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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술사
작가 : HUNHUNHAN
작품등록일 : 201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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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숨기는 것 - 마지막 날, 亡人 (下)
작성일 : 16-10-10     조회 : 559     추천 : 0     분량 : 8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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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헌씨?”

 

 그가 방 안에 들어와선 그녀와 한걸음을 두고는 멈춰 선다. 그녀는 병헌씨의 얼굴을 다시 보더니 눈을 끔뻑끔뻑거린다. 그리고는 이내 무슨 영문이지 방금 전 자신의 생각이 착각이었다고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까 왜 병헌씨라고 생각한 거지? 이 사람은 병우씨 그이인데.’

 

 그녀 앞에 근래에 여기서 그녀와 함께 살았고, 방금 전까지 그녀를 찾던 그가 서 있다. 바로 그가 맞다.

 

 아까 전까지 그를 피하려 발버둥친 그녀였지만, 적어도 죽은 이의 귀신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을 잠깐이나마 놓아지게끔 했다. 그럼에도 끝내 여기서 그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 더욱이 저 수염남자가 지금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그녀를 압박했다.

 

 그런데 그이를 잘 보니 얼굴과 표정이 무척이나 복잡하다. 입은 꾹 다문 채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는데, 충혈된 눈이 원망하는 눈빛인지 측은해하는 눈빛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거기에다 붉은 눈가에는 촉촉이 물방울이 맺혀 있다.

 

 “이제야 감이 왔나 보군요.”

 

 수염남자가 뒤따라 들어온다.

 

 “당신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우선 제 소개부터 하죠. 제 성명은 ‘김화’. 성이 ‘김’이고, 이름은 ‘화’입니다. 여기 이 사람과 오정민씨의 의뢰를 받고 당신에게 진실을 밝히러 왔죠.”

 

 “네? 뭐라구요? 당신이 어제 날 도우려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 사람이 날 속이고 있다고도 했잖아요?”

 

 “그래요. 다 맞는 말입니다. 그 말대로 지금 저는 당신을 돕고 있고, 이 사람은 여태껏 당신을 속여 왔죠. 하지만 저는 당신만이 아니라 이 사람도 같이 돕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을 속여 온 건 이 사람만이 아니에요. 정민씨도, 여기 일하시던 가정부 아주머니도 당신을 속였죠.”

 

 “무슨 소리죠? 이제껏 모두가 날 속였다구요?”

 

 그녀는 이번에도 남자의 말을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다.

 

 ‘다들 날 속였다는 것도 그렇지만, 날 속인 이들을 돕는 게 어떻게 날 돕는 게 될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당신을 속인 이가 이 집에 한 명 더 있죠.”

 

 “더 있다구요?”

 

 ‘이 남자는 어제 통화할 때도 그러더니만 헤아릴 수 없는 얘기만 하네. 아까 언급한 세 명을 빼면 누가 또 날 속인다는 거야? 나 말고 남은 사람이 없는데.’

 

 화가 곧장 답을 알려준다.

 

 “그건 이연미씨 당신이죠.”

 

 “뭐요? 내가요?”

 

 “네, 이연미씨 당신이 자기 자신을 속였죠.”

 

 “내가 날 속이다뇨? 무슨 소리에요?”

 

 “제가 어제 당신의 남편 정병우씨에 대해 물어본 거 기억하나요?”

 

 “네, 그랬죠. 여기 있잖아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화 옆에 있는 그를 가리킨다.

 

 허허. 갑자기 화가 헛웃음을 소리 내어 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이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녀를 쏘아보기까지 한다.

 

 “정말 여기 이 사람이 아직도 정병우씨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뭐라구요?”

 

 그녀가 두 남자의 이상한 반응에 잔뜩 불안해진다.

 

 “연미씨는 이미 이상한 점들을 느꼈을 텐데요?”

 

 “네?”

 

 “이젠 얘기해도 되겠죠?”

