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넓은 아파트 거실 안. 환하게 불이 켜진 가운데, 다섯 명의 사람이 꽉 차듯이 자리를 잡고 있다.
창을 뒤로 두고 있는 상석 소파에는 ‘화’가 여유롭게 앉아 있고, 긴 소파에는 각자 정장을 차려 입은 재용과 대빈, 경미가 나란히 앉아 있다. 한편 꺼져 있는 벽면 TV 옆으로는 대주가 나머지 이들과 거리를 두고서 팔짱을 낀 채로 서성이듯이 서 있다.
대주의 용모는 소파 가운데 앉아 있는 중년 남성 ‘대빈’과 흡사하나, 형제이니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십년은 젊어 보이는 30대다.
한동안 이어졌던 말이 잠시 끊어지고 적막이 흐르는 와중에, 이윽고 거실 안 인물들 중 유일한 여성인 경미가 입을 연다.
“근데 여기 모두가 온 거 아닌가요? 누굴 기다려야 한다는 거죠?”
“아닙니다. 전부 온 게 아니죠. 아직 한 명이 남았습니다. 정녕 중요한 이가. 그가 곧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여기 여러분 앞에. 이제껏 꽁꽁 자신을 숨기던 그가.”
화가 고갤 오른편으로 돌려 계속 일어서 있기만 한 대주를 지그시 쳐다본다. 대주가 그의 시선이 불편한지 어금니를 악물고는 일부러 머릴 돌려 시선을 피한다.
딸깍. 빛이 사라지고 암흑에 잠긴다. 난데없이 전등불이 꺼졌다. 정전이 된 건지 거실뿐 아니라 아파트집 전체가 완전히 컴컴해졌다.
헉! 숨 차는 소리들이 들려오고 모두가 당혹해하는 인기척들이 전해진다. 그러나 그들 중 오직 ‘화’만은 아무 동요 없이 잠자코 앉아만 있다.
“뭐죠?”
“정전입니까?”
“걱정 마십시오. 자리를 지키세요. 곧 그자가 나타날 겁니다.”
화가 진정의 말을 한다.
마침 말마따나 모퉁이에서 한 사람이 나타난다. 어두워 정확히는 볼 수는 없지만, 주변이 까맣기에 오히려 그자가 비슷한 흑색 복장을 온통하고 있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것도 추리닝이다. 후드가 달린. 게다가 옷을 입은 이의 덩치가 작고 호리하다. 그자가 후드를 푹 눌러 써 얼굴을 가린 채 등장했다. 영락없이 화가 쫓는 ‘그 녀석’의 모습이다!
꺄악! 경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경미만 놀란 게 아닌지 소파가 들썩들썩이는 소리도 들린다. 대주도 충격을 받았는지 신체가 가구(거실장)에 부딪힌 듯한 둔탁한 소음도 들려온다.
‘후드’가 거실과 주방의 경계쯤에서, 앉아 있는 화를 정면에서 마주하며 우두커니 멈춰 선다.
“누굽니까?”
화 바로 옆에 있는 재용이 묻는다.
“그 녀석이죠. 여기 ‘누군가’가 저 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 자가 그 ‘누군가’의 기억을 조작했죠. 그렇게 그 ‘누군가’가 우리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게끔 했습니다. 자기는 진실이라고 믿는 거짓말을.”
화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후드’에게 다가간다. 미동 없이 뻣뻣이 서 있는 ‘후드’. 화가 여유롭게 두 손을 양주머니에 집어넣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거실을 가로질러 그자와 바로 한 발짝 앞까지 당도한다.
얼굴이 보일만한 거리지만 깜깜한 조명에 고개마저 숙이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후드 밑으로 그나마 드러난 턱선이 여자마냥 갸름하다.
화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린다. 지켜보는 이들이 숨을 완전히 죽이고 기다리는 가운데, 마침내 화가 남은 한 발을 내딛는다.
***
그 날 오전.
남녀 둘이 복도를 나란히 또각또각 걷고 있다.
남자는 중년으로 정장을 잘 갖춰 입고 있지만, 평소 운동을 즐겨 하는지 체격이 무척이나 건장하다. 얼굴은 말끔히 면도를 했지만 피부가 거칠어 보이고, 이마와 눈가에는 주름이 적지 않다.
