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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술사
작가 : HUNHUNHAN
작품등록일 : 201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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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숨기는 것 - 둘째 날, 그녀 (後)
작성일 : 16-10-01     조회 : 503     추천 : 0     분량 : 9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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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밖 풍경이 어스름해졌다. 저녁이 다가올 시간이다.

 

 휠체어에 탄 그녀는 골든 리트리버 종인 개 ‘민준이’를 품에 안고 어루만지면서 커다란 창을 통해 잔디밭 뜰과 그 뒤편 우거진 수풀을 응시한다.

 

 낮에 벌어진 남자와의 통화는 그녀의 심경을 어수선하게 했다. 좋아하던 TV 드라마 감상도 제쳐 둔 채, 그녀는 남자가 남긴 메시지를 거듭 곱씹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내게 숨기는 게 있다. 그 사람은 내 남편이다. 그이가 숨기는 게 뭔지는 내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요약을 하면 대충 이 정도인 듯하네.’

 

 통화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던 그 남자의 말을 과연 신뢰해야 할까 몇 차례 고심했다. 혹여나 장난질은 아닐까도 생각했다.

 

 ‘장난일 가능성은 애초에 낮아. 신뢰는 안 가지만 목소리가 함부로 장난을 칠 사람은 절대 아니었어. 글고 조금이라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런 심각한 내용으로 장난을 칠 리가 없잖아.’

 

 그러면서 남자의 정체에 대해 추측을 해본다.

 

 ‘목소리가 내가 처음 듣는 사람이었고, 그 남자가 굳이 정체도 말 안 했으니 아마도 내가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일단 박은수 원장을 들먹이긴 했는데, 박원장이 주변에 따로 일을 맡길만한 사람이 있나?’

 

 곰곰이 머릿속으로 누구일까 짚어보는 그녀.

 

 ‘아, 맞아! 혹시 박원장이 아는 딴 의사! 다른 의사한테 부탁을 했다면 말이 돼. 근데 그 남자가 의사?’

 

 우선 의사라기엔 말투가 건방졌다.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의사라면 정신과 의사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쪽 계통의 의사들은 환자를 상담하는 것이 기본 업무라 말을 그따위로 냉소적으로 할 리가 없다.

 

 ‘에이. 말투로 봤을 때 의사일 수가 없잖아. 거기다 진짜 의사면 환자한테 느닷없이 니 남편이 널 속이고 있다 그런 얘긴 안 하겠지.’

 

 현 상태에서 남자의 정체는 현재 가진 정보만으론 도통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남자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어떻게 되먹은 인간인지는, 그가 언급한 대로, 그녀에게 또 연락을 주기 전까진 알 길이 없는 셈이다.

 

 ‘그럼 남자의 정체는 됐고. 어차피 정말로 중요하고 핵심적인 건 그가 남긴 말이야. 내 남편이 나를 속이고 있다.’

 

 그 말이 참이냐 허위(虛僞)냐? 그것이야말로 당장 막중한 문제였다.

 

 ‘병우씨가 진짜로 날 속이고 있다?’

 

 너무도 믿기 힘든 내용이다. 남편 병우씨는 사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언제나 수호천사 같은 존재였다. 여타 남편들과 달리 결혼 전보다도 이후에, 그리고 사고 후에는 더욱더 자신을 극진히 보살펴 준 따뜻한 그이였다.

 

 ‘그런 그이가 날 속인다고? 말도 안 돼?’

 

 이런 마음속이었기에 그이를 의심하게 하는 남자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 좋아. 어쩌면 병우씨도 인간이니깐 한두 번쯤은 사소한 일로 날 속였을 수도 있을 거야. 단, 악의 없이.’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남자가 언급한 속였다는 게 어쩌면 별 볼 일이 없거나, 실은 나쁘지 않은 그런 종류의 가벼운 일이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잠시나마 품는다.

 

 ‘근데 그러면 그 인간이 나한테 요란하게 전화를 할 필요가 없지.’

 

 갑갑한 그녀는 충분한 설명은 않고 분란만 심어주고 사라진 그가 이젠 미울 만큼 못마땅하다.

 

 ‘자세히 설명이라도 해 줄 것이지. 진짜 그 남자……’

 

 그녀가 화를 삼키며 입술 너머로 이를 간다. 바깥 경치가 그새 어둑한 초저녁으로 바뀌었다.