 

 화가 이번엔 옆의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것도 정중히. 그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자 화는 다시 설명을 이어간다.

 

 “당신은 그들을 통해서 당신 기억 속 존재를 바꿔버렸어요. 너무 슬퍼서 잠시나마 그 슬픔을 잊게 하려고.”

 

 “무슨 말이에요? 그들은 누구고? 기억을 바꾸다니?”

 

 “제가 어제 맨 처음에 제 자신을 김철수라고 소개했었죠? 그 이름, 일전에 들어보지 않았나요?”

 

 “글쎄요?”

 

 “그 김철수라고 자칭하는 자 말고도 온통 검은색 추리닝에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있죠. 평소 줄 달린 금색 회중시계를 가지고 다니고요. 그자는 기억 나나요?”

 

 말을 들어보니 김철수는 정말 들어 본 이름이고, 검은색 추리닝 남자는 아까 환시로 본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을 정말로 보고 알게 된 것이 언제 어디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것도 생각나긴 하는데……”

 

 “완전하진 않아도 떠오르긴 하군요. 그들이 당신 기억을 바꿨어요. 당신의 의뢰를 받고서.”

 

 “네? 도대체 무슨 얘긴지……”

 

 “본론을 먼저 얘기하는 게 좋겠군요.”

 

 화가 그녀를 똑바로 보고 다음과 같이 또박또박 얘기한다.

 

 “당신의 기억은 조작됐습니다. 그리고 조작된 건 당신 기억 속 남편. 정확히는 남편의 얼굴이죠.”

 

 “네? 내 기억 속 남편이 조작됐다구요?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내 남편은 여기 있잖아요.”

 

 “난 당신 남편이 아니야.”

 

 줄곧 지켜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녀를 향해. 그간 남편이라고 믿었던 이가 남편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녀로선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 얼떨떨하다.

 

 ‘도대체 지금 이이가 왜 이러지?’

 

 “여보, 왜 이래요? 당신……”

 

 그가 그녀의 말을 자르면서 더욱 싸늘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말을 잇는다.

 

 “당신은 내 여보가 아냐! 당신 이연미는 내 아내가 아니라고! 그동안 이 집에서 했던 연극들은 진절머리가 나. 이제는 당신이 진실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원래대로 돌아가야 해!”

 

 “병우씨, 지금 장난……하는 거죠? 그쵸?”

 

 “당신은 이게 장난치는 걸로 보여? 다시 말하지만 난 당신 남편 정병우가 아냐!”

 

 “……그럼 당신이…… 정말 병우씨가 아니라면…… 진짜 병우씨는 어디 있죠? 그럼 진짜 그이는 어디 있냐구요!”

 

 그녀의 부르짖음에, 방금까지 쏘아 붙이던 그가 무슨 영문인지 돌연 울컥거린다.

 

 “왜 그래요?”

 

 급기야 그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말을 더 이상 내뱉지 못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화가 대신 입을 연다.

 

 “정병우씨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요.”

 

 “네? 없다니요?”

 

 “정병우씨는 죽었어요. 차사고가 있던 그 날.”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언급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무슨 소리에요? 그 때 죽은 건 병헌씨였어요! 병우씨가 아니라……”

 

 “병우씨가 사고가 나기 직전 뒷좌석에 있는 연미씨 사진을 찍었죠?”

 

 화가 말을 끊으며 대뜸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네, 그래요. 그랬어요.”

 

 “그 다음에 사진을 남편 폰으로 직접 전송을 받았고요?”

 

 “맞아요.”

 

 “그러면 당시 남편이 조수석에 있었겠군요. 운전 중에 뒷좌석을 사진 촬영할 순 없으니까.”

 

 “네. 당신 말대로 그이는 조수석에 있었어요. 거기서 저를 찍고, 사진을 제 폰으로 보내줬죠.”