옆으로 젊은 여사원이 함께 따라 가고 있다. 서른이 넘지 않아 보이는 앳된 얼굴을 가진 이로 한 손엔 4구짜리 커피 종이 캐리어가, 다른 손엔 서류 뭉치들을 가슴에 바짝 댄 채 붙들고 있다.
남자가 회의실이란 표지판이 달린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자 여사원이 곧장 뒤따른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그가 들어오며 말한다. 맞은편 커다란 사무용 탁자 너머,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남녀 한 쌍에게.
남자가 반대편 의자에 곧장 앉는 사이, 여사원이 커피 캐리어를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보면 4구에 3잔의 커피만이 들어 있다. 이어 품에 있던 서류들을 탁자 중앙에 펼쳐 진열한다. 나름 능숙한 솜씨다. 이후 여사원이 커피컵 하나를 같이 온 남자 앞에 건넨다.
“과장님은 아메리카노시죠?”
“고마워. 미스 안.”
“여자 분은 라떼 연한 거.”
사원이 다른 컵 하나를 건넨다.
“고마워요.”
“헤이즐넛은 여기 남자 분. 수염이 멋있으시네요?”
사원의 말에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커피컵을 받는 남자. 수염이 코, 턱, 구레나룻까지 전부 나있는 젊은 남자, 바로 ‘김화’다. 그 옆에 피식 웃으며 앉아 있는 이는 그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 ‘라영’이다.
“미스 안, 이제 가서 다른 일 보도록 해.”
과장의 말에 미스 안이라 불리는 사원이 과장은 물론 화, 라영에게도 정중히 인사하며 얌전하게 회의실을 나간다.
한편 방 안은 창에 전부 블라인드가 쳐지고, 블라인드를 포함해 탁자와 프로젝터 스크린 그리고 벽까지 온통 흰색 투성이다.
“여자 분은 제가 처음이시죠? 저는 엘티(LT)생명보험 특수조사팀 과장 임재용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라영에게 명함을 건넨다. 그 다음, 나열된 서류들을 골라 화와 라영 각자에게 전달하는 재용. 그들이 받은 서류 첫 페이지를 넘기면 어떤 할머니의 얼굴 사진과 함께 신상명세서가 있다.
“서순하라고 사십육(46)년생입니다. 저희 보험사에 생명보험을 이년 전 가입하셨는데, 삼주 전쯤에 본인이 사시는 아파트 옥상에서 추락사했습니다. 사체가 발견된 건 새벽 두 시 반 경으로 순찰 중이던 경비에 의해 발견됐고, 사망추정시간은 한 시에서 두 시 사입니다.”
“추락사라고 하셨는데 원인이 뭔가요?”
라영이 묻는다.
“그게 불명확합니다. 시간대가 한밤중인데다 목격자도 전혀 없어서 사실상 정확한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본래 추락사라는 게 그런 부분에서 애로점이 많죠.”
“근데 옥상에서 추락했다는 건 아셨네요.”
“엘리베이터 씨씨티비(CCTV)에 그 분이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게 찍혔거든요. 시간은 열두 시 오십 분 경. 사망추정시간하고도 맞아 떨어지죠. 이후 내려간 장면은 없었고, 본인 집에서 창문이 열려 있다던가 한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럼 경찰에선 사인을 어떻게 결론을 냈나요? ‘추락사인데 그 원인은 불명이다.’라는 건가요?”
“예. 말씀하신대롭니다.”
라영이 기자답게 꾸준히 질문을 던지는데 반해, 화는 입은 다문 채 서류의 내용을 한 장 한 장 면밀히 들여다본다.
“근데 저희들은 처음엔 자살이 유력하다고 봤습니다.”
“이유는요?”
“사망자의 남편 되시는 분이 사고가 있기 한 달 전쯤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이 할머니가 이후 우울증 같은 것에 시달리다 자살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추정을 했다는 거군요.”
“예.”
“이 할머니 분이 생전에 우울증을 알았다든가 한 기록은 있고요?”
“없습니다. 다만 사고사나 타살일 가능성이 일단 높지 않으니까 자살 가능성에 우선 무게를 뒀죠.”
“그럼 유서는 발견됐고요?”
