청천벽력 같은 말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그녀.
“정말요? 거짓말이죠? 그이가 날 속이고 있다고요?”
“연미씨 당신이 지금 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맞습니다. 분명히요.”
흐트러짐 없이 답하는 남자. 이내 그녀가 태도를 바꿔 하소연한다.
“그이는 누굴 속이거나 할 사람이 아니에요. 설사 속인다 해도 저를 속일 사람은 더욱 아니구요. 그래, 당신 누구야? 정체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당신 말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어. 당신이 누군지부터나 말해!”
읍소에서 윽박으로 돌변하는 그녀.
“진정하세요. 이 모든 게 당신을 위한 겁니다. 그리고 저는 맹세코 당신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맨 처음 간호사와 김철수 얘긴 제외하고요. 일단은 그 사람에게 집중하세요.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면, 그 사람이 숨기는 게 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모순을 찾아내세요. ‘모순’을 말입니다. 다음에 또 연락하죠. 제 정체는 그때 알게 될 겁니다.”
툭. 인사도 없이 통화를 끊었다.
‘뭐야, 이러고는 끝이야? 이 남자 진짜……’
그녀가 어금니를 꽉 물며 폰에 기록된 번호로 역(逆)으로 통화를 건다. 그러나 대기음도 없이 즉각 여성의 기계적인 안내 음성이 들려온다.
“고객님, 지금 거신 번호는 받는 전화로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다른 전화를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We are sorry. The number you have dialed is not aceepting call. Please check and try another number.”
‘이게 뭐야?’
난감해하며 끊는 그녀.
‘혹시 공중전화에서 걸은 건가?’
지역번호가 찍혔단 걸 고려하면 그랬을 개연성이 충분했다. 폰 번호는 아니니 남자 본인의 전화번호일 가능성은 낮았다.
‘아차. 애당초 병원 번호도 아니었어.’
자주 다녔던 병원이라 번호가 이미 저장이 돼 있었다. 그러니 먼저 신경을 썼다면 남자가 병원 간호사가 아니란 걸 당장에 간파할 수 있었으리라. 나중에 남자가 스스로 아니란 걸 밝히긴 했지만.
‘내가 처음부터 정신이 없었네. 원체 갑작스런 통화긴 했지만.’
만약에 남자를 추궁하려면 그가 다시 걸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폰을 손에서 못 놓고 있는 그녀. 혹시나 하고 다시 걸어보지만 똑같은 안내 멘트가 흘러나올 뿐. 부질없는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