 

 화가 잠시간 말없이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떤 의미를 눈을 통해서라도 당장 전달하고 싶다는 듯이. 이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설명을 재개한다.

 

 “아시겠지만 사고 당시 택시는 당신들이 타고 있던 차 우측을 박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장 충격이 심한 우측 조수석 탑승자가 현장에서 즉사했죠. 나머지 둘은 운 좋게 죽지 않았고요. 앞서 얘기한대로 당시 우측 조수석에 있던 게 정병우씨에요. 당신 남편이죠. 당신의 그이는 그때 죽었습니다.”

 

 그의 말이 맞다. 그녀가 사고를 떠올리면서 병우씨와 병헌씨의 위치가 헷갈리기도 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남편이 그녀를 사진 찍었다는 것. 그러니 그가 조수석에 있었고, 택시가 박은 오른쪽 조수석에 있었기에 그가 사망했다는 것. 이 점은 명백했다. 즉, 그녀의 남편이 당시 죽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녀가 흐느낀다. 이제 사고 당시의 기억이 또렷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당시 뒷좌석에 누워 있던 그녀. 앞 조수석에서 그녀를 찍은 남편 병우씨. 그이 옆에서 운전 중이던 그의 동생. 사진 촬영 직후 앞뒤로 피식 마주보는 그녀와 병우. 순간 차 오른쪽에서 덮쳐오는 환한 불빛. 미소 짓던 병우의 얼굴이 강렬한 빛에 감춰지고,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차체가 뒤틀리면서 깨진 유리창 파편이 허공에 흩날린다. 머잖아 그녀의 의식이 암전된 화면처럼 끊어진다.

 

 그의 남편이 세상에 없다는 게 확실해진 ‘지금’, 그녀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게 밝혀진 ‘지금’, 남은 의문은 하나다. 여기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녀가 눈물을 한번 쓸고는 묻는다. 남편이라 착각했던 그에게.

 

 “그럼 당신은 누구죠? 내 남편이 아닌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그리고 왜 날 속였죠?”

 

 “난……”

 

 그녀와 똑같이 눈물을 머금은 그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한다. 이번에도 화가 대신 답한다.

 

 “이 사람이 당신을 속인 건 연미씨 당신을 위해서였죠. 당신이 너무 슬퍼하고 아파하니까, 조작된 기억에 맞춰 남편이 살아있는 것처럼 연기를 한 거죠.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당신 남편인 거처럼, 자기 형인 거처럼. 그래요. 연미씨 남편의 동생이자 오정민씨의 남편. 이 사람이 바로 정병헌씨입니다.”

 

 

 ***

 

 

 별장 밖, 뜰 널평상에 아름다운 젊은 여자 ‘라영’이 걸터앉아 있다. 그녀는 옆에서 알랑대는 개 ‘민준이’의 턱밑을 가볍게 긁어 주는 중이다.

 

 그녀 옆 평상 위로는 태블릿 PC가 놓여 있는데, 연미가 이층에서 봤던 감시카메라 영상이 화면에 고스란히 떠 있다. 화면을 통해, 연미, 병헌, 화 셋이 어느덧 일층으로 옮겨 와 거실 소파에 앉아 얘길 나누는 게 보인다.

 

 병헌이 소파 위에 놓여 있던 자색 스웨터를 연미에게 건네자, 그녀가 그걸 끌어안고 흐느낀다. 한편, 화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현관을 향해 걸어간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고, 화가 그새 담배에 불을 붙여 피우면서 뜰 맞은편에 있는 라영을 향해 호기롭게 다가온다. 그가 라영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점점 가까이 접근한다.

 

 “멈춰요.”

 

 댓 걸음 정도 남겨둔 상태에서 그녀가 씩 웃으면서 손을 들어 제지한다.

 

 “거기 수염 난 산적 아저씨, 담배를 끄시던지 아니면 거기 떨어져 서 있으시든가 둘 중 하나만 해주실래요?”