“그건 발견이 안 됐겠지. 그쵸?”
화가 대뜸 끼어든다. 눈은 서류를 보고 있지만, 귀로는 라영과 재용의 얘기를 다 듣고 있었다.
“예. 유서가 있을 거라 짐작했는데 전혀 나오질 않더군요. 더구나 사고 직전 저녁에 자녀 세분들이 다 어머니를 만났고, 당시 자살할 조짐 같은 건 없었다고 했습니다.”
“세 자녀분이라고요?”
라영이 질문을 잇는다.
“예. 자녀가 세 명 있거든요.”
“그래요? 그럼 그날 저녁에 세 자녀가 모두 어머니 집에 모인 이유는 뭔가요?”
“그분들 얘기론 한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가 이제 어디서 사실 건지, 그리고 아버지 재산이나 유품을 어떻게 처분할 건지 의논하기 위해서였다더군요.”
“혹시 그 세 자녀분들만 왔다는 건가요? 그 분들 배우자나 자식들은 빼고요?”
“예. 딱 그 세 분들만 모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녀분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첫째 장남은 심대빈이라고 중견 건설사 사업을 하는 분입니다. 참고로 본인 명의로 빌딩 세 채를 가지고 있죠. 둘째인 딸 심경미는 전업주부인데 남편이 의삽니다. 그것도 나름 지역에서 잘 나가는 성형의(醫)죠. 막내아들 심대주는 작은 호프집을 하나 운영 중입니다. 미혼이고 형, 누나와는 달리 부자는 아니죠. 그래서인지 서순하씨가 사망 시 보험금 수령인을 막내아들로 해 놓았더군요. 어쨌든 자녀분들 관련해선, 제가 드린 서류에도 다 기입이 돼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그럼 아까 언급하신 계약 내용대로 막내인 심대주씨가 사망보험금을 전부 수령하는 거겠네요.”
“예. 저희들로선 자살이 의심되긴 하지만, 경찰 조사가 끝났고 더 이상 나올 증거도 없어 보이니 일단 보험금을 지급할 예정이었습니다. 단, 이틀 전까지는요.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게 바로 이틀 전에 왔다는 그 익명의 편지 때문인 거죠?”
“예. 이 편집니다.”
재용이 안주머니에서 접혀진 A4종이 하나를 꺼내 펼쳐 라영에게 내민다.
“앞서 드린 서류에도 사본이 포함돼 있습니다.”
라영이 건네받은 종이엔 컴퓨터로 인쇄된 글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얼마 전 12월 1일 새벽에 추락사한 서순하씨에 대해 알려드릴 중대한 사안이 있습니다. 그 전날 저녁 서순하씨를 만났다는 세 자녀분들 중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알고 싶으면 다음 연락처를 통해 ‘화’라는 남자를 찾으십시오. 그 사람이 진실을 밝혀 줄 겁니다. 자기가 거짓말하는지 조차 모르는 이가 감추고 있는 진실을.
010 - XXX - XXXX
“편지에는 누가 썼는지에 대한 게 없고, 봉투에 적힌 발신인과 주소는 가짜더군요.”
라영이 그새 다 읽은 편지를 재용에게 돌려준다.
“역시 누군지 모를 익명의 제보자인 거군요. 어쨌든 편지 내용에 따라 이 번호로 이 사람한테 연락을 하셨고, 오늘 이렇게 우릴 부르게 되신 거군요.”
“예. 근데 전화로 듣긴 했지만, 정말로 그게 가능한가요? 그걸 조작한다는 게 말입니다. 사람의 기억을 조작한다니? 여러분이 쫓는다는 그 남자가 진짜로 타인의 기억을 마음껏 바꾼다는 게 사실입니까?”
“네. 그 남자는 자신만의 강력한 최면을 통해 다른 이의 기억을 조작해요. 이미 들으셨겠지만 위력이 어마어마하죠.”
“들어보니 믿기지가 않을 정도더군요. 아이 엄마가 자기 아이의 존재를 잊게 했다던지. 부인이 남편의 얼굴을 잘못 알게 했다던지. 너무 놀라운 일이라 도통 실감이 안 가더군요. 정말로 그랬다는 거죠?”
