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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이 깜깜한 도로. 이차선 도로에 가로등 빛은 고사하고 가로등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안개도 짙게 깔려 당장 눈앞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 환경에서, 그런 도로를 검정색 차 한 대가 안개를 가르며 홀로 내달리고 있다.
차 안에는 남자 둘와 여자 하나가 타고 있다. 남자들은 앞좌석에, 여자 혼자는 뒷좌석에 앉아 있다.
뒷좌석에 있는 차 안 홍일점은 바로 이연미 그녀다. 다리에 깁스가 없는 멀쩡한 몸인 상태로, 뒷좌석에 통째로 비스듬히 기대 누워 여유롭게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좌석을 전부 차지한 채로 폰을 보면서 자꾸 희희낙락거린다. 온전한 두 다리를 꼬아 발을 자꾸 까딱대는 게 인상적이다.
앞좌석 조수석엔 그녀의 남편 정병우가 앉아 있다. 하릴없이 그저 앉아만 있는데, 그래도 이따금씩 룸미러로 뒤에 있는 그녀를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운전석에선 병헌이 정면만 바라보며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다.
갑자기 병우가 몸을 돌려 뒷좌석에 요염하게 누워 있는 아내를 폰으로 찰칵 사진촬영을 한다. 촬영 소리와 플래시에 그녀가 순간 놀란다. 그가 사진을 찍은 것임을 곧장 깨닫고는, 일어나 방긋 웃으면서 그를 향해 몸을 앞쪽으로 바짝 붙이는 그녀. 그 사이 그가 재빠르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녀의 한손에 들린 폰이 울린다. 그녀의 폰에 메시지가 왔다. 그녀가 메시지를 확인하니, 액정화면 상단에 ‘나의 그이’란 발신인이 떠있고 아까 찍은 사진이 메시지로 고스란히 전송됐다. 함께 온 문자는 ‘차 안의 섹시한 우리 마나님’이라 곁들어져 있다. 그녀와 병우가 서로를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는다.
근데 그 순간, 차 밖 우측에서 갑자기 새하얀 빛이 나타나더니 안을 강렬하게 비춘다.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울 정도다. 끼이익! 쾅!
그녀가 눈을 끔벅인다. 아무 일도 없다. 방금 전에 차사고가 난 듯한데 차 안이 말짱하다!
그런데 그녀의 몸자세가 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1분 정도 전과 동일한 자세로 뒷좌석에 폰을 든 채 누워 있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 간 듯하다.
그렇다고 다 똑같이 되돌아 간 게 아니다. 앞좌석은 또렷이 변했다. 이번엔 병우씨가 운전석에, 병헌씨가 조수석에 앉아 있다.
이해가 안 가는 상황과 돌변한 광경에 어리둥절한 그녀. 생각할 새도 없이 또 예의 그 불빛이 차 안을 덮친다. 단, 이번엔 우측이 아닌 좌측이다. 끼이익! 쾅!
그녀가 다시 눈을 끔벅인다. 이번에도 차가 그대로다. 역시 1분 전인 것처럼.
대신 그녀의 위치가 바뀌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위치는 뒷좌석이 아닌 앞좌석의 조수석이다.
급변하는 상황에 얼떨한 그녀. 옆을 보면 병헌이 운전 중이고, 뒤를 보면 병우가 아까 그녀처럼 뒷좌석에 누워 있다. 그것도 방금 전 그녀와 똑같은 자세로.
끼이익! 이번엔 빛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브레이크 소리가 난다. 그녀가 탄 차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의 상향등 빛이 앞에 가까이 보이는 회색 택시 측면을 비춘다. 쾅! 그들이 탄 차가 택시 우측을 박았다.
***
허억, 허억. 그녀가 꿈에서 깨어났다.
껌껌한 침실 침대에 그녀가 홀로 누워있다. 악몽의 충격 때문인지 호흡이 가쁘고, 식은땀이 얼굴에 한가득이다.
“꿈이었구나. 근데 무슨 꿈이 그 따위지.”
그녀로선 너무 재수 없는 꿈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당시 사고 상황을 내내 반복시켰으니.