 

 화가 자신의 잘 다듬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여유롭게 대꾸한다.

 

 “산적? 이렇게 잘생긴 산적도 있나? 글고 내가 담배 피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뭔 바람이 들어서 그러실까? 까칠한 아줌씨.”

 

 “어머, 어여쁜 숙녀 앞에서 담배는 예의가 아니죠. 그리고 여기 귀여운 개가 당신 성질처럼 구린 연기 냄새를 맡아서야 되겠어요?”

 

 그녀가 일부러 호들갑 떨며 맞장구친다. 이에 화가 코웃음 치며 말한다.

 

 “어여쁜 숙녀라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개 때문이라니. 개가 나보다 더 먼전가 보네.”

 

 “개는 말을 잘 듣잖아요. 고집불통에다 꽉 막힌 누구와는 달리.”

 

 “그런가?”

 

 그 사이 민준이가 잔디밭에 풀썩 눕는다. 라영이 그런 민준이를 정겹게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개가 정말로 귀여워요. 저 이연미라는 여자가 기르는 건가요?”

 

 그가 점잖게 답한다.

 

 “아냐. 여기서 잠시 이연미가 기르긴 했지만, 본래는 정병헌의 아내 오정민이 키우던 개야. 오정민이 자기 친정에서 사육하던 걸, 사고 이후 여기서 셋이 같이 지내면서, 데려와 키운 거지.”

 

 “그렇군요. 근데 혹시 오정민이란 여자, 직접 만나 봤어요?”

 

 “딱 한번. 의뢰를 받았을 때. 당신보다 더 성깔 있는 여자더군.”

 

 “저처럼 강단 있고 똑 부러진 여자라는 거군요.”

 

 화가 또 한 번 가벼이 코웃음 친다.

 

 라영이 옆에 둔 태블릿 PC를 들여다본다. 연미가 아직도 스웨터를 부둥켜안은 채 몸을 떨며 훌쩍대고 있다. 병헌이 곁에서 다독거린다.

 

 “여기 화면 속 ‘그녀’가 이연미이고, ‘그’는 바로 정병헌인 거죠.”

 

 “그래. 여자가 이연미, 남자는 정병헌. 내내 그랬지, 틀림없이. 형인 정병우는 죽었으니까.”

 

 라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저 스웨터는 뭐죠? 소중한 건가 본데요?”

 

 “그녀가 사고 나기 전부터 남편 정병우를 위해 짜오던 스웨터야. 이후 그들을 통해 남편이 아직 살아 있다고 기억을 조작한 다음, 시동생인 병헌을 남편으로 착각하고선 계속 만들다 어제 완성했지.”

 

 “슬픈 사연이 있는 스웨터네요. 남편이 죽은 걸 잊고 만든 거라니.”

 

 “그렇지.”

 

 “그럼 저 스웨터는 이제 어떻게 할까요?”

 

 “죽은 남편에게 보내지 않을까?”

 

 “어떻게요?”

 

 “아마도 태워서. 죽은 남편을 화장시켰으니까. 동생 정병헌은 그렇게 할까 생각중이더군. 애초 형 몸에 맞춰 짜진 거라 자기한텐 맞지도 않고. 아니, 그 이전에 죽은 형 거를 대신 입고 싶지도 않겠지.”

 

 화가 거의 탄 담배를 아래 잔디 위에 떨어뜨리고는 신발 바닥으로 비벼 끈다. 그리고는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그런데 동생인 정병헌씨는 용케도 죽은 형을 연기했네요.”

 

 “아무래도 그 ‘녀석’이 정병우가 살아있는 걸로 기억을 조작할려면, 정병우를 연기할 대역이 필요했으니까. 그와 흡사하게 생긴 형제고, 사고 때 함께 있었으니 그가 적임자였지. 거기다 처음엔 그들을 부른 게 정병헌과 오정민 부부였거든. 힘들어서 정신과 병원을 다니던, 형의 아낼 위해서. 그 병원의 박은수 원장이 소개를 해서.”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병헌과 오정민 그 둘의 입장이 달라진 거죠?”