“맞아요. 전부 실제 일어난 일이에요. 저희들이 직접 겪은 사례들이고요. 저도 이 ‘화’씨하고 그 남자의 흔적을 쫓을 때마다 그 능력에 매번 감탄해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먼저 이 투서에서 세 자녀들 중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들 중 누군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 남자로 인해 조작된 기억을 믿고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거예요. 그래서 이 편지를 보낸 자가 보험사에서 우리에게 연락을 취하게끔 한 걸 거구요. 즉, 저희들이 기억이 조작된 이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사람이 조작한 기억이 무엇인가를 밝혀낸다면, 사인이 불분명한 이 할머니 서순하씨의 죽음에 관한 ‘실체’를 알 수 있겠죠. 그게 이 편지가 온 이유겠죠. 자, 그러면 그쪽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오늘 저녁에 자녀분 세 명이 서순하씨 집에서 모일 예정입니다. 제가 약속을 잡아놨습니다.”
“혹시 그 사람들에게 기억이 조작됐단 얘긴 했나요?”
“아뇨. 그걸 얘기 하면 당장 혼동만 될 거고, 믿지도 않을 거라 생각해서 하진 않았습니다.”
“잘 하셨어요. 지금 시점에선 말해봤자 긁어 부스럼일 뿐이죠. 조작당한 당사자는 현재 자기 기억이 조작 당했다는 것조차 기억 못할 테니까요. 자, 어떻게 할 거죠?”
라영의 마지막 물음은 재용이 아닌 옆에 있는 화에게 향한다.
라영이 재용과 열심히 얘기를 나누는 동안, 한마디 질문도 없이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면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그들의 대화도 들었던 그. 그가 이제 입을 연다.
“저녁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지. 미리 그 ‘자식들’을 만나 보자고. 현장도 둘러보고.”
“그러시겠다면 제가 전화로 그분들한테 미리 얘기를 해두죠.”
“그렇담 곧 출발할 테니까 당장 연락을 해주시죠.”
“예. 바로 하죠.”
말마따나 즉시 연락을 하려는지 재용이 곧바로 일어나서 회의실 밖으로 나가려 든다.
“아, 잠깐.”
화가 불러 세운다.
“자녀분들한테는 우리가 같은 보험조사관인 것처럼 얘기해주십시오. 우리의 진짜 정체를 아직 드러내선 안 되니까요.”
“그러죠.”
이 말과 함께 재용이 회의실을 나선다. 그렇게 안엔 라영과 화만 남았다. 화는 다시 서류를 훑고, 라영은 커피로 목을 축이면서 그의 얼굴을 힐끗힐끗 살핀다.
“화씨는 이 사건을 어떻게 봐요?”
“당신은 어떻게 보는데?”
화가 라영의 질문에 시크하게 그대로 반문해 버린다.
“제가요?”
“응.”
화가 라영을 지그시 보며 가볍게 고갤 까딱한다. 라영이 흐흠 헛기침하며 목을 한번 가다듬더니, 장황하게 자기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글쎄요. 일단 이 사건은 이틀 전까진, 그냥 봤을 때는, 자살일 거라 추정되는 할머니의 추락사일 뿐이었어요. 근데 그게 누군지 모를 익명의 편지 하나로 한바탕 뒤집혀 버린 거죠. 그 덕에 지금은 모든 게 미스터리에요. 한가지만이 아니라 모든 게. 할머니가 투신한 진짜 원인은 무엇이냐? 죽기 전 저녁 만났다는 세 자녀 중 기억이 조작 된 건 누구이냐? 기억 중 어떤 게 조작 된 거냐? 또 이 제보자의 정체는 무엇이냐? 거기다 이 상태에서 조작이 이뤄진 걸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느냐? 밝혀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건 고작 할머니가 저녁에 자식들을 만난 이후 한밤중에 추락했다는 거하고, 익명의 편지를 통해 자식 중 기억이 조작된 이가 있다는 것. 이 둘 뿐이죠. 이렇게 정리해 보니까 참 막막하네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죠? 무엇을 해야 우리가 진실을 파헤칠 수 있죠?”
“하나하나씩.”
화가 라영이 긴 얘기를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지체 없이 답한다.