숨이 진정되자 그녀가 머리맡에 둔 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5시경이다.
폰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다시 잠을 청하려 한다. 그러나 악몽의 여파로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몇 분간을 뜬 눈으로 가만히 있다가 점점 힘이 빠지면서 스르르 다시 잠이 든다.
어찌 됐든 지난날은 진즉에 흘러갔고, 어느덧 마지막 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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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날 - 亡人(망인) >
해가 중천에 떠 있다. 그녀가 이미 휠체어를 끌고 나와 거실 여기저기를 덧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번에도 그녀는 늦잠을 잤고, 그이는 언제나 그러했듯 아침식사를 고스란히 놔두고 집을 나섰다. 이후 그녀가 한참 지나서야 깨어나, 그이가 해놓은 음식을 먹고는 차분히 이 거실로 나온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이지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외양만 그럴 뿐, 속은 전혀 아니었다. 날씨는 상쾌했지만 그녀의 가슴속은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어제 일도 어수선한 마당에 간밤에 꾼 꿈마저도 흉흉하기 짝이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 그녀는 어제 꾼 악몽에 대해 생각 중이다.
‘확실히 꿈은 꿈이야.’
꿈은 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기억 또한 아니다. 꿈이란 기억과 평상시 생각, 나아가 상상이 서로 뒤죽박죽 섞여 나타나는 것이다. 즉, 그 꿈은 과거 사고의 기억에서 비롯됐지만 기억 고대로는 결코 아니라는 거다.
이에 대해 그녀는 머릿속으로 실제 당시와 달랐던 점들을 되짚었다.
‘그땐 안개가 끼지 않았어. 글고 도로도 이차선이 아닌 사차선이었고.’
당연히 반복되는 상황마다 달라졌던, 차 안 그들의 위치와 충돌 경위 또한 엉망이었다.
‘그래도 꿈 맨 처음이 당시와 거의 가까웠던 거 같아. 아마 내 기억으론 당시에 내가 뒷좌석, 그이가 조수석, 시동생이 운전석이었어. 거기다 그 회색 택시가 들이박은 위치도 우측이었고, 그 뒤부터선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됐지만.’
그녀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안에 저장된 사진 하나를 열어본다. 사고 직전 뒷좌석에 누워있던 그녀를 병우가 찍었던 사진이다.
꿈도 난장판이고 그녀의 기억도 다소 불분명했지만, 이 사진을 찍은 건 분명 그녀의 남편이었다.
‘꿈은 이제 됐어. 꿈이야 꿈일 뿐이지. 문제는 현실이야.’
어제 낮에 온 정체 모를 남자의 전화. 그녀에게 남긴, 함께 사는 그이가 그녀에게 숨기는 게 있다는 충격적인 메시지. 그리고 어제 저녁에 여러모로 돌발적이었던 그이의 태도. 어제에 겪은 현실이야말로 악몽을 능가하는 현실 속 진짜 악몽일 것이다.
어제 저녁식사 이후 그이와 병헌씨 얘길 나눈 뒤에도 그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일이 있다.’, ‘피곤하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계속 회피했다. 그 덕에 어제 밤부터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기회는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 남잔 도대체 언제 또 연락을 할까?’
그 뿐인가. 그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궁금한 것들도 산더미다.
‘그이에게 그냥 한번 전화 해볼까? 아냐. 소용없을 거야.’
그녀는 너무도 곧장 뜻을 접는다.
사실 생각해 보면, 전화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나누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자세하거나 구체적인 얘기는 전화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가 힘들다. 하필 현재 그녀에게 필요한 게 그런 종류의 얘기다.
거기다 사고 이후 그는 출근한 뒤에는 일 때문이라며 대부분의 시간 동안 폰을 꺼두었다. 그나마 점심시간 정도에 잠깐 켜두거나 그이가 직접 연락하는 식이었다.
‘사고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어쨌든 이런 이유들로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거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고 금세 결론 내렸다. 한편, 그녀는 어제일로 머리가 혼란스럽긴 하지만 오늘 무얼 할 것인가도 고민이었다.