 

 ‘어라? 민준이가 조용하네.’

 

 고개를 숙여 민준이를 확인한다. 어느 틈에 민준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이 녀석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퍼 자고 있네. 나는 머리 아파 죽겠는데.’

 

 그래도 편안히 곤하게 잠들어 있는 민준이의 모습을 한동안 정겹게 감상한다. 이윽고 휠체어를 조작(操作)해 소파 곁으로 가서 그 위로 민준이를 조심히 사뿐하게 눕힌다.

 

 ‘이 녀석은 정말 평안하구나. 아무 걱정 없이. 또 녀석이 부러워지네.’

 

 다시 창 앞으로 가 휠체어에 홀로 앉은 채 하염없이 바깥만 바라본다. 하지만 몸이 별 움직임 없이 창 앞에만 있다 해도, 주름진 미간 옆 양 눈에는 고뇌와 근심이 여전히 가득하다는 게 전해진다.

 

 ‘그이가 좀 늦네.’

 

 보통 그는 저녁이 되기 직전마다 별장에 도착했다. 어제도 그랬고.

 

 ‘늦으니까 괜히 더 불안하네.’

 

 남자가 남긴 말도 골칫거리지만, 그가 도착하면 어찌해야 될지도 심각한 고민거리다.

 

 ‘오자마자 대놓고 물어볼까?’

 

 단순히 묻는다고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이가 숨기는 게 원래 없었다면, 전활 건 남자가 거짓말을 한 거라면 나나 그이나 곤란해져. 만약에 그럴 경우, 그 물음이 그에게 마음속 상처가 될지도 몰라. 반면에 그이가 숨기는 게 진짜로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이가 솔직하게 답해줄까? 오히려 나를 경계할지도 몰라. 근데 그이가 정말 그럴 사람일까?’

 

 긴 시간 동안 생각을 수없이 했음에도 여태껏 제대로 결론이 난 게 없다.

 

 “에이, 그 남자 땜에.”

 

 하도 답답한지 육성으로 몇 마디가 튀어 나온다. 그러고는 숨을 몇 번 길게 내쉬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가만, 가만. 그 남자가 내 스스로 알아낼 수 있다고는 했지.’

 

 물론 지금껏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숨겼다고 할 만한 점들이 막 떠오르지가 않았다. 딱히 수상하다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그녀에게 보이는 ‘그’는 몸이 불편한 아내를 모자람 없이 챙겨주는 자상한 남편이니까.

 

 ‘그래도 한 번 더 곰곰이 되짚어 보자.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겠어.’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 지금 여기서 같이 사는 그이가 또한 어떠한가를 머릿속으로 찬찬히 정리해본다.

 

 남편은 그녀보다 한 살 위고, 소개팅을 통해 만났다. 2년 정도 연애를 했고, 3년간 결혼생활을 했다. 약사라는 좋은 직업에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산 덕에 젊은 나이임에도 자산이 넉넉했다.

 

 참고로 부모님 두 분은 형제가 대학을 갓 졸업했을 즈음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이번 사고로 형제 중 한 명이 또 죽었으니 가진 건 많지만 운은 없고 불행한 가족이라 하겠다.

 

 여하튼 사고 이전까지 그와의 삶은 특별히 뭘 숨기거나 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이 죽은 건 그녀와 만나기 이삼 년 전 더 과거의 이야기였고, 어찌 됐건 풍족한 돈과 좋은 직업 등으로 그와 그녀는 함께 잘 살았으니까.

 

 ‘그러면 문제는 사고 이후일까?’

 

 일단 차사고가 큰 비극이긴 했다. 그녀 또한 직접 겪었으니까.

 

 ‘최근에는 몇 가지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당시 끔찍하긴 했어. 그때 얼마나 아팠는지.’

 

 그녀가 자신의 성치 않은 두 다리를 내려다본다.

 

 ‘그래도 젤로 큰 건 병헌씨가 죽은 거였겠지.’

 

 그날 그의 형제가 죽었다. 그녀와 그가 다치기도 했지만, 가족의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아픔이자 비극이었다.

 

 ‘나와 그이 그리고 정민씨 모두 많이 아파하고 슬퍼했지.’

 

 불현듯 장례식이 기억난다. 화장을 했는데, 관이 화장로에 들어가는 순간 모두가 울었다. 그녀와 그이, 정민씨 모두.