 

 “그래. 아무리 연기라지만 실제와 다른 가족을 계속 연기를 하다 보니 갈등이 점점 생겨나고 쌓여 갔지. 특히 오정민은 자기 남편을 남편이 아닌 것처럼 대해야 하고, 형수가 그를 그녀 남편인 양 대하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정민씨가 일주일 전에 여길 나간 거구요. 그리고 박은수 원장과 함께 우릴 찾아 부른 거고.”

 

 “그래. 연극을 끝내 남편을 되찾아 올려고. 게다가 예상보다 이연미의 기억 조작 상태가 오래가기도 했으니까. 오정민과 정병헌이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그녀의 조작된 기억을 이쯤에서 중단시킬 필요가 있었어.”

 

 “어쨌든 정민씨 마음고생이 심했겠네요.”

 

 “그래. 하지만 정병헌만큼은 아닐걸. 오정민이 겪었던 고충은 사실 정병헌한테도 그대로 적용이 되거든. 그뿐인가. 죽은 형을 연기한다는 압박도 만만치 않았을 거야. 그녀에게 가짜라는 걸 들키지 않게 매번 신경을 써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정병헌씨가 가짜 남편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했을까요? 일단 ‘그들’이 그녀의 기억 속, 정병우와 정병헌의 얼굴을 서로 바꾼 거긴 해도 평소 버릇 같은 데서 충분히 티가 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그녀가 조금만 신경 썼다면 일찍 알아챌 수도 있었을 거야. 일단 형제가 주로 쓰는 손이 서로 달랐으니까. 형인 병우가 왼손잡이였고, 동생인 병헌이 오른손잡이였거든. 뭐 정병헌이 왼손에 깁스가 달린 걸로 계속 얼버무린 거 같지만. 그 외에도 젓가락 집는 법이 다르고, 손가락을 깨무는 버릇이 있음에도 그녀는 깨닫지를 못했지.”

 

 “왜 그랬을까요?”

 

 그가 담배 연기를 한번 길게 내뱉고는 그녀가 있을 별장을 잠깐 뒤돌아 본 뒤, 말을 재개한다.

 

 “이건 내 추정인데 믿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믿고 싶어서?”

 

 “아마 잠재의식 속에서 이 거짓된 상황을 믿게끔 스스로가 인식을 못하게 틀어막은 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해. 글고 보면, 이번 조작된 기억은 이전 사례와 달리 제법 오래가기도 했어.”

 

 “오히려 조작의 효과가 더 강해지고 있는 건 아니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아니면요?”

 

 “그 효과가 당사자의 욕망에 비례하는 걸지도. 조작된 기억을 유지하고 싶은 당사자의 욕망에 따라서 말야.”

 

 그러면서 화가 한 걸음 더 다가온다. 이에 라영이 어어 하며 손을 들어 다시 제지한다.

 

 “담배를 끄거나 그냥 서 있거나 둘 중 하날 하라 했죠?”

 

 “이봐, 아줌씨. 내가 다리가 아파서 그래.”

 

 “그래도 하나만 택해요.”

 

 “누굴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아뇨. 여기 개를 위해서.”

 

 그러면서 라영이 밑에 축 늘어진 개 ‘민준이’를 살핀다. 어느 틈에 이 개가 소록소록 자고 있다. 화가 보란 듯이 담배를 새로 꺼내 태워 물면서 일부러 큼직하게 한걸음 뒷걸음친다.

 

 “이거 기자님께서 개를 생각해 주시니 따라 드려야지. 고거 참 부러운 개새끼야.”

 

 “왜 부럽다는 거죠?”

 

 두 남녀가 말없이 물끄러미 각자의 눈을 잠시간 마주 본다.

 

 “그냥 부럽다는 거지. 별 거 있겠어?”