‘스웨터도 어제 다 짰고. 민준이하고 놀아볼까? 아냐, 민준이가 노예도 아닌데 맨날 나하고 놀아주라고만 할 순 없지. 뭐 노예가 아니라 개지만.’
실은 그 이전에 놀 기분부터가 아니었다.
‘그냥 티비 드라마라도 볼까? 아니지, 지금 한가로이 드라마나 볼 때야!’
민준이건 드라마건 그녀는 무엇보다도 골치 아픈 그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고 싶다. 그렇다고 현재 이 상태에서 혼자 어떻게 해 볼 뾰족한 수가 있나?
‘몸이 이 꼴이니. 사실상 집에 갇힌 신세니.’
처지를 한탄하며 정처 없이 거실을 돌던 찰나, 때마침 계단 앞에 다다른다. 바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문득 어제 아침에 생각했던 게 다시 떠올랐다.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맞아, 어제도 가능하다고 봤었지. 대신 내려오는 게 문제였어. 근데 그것도 좀만 조심하면 어찌어찌될 듯한데.’
계단의 높이와 개수를 어림잡아 본다. 좀 부담될 만큼의 수준이긴 하다.
‘설사 된다고 해도 분명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하지만 지금부터 시도를 한다면 주어진 시간은 충분해.’
무엇보다 해야 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모든 해답이 저 위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갑자기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뛴다. 편치 않은 몸에 더 편치 않은 집안 분위기였지만, 뭔가 재밌는 모험을 앞두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제부터 심각한 상황임에도 난데없이 그런 느낌을 가진다는 게 왠지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깎아내린다거나 스스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처지는 처지고, 모험은 모험이야. 사고 이후, 일층 아니면 뜰 말고는 난 어딜 가본 적이 없어. 나 혼자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그저 그이, 정민씨, 아주머니 모두에게 보살핌을 받아왔을 뿐이야. 거기다가 따지고 보면 민준이도 날 보살핀 셈이고. 정말이지 나 혼자 뭘 제대로 해본 게 없어.’
다시 한 번 계단을 올려다본다. 높이나 개수나 달라진 건 없지만 마음을 먹으니 까짓 거 할 만해 보였다.
‘그래, 해보자. 탐험가처럼. 거기서 해답을 찾아보자. 걸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쥔다.
‘오늘은 내가 탐험가가 돼 보는 거야.’
***
‘탐험가는 개뿔.’
계단 한복판에서 그녀가 두 손으로 난간을 부둥켜 잡고 비스듬히 드러누운 채로 낑낑대고 있다. 마치 꼴이 가파른 설산에서 등산가가 밧줄 하나에 의지해 매달려 있는 듯하다.
‘얼마나 지났지? 아마 십분은 넘었을 거고. 이십분이 넘었나, 안 넘었나? 아이구야.’
그녀는 어차피 일어서서 계단을 오를 순 없으니 두 팔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손은 계단 난간을 잡고, 다른 한손은 계단 위를 힘주어 대거나 각진 부분을 꽉 잡는 식으로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문제는 한 칸씩 올라가는 시간이 꽤나 걸리는데다 그만큼 힘도 같이 들어간다는 거였다.
지금은 지쳐서 잠깐 쉬는 타임이었다. 혹여나 이때 괜히 밑으로 미끄러지지 않을까 양 손으로 난간을 꽉 쥔 채로 말이다.
‘탐험가는 무슨. 탐험가가 계단 한 층에 이십분 이상을 쩔쩔매나? 글고 내가 어제 사다코 같을 거라고 했던가? 사다코는 무슨. 내가 걔보다 더 우습고 더 느리네. 젠장.’
그녀는 십몇분 전에 자신이 뭣도 모르고 호기를 부린 걸 후회막심했다. 이제는 원래대로 일층으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절반 이상을 올라와서 다시 돌아가자니 그게 또 아까웠다. 더욱이 당장 내려가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좀만 더 올라가면 돼.’