 

 ‘생각해보니 내가 젤로 크게 울었던 것 같아. 정민씨가 말릴 정도였으니. 나중에 병우씨는 내가 실신할까 봐 조마조마했다고까지 했어.’

 

 턱을 괴고 화장터에서의 기억을 짚어 본다.

 

 ‘응? 가만. 당시 내가 왜 가장 크게 울었지? 그것도 실신할지도 모를 정도로.’

 

 사실 그녀에게 병헌씨는 일반적인 시동생과는 좀 다른, 그냥 시동생이 아닌 그 이상으로 가까운 그런 존재였다. 우선 서로 간에 집도 꽤 가까웠고 여기 별장도 그다지 멀지 않았기에, 그들 가족은 시간이 나면 같이 어울리면서 서로 친구인 양 스스럼없이 지냈다. 거기다 서로 결혼 시기도 비슷했고 그녀와 그는 동갑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장례식에서 친밀히 지내던 시동생의 죽음을 너무 크게 슬퍼한다는 게 문제가 될 건 전혀 없다고 판단을 내린다.

 

 ‘오히려 이상한 건 정민씨였어. 정민씨가 자기 남편이 죽은 거 치고는 다소 담담한 편이었던 것 같아.’

 

 그녀가 한층 진지해지며 입은 꾹 다물고 코로만 날숨을 내뱉는다.

 

 ‘아냐. 내가 생각이 너무 지나쳤나? 그냥 성격차이일 수도 있지. 나는 예민한 편이고, 정민씨는 당돌한 타입이니까.’

 

 여러 생각에 지쳤는지 그녀가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어느덧 밖은 완전히 컴컴해졌다.

 

 이마에 손을 댄 채 눈을 감으며 머리를 식히는 그녀. 그런데 번뜩 눈이 뜨이더니 나직이 말 한마디를 뱉어낸다.

 

 “정민씨?”

 

 ‘그래! 정민씨야! 정민씨가 일주일 전에 여길 나갔잖아! 그게 이 별장에서 근래 있었던 가장 큰 변화였어!’

 

 손을 내리고 두 눈을 크게 뜨면서 온 신경을 머릿속에 집중한다.

 

 ‘글고 보니깐 정민씨가 나가고 나서 그이가 말하는 횟수가 줄었던 거 같아. 이층에 있는 시간도 더 늘어났고. 근데……’

 

 그녀가 이내 몸에 힘이 빠지더니 고개를 맥없이 떨군다. 방금 답을 찾은 듯했으나 몇 초도 안 돼 자신을 잃어버렸다.

 

 ‘따지고 보면 정민씨가 나간 일로 해서 그이가 스트레스를 받았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말수가 줄어들고 좀 더 혼자 있고 싶어서 이층에 더 자주 갔다. 그러면 충분히 말은 돼. 거기다 정민씨가 나간 일만으로 그이가 뭘 숨겼다는 게 증명되지는 않아.’

 

 힘이 드는지 몸을 축 늘어뜨리며 목덜미를 휠체어 등받이 윗부분에 기댄다. 머잖아 상체만 한정해 기지개를 켠다. 얕은 신음과 함께.

 

 ‘그래도 그이가 오면 한번 물어볼까? 정민씨 얘기를 한번 떠보는 식으로.’

 

 철컥. 탕. 뚜벅뚜벅.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가 어제처럼 서류가방을 든 채로 현관에서 거실로 소리 내어 걸어온다.

 

 ‘이제 왔네.’

 

 그녀는 속은 심란하지만, 일단은 그가 왔다는 점 때문이지, 반가워하며 휠체어 컨트롤러를 조작해 마중을 간다.

 

 그런데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입술은 꽉 깨물고 있고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 있다. 매서운 낯에 성큼성큼 앞만 보고 걷는 게 진짜로 아예 호랑이 같다.

 

 그녀는 여기서 처음으로 보는 그의 화난 얼굴에 난처해하지만, 어찌 됐든 가까이 접근해 인사를 건넨다.

 

 “여보?”

 

 그가 차갑게 무시한다. 눈길 한번 안 주고. 그는 애초 2층으로 가는 계단을 향해 오로지 직진만 하고 있었다. 망연히 있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계단을 쿵쿵 거칠게 오르다. 그리고는 말 한마디 없이 이층으로 사라진다.