 

 화가 가볍게 피식 웃어 보인다. 라영도 이에 싱긋 미소 지어 보인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근데 김철수에 대해서 알아낸 건 있어요?”

 

 “아, 맞아. 그 자식 폰 번호를 알아냈지.”

 

 “그리고는요?”

 

 “근데 알아보니 가입자 주민번호 첫자리가 이(2)야. 숫자 이(2)부터 시작한다구.”

 

 “어머, 그럼 김철수가 구십세 넘은 노인이란 거네요. 뭐 당연히 그럴 리는 없고. 주민번호 도용에 대포폰인 거겠군요. 그럼 위치 추적은요?”

 

 “그건 불법이잖아.”

 

 “그럼 안 했다는 건가요? 천하의 김화씨가요? 이미 어떻게 주민번호는 파헤치신 우리 화~씨~가요?”

 

 라영이 조롱하듯이 얘기하면서 화를 가볍게 흘겨본다. 입가는 웃으면서. 화도 같이 씨익거리면서 답한다.

 

 “그래, 하긴 했지. 근데 그 자식 위치가 매번 바껴. 거기다가 평상시 대부분은 폰을 꺼두는 거 같아.”

 

 “즉, 번호로 추적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 이 말인 건가요?”

 

 “그런 셈이지. 그래서 이렇게 사건을 하나하나 찾아서 해결하고, 그러면서 뒤를 쫓는 수밖에 없겠어. 당분간은.”

 

 “이거 노가다가 되겠는데요. 사건 노가다. 도대체 몇 개나 되는 사건들을 해결해야 그 철수씨를 찾을 수 있을는지…….”

 

 라영이 푸념하듯 말을 뱉고는 평상 위에 그대로 드러눕는다.

 

 “그럼 이제 와서 그만둘 건가? 기자 아줌씨.”

 

 “에이, 그럴 리가요. 제가 계속 돌봐 드려야죠.”

 

 누운 채로 답하는 라영.

 

 “돌본다고? 설마 나를?”

 

 “그래요. 당신 아니면 누구겠어요.”

 

 “누가 누굴 돌봐.”

 

 라영이 곁에 태블릿 PC를 집어서 코 바로 위로 가져가 화면을 살펴본다.

 

 어느 틈에 병헌이 연미를 휠체어에 옮겨 태운 채, 전동식 휠체어임에도, 풀이 죽은 그녈 대신해 한 손으로 휠체어를 민다. 그녀의 품엔 아직도 스웨터가 있다.

 

 “오늘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정병헌에게 이연미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애증의 존재였겠지.”

 

 “애증의 존재요?”

 

 “자기 형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잠긴 형수라는 측은한 존재, 그리고 그녀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자신과 자기 진짜 아내를 심정적으로 힘들게 한 가짜 아내. 이 두 가지가 혼재됐을 거야. 근래에는 후자의 감정이 강했겠지만 이젠 아니겠지.”

 

 태블릿 PC의 다른 카메라 화면으로 이제 1층 복도에 들어선 병헌과 연미가 보인다. 아마도 지쳤을 그녀를 재우기 위해 침실로 향하는 것일 거다.

 

 그 사이 화는 다 탄 담배를 이번에도 아래에 떨어뜨려 밟아 끄고는, 성큼성큼 그녀 곁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평상 위 그녀의 옆 공간에 똑같이 등을 눕힌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들 모두.”

 

 “이제는 본래대로 돌아가겠지. 대신 또 다른 기억을 남긴 채. 잠시나마 서로가 가짜 남편이고 가짜 아내였던 기억. 그 기억을 서로 공유한 채로 말야. 그런 채로 모두 살아가겠지. 호락하지 않은 이 세상을.”

 

 라영이 태블릿 PC를 옆에 내려놓는다. 평상에 나란히 누운 그들의 눈에 어느 때보다도 드넓고 청량한 가을 하늘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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