다시 힘을 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간다. 고개를 들어 이층을 올려다본다. 아직 이층은커녕 계단만 보일 뿐이다.
‘근데 저 위에서 누가 튀어나오면 볼만 하겠는데.’
불쑥 저 위에서 누군가 나타나 그녈 내려다본다면, 상상만 해도 심장이 철렁 주저앉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정말 그러면 심장마비에 걸릴지도 모른다.
불현듯 영화 <엑소시스트>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악령에 쓰인 한 소녀가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인데, 그냥 내려가는 게 아니라 몸이 천장을 보고 두 팔과 두 다리는 네 발 동물처럼 해서 마치 거미와 같은 형상으로 한 칸 한 칸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거 볼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런데 걔는 금방 내려가기라도 했네. 자세는 불편해도. 근데 나는 자세도 불편하지, 시간은 안 가지. 제길.’
그러면서 겨우 한 계단 더 오른다. 그 뒤 몇 분이 더 지나서야 이층 바닥에 그녀의 한 손이 닿는다.
드디어 도착했다. 기진맥진한 그녀의 모습이 마치 힘겹게 산 정상에 도달한 산악인 같다.
‘이제야 왔네. 괜히 올랐어.’
목을 내밀고 눈앞에 보이는 이층 복도를 살핀다. 일자로 된 훤한 복도에는 그다지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복도야 바뀐 건 없네.’
더 움직여 드디어 두 다리까지 복도로 올리는데 성공한다. 근처 벽에 상체를 대고는 호흡을 고르며 잠깐 휴식을 취한다.
‘이렇게 개고생하지 말고 그이한테 전화를 해볼걸.’
이층에 올라보니 일층 때와는 생각이 달라진다. 바지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단축키를 눌러 ‘나의 그이’에게 전화를 건다.
“전원이 꺼져……”
‘역시 꺼져 있네.’
소용없는 폰을 집어넣은 뒤, 다음 계획을 생각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당연히 방은 들어가 봐야겠지.’
일단 가까이에 양 옆으로 두 개의 방문이 있고, 그 너머 몇 걸음 뒤에도 역시 두 방문이 각각 이어져 있다.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고 판단하자 다시금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계단을 기어오르는 게 아니라 복도를 기어가기만 하면 된다. 처음엔 두 손바닥을 바닥에 대고 팔목은 세운 채로, 몹시 부자연스럽게 끙끙 대며 움직인다.
‘이거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물갠데.’
그러다 이내 몸을 더 낮추더니, 팔목을 바닥에 대고 움직이는 게 더 수월하다는 걸 깨닫고 자연스레 자세를 고쳐 잡는다.
‘아, 이게 포복이구나. 군대 갈 일도 없는 내가 이걸 다하네.’
역시 시간은 걸렸지만 첫 번째 방문 앞 지점에 도달한다. 앞서 설명한대로 양 옆으로 각각 방문이 나있다.
그녀가 오른쪽 문에 손을 뻗는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린다. 꿈적하지 않는다. 문이 잠겨 있다.
‘병우씨 방이 잠겨 있네.’
병우네 가족과 병헌네 가족은 시간과 여건이 될 때마다 이곳 별장을 사용했기에, 임시적으로 각자가 쓸 방을 정해 뒀었다.
그녀가 먼저 들어가고자 했던 방이 그녀 남편의 방이었다.
그녀로선 잠겨 있는 방을 어떻게 들어갈 방법이 없다. 이에 반대편 방문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번에도 문손잡이를 잡고 돌린다. 철컥. 문이 열어져 있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기어 들어간다.
‘병우씨 방은 닫혀 있는데 병헌씨 방은 열려 있네. 좀 이상하네.’
방 내부를 보면 방문 맞은편에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다. 근래 청소를 했는지 방 안과 책상 위가 깔끔하다. 책상 옆에는 짐을 넣어둔 듯한 큰 종이상자가 두 개 쌓여 있다.