 

 ‘오늘 그이가 왜 저러지? 여기선 한 번도 저런 적이 없었는데.’

 

 이층에 그가 혼자 갔고, 일층에 그녀 홀로 남겨졌다.

 

 

 ***

 

 

 그녀 혼자 주방 안에서 저녁을 들고 있다. 어제처럼 플라스틱통에 담긴 반찬들로만 끼니를 때우는데, 휠체어에 탄 여자가 단신(單身)으로 밥을 먹는다는 게 쓸쓸하고 처량하기 그지없다. 음식이 좀처럼 목 아래로 넘어가지 않는지 수저나 젓가락을 그저 들고만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컥컥. 갑자기 목구멍이 막히는지 급히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진정이 됐는지 깊은 한숨과 함께 잔을 내려놓는 그녀. 주르륵주르륵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낀다.

 

 사고 이후 그녀가 이 별장에 살면서 저녁만큼은 혼자 식사를 한 적이 없었다. 다리를 전혀 못 쓰는 그녀가 휠체어를 끌면서 홀로 식사준비를 하는 건 꽤나 불편하고 힘들기에, 저녁식사 때면 언제나 거의 대부분 그이가 함께하며 먹을 것을 챙겨줬다. 그이도 한 팔이 불편했음에도 다른 쪽은 괜찮다며 항상 그녀를 배려해줬다. 혹여 사정이 있어 그이가 없더라도, 일주일 전까진 정민씨도 이 집에 있었기에 어제까진 그녀가 혼자 저녁을 먹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시간이 걸렸지만 어찌어찌 반찬을 꺼내고 밥을 퍼서 상은 차렸다. 그게 번거롭고 힘들었다고 우는 건 결코 아니다. 주방에 그녀 혼자만 있고, 나아가 일층에 그녀 한 명만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서글프게 한 것이다.

 

 ‘혼자’라는 것, 그녀에게 그건 정말로 싫고 슬프며 그리고 무서운 것이었다.

 

 ‘오늘 일진이 너무 안 좋네. 왜? 왜 이렇게 된 거지? 왜!’

 

 이내 그녀가 눈물을 멈추고는 양 볼을 손으로 연신 닦으며 숨을 고른다.

 

 ‘계속 울고 있을 수만은 없어. 어쨌든 식사는 마쳐야지. 글고 이걸 또 내가 다 치워야하고.’

 

 좀처럼 힘이 안 나지만 어쨌든 식사를 재개한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옆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틈에 일층으로 내려온 그가 주방 입구에서 뻘쭘히 팔짱을 낀 채 그녈 보고 있다. 방금 전 무서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측은함이 눈과 표정에 가득하다. 그녀로선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도와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아까 전에도 미안했고.”

 

 부드러운 어조로 안쓰러움을 한껏 담아 말한다. 그녀는 뭐라 바로 답하지 못한다. 어느새 돌변한 그의 모습이 아직은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반찬들은 잘 꺼냈네. 다행이야.”

 

 그가 식탁 위에 놓여진 반찬통들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얘기한다. 그 말과 미소에 그녀의 마음이 살짝은 풀어진다.

 

 사실 방금 전 말에는 내포된 과거가 있다. 그제 저녁, 그녀가 괜히 몸소 상을 차려 보겠다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다 반찬통 대여섯 개를 엎어 버렸다. 휠체어 신세인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반찬들을 치울 순 없었고, 그 몫은 온전히 그의 것이 되고 알았다. 그날 어찌나 미안했는지 다음날인 어제 저녁까지 그녀는 미안하단 소리를 연신 외쳐댔다.

 

 여하튼 반찬통에 대한 속사정을 둘 다 아는 가운데, 그가 대견하다는 양 그녀를 정감 있게 계속 바라보자 그녀의 마음 속 응어리도 차츰 녹아내린다.

 

 ‘그래도 그이가 방금 화난 이유는 뭘까?’

 

 허나 그는 그녀가 알고 싶어 하는 걸 당장 얘기하진 않는다. 도리어 질문을 던진다.

 

 “혹시 울었어?”

 

 그녀는 헝클어진 머릿결을 가다듬으며 부끄러운 사실을 감추고자 거짓말을 한다.

 

 “아니에요. 반찬이 맵다 보니까.”

 

 “그래?”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주방을 나서려 한다.

 

 “식사는 안 해요?”