“그 자식들을 만나서 하나하나 물어보고, 그녀가 살던 아파트에 가서 하나하나 알아보고, 해서 그날 진상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가는 거지. 일일이 정보를 쌓으면서. 그런 식으로 차차 쌓아 가다 보면 진실이 나타날 거야. 진짜 현실과 거짓 기억 간의 모순을 통해서.”
“하지만 이번은 이전 사례들과는 달라요. 한 명이 아니에요. 세 명이죠. 우린 그 세 명 중 누가 기억이 조작됐는지도 알아내야 해요. 그게 쉽겠어요? 당사자는 자기가 거짓말한다는 것조차 모를 텐데.”
“난 오히려 그래서 쉬울 거라 보는데?”
“쉽다고요? 왜죠?”
“우선 거짓말하는 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진실을 말할 테니까. 그 진실을 잘 이용하면 다른 거짓을 가려내기가 용이하겠지. 거짓말하는 한 명만 있는 것보단 사실을 얘기하는 비교 상대가 있다는 건 유리해. 나아가 기억이 조작된 이가 자기가 가짜를 말한다는 걸 모른 채 얘기를 한다는 것. 이것도 나쁘지 않지. 사람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아등바등 이야기를 계속 짜 맞추며 진실은 숨기려 들겠지만, 자신이 거짓말하는 걸 모르고 그저 조작된 기억에 맞춰 얘길 한다면 자연스레 튀어나오게 될 거야. 자기가 인식 못하고 있던 진실이. 무의식 속에선 알고 있는 그 진실이 말야. 의식적으로 진실을 감추는 자보단 무의식적으로 진실을 말하게 되는 자가 더 수월할 지도 모르지. 더욱이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이 추락 사건을 풀려면 말야. 어쨌든 일어서자고. 저녁 전까진 그 자식들을 앞서 다 만나 봐야 되고, 현장도 살펴봐야 되니까. 그리고 당장 한 대 좀 피워야 하고.”
그가 두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담배 피는 시늉을 한다.
“커피 때문인가? 이게 당기네. 그럼 출발해 볼까? 왓슨 양.”
“왓슨 양이요?”
그가 피식 웃으며 답한다.
“나야 이 사건을 추리하고 해결할 주인공 ‘셜록’이니까. 그러면 당신은 당연지사 보조 ‘왓슨’인 거지. 그런데 여자니까 왓슨 군이라고 할 순 없잖아.”
“아뇨. 당신은 코난이죠.”
“코난? 코난 도일을 말하는 건가? 셜록 홈즈의 작가?”
“아뇨. 에도가와 코난이요. 꼬맹이 탐정.”
“에도가와 코난? 혹시 그 만화에 나오는……. 근데 왜?”
“당신은 그 꼬맹이처럼 잘난 척 나대면서 철딱서니가 없고 싸가지도 없으니까.”
라영이 빤히 그를 보면서 실실대며 말한다.
“그 꼬맹이가 그래? 그럼 당신은 뭔데?”
“난 란이죠. 그 꼬맹이를 돌보는 같이 사는 누나. 내가 당신을 돌보니까. 그럼 가볼까요? 꼬맹이 탐정 양반.”
그녀가 불쑥 손을 뻗어서 그의 머리를 아이 머리 다루듯 한번 휙 쓰다듬는다. 그리고는 일어나 흥얼거리며 가벼운 걸음걸이로 문을 향한다.
그런데 언제 들어왔는지 아까 커피를 건넸던 여사원이 회의실 문 옆에 서 있다. 뒷정리를 하러 온 것이다.
라영이 그제야 그녀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란다. 이내 뻘쭘히 서로 목례를 하고는 서둘러 회의실을 나가는 그녀. 방금 전 화와 자신의 꼬락서니를 그녀가 봤을 거란 생각에 부끄러운 건지 얼굴이 붉어지면서 애써 시선을 피하며 나간다.
한편, 기습적인 그녀의 행동에 아무런 대응도 못한 채 그저 앉아만 있던 그. 그녀가 문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는 자리서 일어난다. 씨익 웃는 그가 혼잣말로 말한다.
“근데 란이 누구야?”
그러더니 맞은편에 머쓱하게 서 있는 여사원에게 묻는다.
“혹시 알아요? 그 만화에서 란하고 코난이 어떤 사이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