그녀가 책상을 향해 계속 기어간다. 책상에 가까이 이르자 상체를 비스듬히 세우고 팔을 뻗어 의자를 잡아당긴다. 다행히 바퀴가 달린 의자라 쉽게 옮겨진다. 의자를 90도로 돌려 의자의 앞이 그녀의 가슴쪽을 보게 한다. 그녀가 의자 좌판 그리고 바로 옆 책상 상판을 손 지지대로 삼아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신체를 들어 조심히 신중하게 의자에 앉는데 성공한다. 그녀가 역시나 힘든지 상체를 뒤로 젖히고 깊게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볼만한 주위라야 책상 위일 뿐인데 최근에 누가 정리를 해 놨는지 노트와 서류파일 몇 개만이 한곳에 가지런히 쌓인 채로 잘 정돈되어 있다.
한데 쌓인 노트, 파일 너머로 뭔가가 놓여 있는 게 보인다. 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올린다.
작은 사진액자다. 두 남녀가 찍힌 사진이 들어 있다. 서로가 바싹 붙어 있고, 여자가 남자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 있는 사진이다. 사진 속 남자는 바로 ‘그이’이고, 옆에서 그의 볼에 입을 대고 있는 여자는, 그 여자는 그녀가 아닌 염색된 갈색 긴 머리에 예리한 느낌의 다른 여자다!
‘정민씨?’
사진 속 너무도 친밀한 그이와 정민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이가 정민씨와 왜 이런 사진을?’
그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때마침 어제 전화를 한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설마 이게 그 사람이 숨기던 건가? 이것 때문에 요 근래에 이층에 자주 들락거린 거야?’
그녀는 어제 그이와 정민씨에 대해 의혹을 품긴 했다. 어제는 그저 의혹이었지만, 이제는 아니게 됐다.
‘도대체 그이하고 정민씨는 무슨 관계인 거지? 그냥 아주버님과 제수씨? 이 사진은 그런 게 아니잖아! 무엇보다 여긴 본래 병헌씨 방이야. 근데 왜 여기에 병우씨와 정민씨가 이렇게 같이 붙어 찍은 사진이 있는 거냐구?’
액자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녀로선 평소 천사 같은 남편을 의심한다는 게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이 사진을 두고 의심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 오히려 그녀는 점차 자신의 사고(思考)를 바꿔간다.
‘아냐,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드라마를 보면 그런 사람 많이 나오잖아? 겉으론 매너남 같이 굴면서 뒤나 속은 음흉하고 추악한 소시오패스 같은 인간들. 어쩌면 그이도……’
그녀는 인과 관계를 짜 맞춰 보려고 한다.
‘그러면 내연 관계인 걸까? 정말로? 만약에 진짜로 그렇다면 어제 저녁 그이의 행동이 이해가 돼. 그이가 정민씨와 싸워서 그랬다고 했잖아? 아주버니와 제수씨 간에 다툼으로 그런 반응이 나타날 수가 있나 의심을 했는데, 둘이 연인 관계라면 납득이 될 수 있어.’
여기서 그녀는 평소 흥분하지 않던 그가 자기가 아닌 정민씨 때문에 화를 냈다는 것에 질투심이, 더 나아가 배신감마저 느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냐. 더 생각해보자. 정민씨가 여길 떠난 건 일주일 전이었어. 그 뒤로 그이가 나에게 말을 적게 하고, 이층에 더 자주 그리고 더 오래 있었지. 그 뿐만 아냐. 정민씨가 여길 떠나기 전에도 둘이 이층에 함께 올라간 적이 몇 번 있었어. 그리고 사고 이후로 그이는 나하고 잔 적이 한 번도 없어. 내가 몸이 편치 않다며 각방을 고집했지. 간혹 내가 같이 자자고 할 때면 언제나 핑계를 대며 일찍 자리를 피했지.’
오히려 확신으로 바뀐 것일까? 그녀가 들고 있던 사진액자를 좀 더 힘주면 부서질 듯이 세게 움켜쥔다.
월! 월! 때마침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민준이가 무슨 일이지? 설마……’
머잖아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진다.
‘누가 왔어! 도대체 누가 온 거지?’
갑작스레 집에 들어온 누군가로 인해 그녀는 잔뜩 겁을 집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