 

 “생각 없어. 먹고 나서 치우는 건 놔둬. 내가 할 테니까.”

 

 말을 끝맺음과 함께 거실로 터벅터벅 사라진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를 한참 응시하다 이내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젓가락을 집는다.

 

 

 ***

 

 

 식사를 다한 그녀가 그의 말대로 정리는 놔두고 거실로 나온다. 나와 보니 그가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다. 그녀가 휠체어를 운전하며 다가간다.

 

 가까워지니 그가 품에 예의 자색 스웨터를 들고 있는 게 보인다. 더 자세히 보면 글썽이는 눈으로 스웨터를 매만지며 들여다보고 있다.

 

 한창을 스웨터를 보다 옆에 그녀가 온 걸 알아채는 그. 으흠. 낮게 헛기침을 하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는다.

 

 “다 짰네요.”

 

 “어? 그러네.”

 

 그녀가 오늘 그 전화를 받은 이후 뒤숭숭한 가운데도 잠깐의 시간을 내 마무리를 했다. 조금만 짜면 됐기에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이즈가 안 맞아서 어쩌죠?”

 

 “어제도 말했지만 나중에 살이 찌면 그때 입으면 되지 뭐.”

 

 그리고는 뒷말을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린다.

 

 “아니면 그 사람한테 주던가.”

 

 “뭐라구요?”

 

 그녀가 묻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곧바로 부인한다.

 

 “아니야. 별말 아니었어.”

 

 어차피 그녀로선 아까 전 그이가 한 말은, 잘 듣지도 못했지만, 지금 당장 중요해 보이진 않았다. 이제는 진짜 해야 할 질문을 던져야 될 차례였다.

 

 “여보, 오늘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죠?”

 

 답변을 회피하지 말라는 듯이 힘을 주어 또렷하게 묻는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머뭇거린다. 그녀는 이번만큼은 포기하지 않겠단 각오로 계속 그를 빤히 지켜본다. 머잖아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털어놓는다.

 

 “정민씨를 만났어.”

 

 “정민씨를요?”

 

 “응, 그래.”

 

 하필이면 정민씨다. 그녀의 머리가 다시 혼란스러워진다.

 

 “저기, 그럼 혹시 그녀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다퉜어.”

 

 “다퉜다고요? 무슨 일로요?”

 

 그녀가 마치 추궁하듯 질문을 던진다. 그가 이번엔 몇 초 뜸을 들이고 답한다.

 

 “어제 당신이 말한 대로 여기 돌아와 살라고 얘기하다가.”

 

 “그러다 다퉜다는 거예요?”

 

 “응.”

 

 “그러면 그것 때문에 여기 왔을 때 잔뜩 화가 나 있었던 거예요?”

 

 “그래, 맞아.”

 

 그렇게 그는 어느새 자기 해명을 마친다.

 

 ‘석연치가 않은데. 평생 아내에게 화 한번 안 낸 사람이 제수씨와 싸웠다고 집에까지 잔뜩 흥분을 해서 들어올 수 있나?’

 

 아무튼 그녀로선 이때가 그에게 말을 걸고 무언가를 물어보기에 적절한 기회다. 잘만 한다면 그가 화난 이유가 진짜로 뭔지를, 나아가 전활 건 남자가 남긴 그 숨긴다는 것에 대한 단서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왕 이렇게 되 거 위로하는 척 하면서 한번 캐물어 보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지금 얘길 걸면 내가 유리해.’

 

 그러나 구상한대로 말을 꺼내기 직전, 그가 내뱉은 말이 전세를 바꾼다.

 

 “병헌이 기억나?”

 

 그가 옆에 스웨터를 다시 어루만지면서 말한다.

 

 “네? 병헌씨는 왜요?”

 

 보니 어느새 그의 눈이 또 촉촉해졌다.

 

 “오늘 정민씨 일 때문에 생각이 나서.”

 

 그녀는 오늘 참 그가 의아했다. 얼마 전엔 화가 한가득 나 있더니, 지금은 얼굴에 눈물을 머금고 있다. 그가 이처럼 감정이 요동치는 날이 있던가?

 

 ‘설마 아까 흥분했던 게 실은 동생이 떠올라서였나?’

 

 그가 고갤 돌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본다.

 

 “병헌이 얼굴은 기억나?”

 

 그가 자기 얼굴을 그녀 정면에 대고는,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얘길 한다. 심히 당혹스러울 정도로.

 

 ‘병헌씨 얼굴?’

 

 병헌씨 얼굴은 병우씨와 너무도 닮았었다. 형제였지만 외모가 흡사한 걸로 주위에 여러 차례 회자될 정도였다. 얼마나 비슷하면 둘이 같이 있을 때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굳이 차이가 있다 한다면, 한 명은 얼굴이 좀 더 둥글했고 다른 이는 약간 각이 졌다는 것.

 

 그나마 얼굴을 제외한 몸은 제법 차이가 있었다. 한 명은 살이 좀 찌고 체구도 살짝 큰데 반해, 다른 이는 상대적으로 마르고 살짝 왜소했다는 것. 추가로 그 다른 이가 정말 마르고 왜소하다 건 아니고 다른 형제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며, 오히려 일반 남자의 평균치에 해당한다는 것. 그리고 그 평균에 해당하는 이가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는 그이라는 것이었다.

 

 “기억하죠.”

 

 그녀가 짤막하게 답한다.

 

 “그래?”

 

 그가 더 짧게 말한다.

 

 사실 그녀는 기억하고는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죽은 그의 얼굴이 어렴풋하게만 생각났다. 그녀로선 죽은 사람 얼굴을 떠올리고 싶진 않으니까. 죽은 이의 얼굴은 그녀에게 괴로우니까.

 

 “혹시 ‘기억을 조작하는 사람들’이라고 들어봤어?”

 

 또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네? 기억을 조작하는 사람들이라뇨?”

 

 “정민씨한테 들은 얘긴데, 사람이 너무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 있을 때 일시적으로 그 아픈 기억을 바꿔 주는 사람들이래.”

 

 “아픈 기억을 바꿔준다고요?”

 

 “그래. 예를 들면 나 같은 경우엔 죽은 내 형제의 존재를 잠깐의 시간 동안 기억에서 지우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눈을 다시금 똑바로 바라본다.

 

 “그러면 형제가 죽었단 사실이 생각나지 않으니까 잠시라도 슬픔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지.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기억을 조작한다고?’

 

 그녀는 그이의 말처럼 아픈 기억을 평생은 아니더라도 당분간만이라도 조작할 수 있다면, 그의 의견대로 나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말마따나 그이가 형제의 존재를 잊게 한다고? 태어나면서부터 같이 살아오고 알고 지낸 혈육의 존재를? 기억을 조작한단 그 사람들이? 이건 허무맹랑한 소리야.’

 

 그러면서도 문득 그녀는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맞아. 일전에 누구한테서 들은 얘긴 거 같긴 한데? 근데 그게 누구이고 어디였지?’

 

 들은 적이 있었다는 느낌뿐 다른 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만 정리하러 갈께.”

 

 어느 틈에 그가 홀연히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간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뭔가 말을 걸어야겠다 생각한 순간, 그는 금세 주방 안으로 또 사라진다. 그녀에게 정민씨와의 다툼과 병헌의 얼굴, 나아가 기억을 조작한다는 산란스런 얘기들만 남긴 채. 이후 그녀는 오늘이 다 지나가기까지 그와 마땅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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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누군가의 거짓말 四 정명진 10/18 66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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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누군가의 거짓말 二 심대빈 10/14 619 0
11 누군가의 거짓말 一 임재용 10/12 460 0
10 그 사람이 숨기는 것 - 마지막 날, 亡人 (下) 10/10 559 0
9 그 사람이 숨기는 것 - 마지막 날, 亡人 (中) 10/7 571 0
8 그 사람이 숨기는 것 - 마지막 날, 亡人 (上) 10/4 570 0
7 그 사람이 숨기는 것 - 둘째 날, 그녀 (後) 10/1 504 0
6 그 사람이 숨기는 것 - 둘째 날, 그녀 (前) 9/28 447 0
5 그 사람이 숨기는 것 - 첫째 날, 그 (後) 9/25 431 0
4 그 사람이 숨기는 것 - 첫째 날, 그 (前) 9/22 463 0
3 당신의 ○○은 ○○됐습니다 (下) - 전말 9/19 476 0
2 당신의 ○○은 ○○됐습니다 (中) - 추리 9/16 470 0
1 당신의 ○○은 ○○됐습니다 (上) - 단서 9/13 107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