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은 직책의 집무실로 보이는 커다란 방 안. 방만큼이나 널찍한 책상 앞 의자에 중년 남성이 편히 앉아 한 손으로 금색 지압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 남자의 앞, 책상 위 명패에 ‘서심건설 대표이사 사장 심대빈’이란 글귀가 또렷하게 박혀 있다.
‘심대빈’은 방금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오후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보기로 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요근래에 매우 바쁘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 지난달 재개발 입찰을 두고 다른 중소 건설입체들과 경쟁하며 열심히 로비활동을 했지만, 선정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재수 없는 놈들. 이것들이 그렇게 처먹고는 수주(受注)를 겨우 그것 밖에 안줘.’
그뿐인가? 재개발 건도 골치였지만, 와중에 연달아 터진 가족 문제도 큰 부담이 됐다. 하필이면 입찰로 분주한 가운데 양 부모님이 한달새에 저 세상으로 떠나 버렸다. 아버지인 심경호는 두 달 전 급작스런 뇌졸중으로, 어머니 서순하는 삼주 전쯤 아파트 옥상에서 추락사고로 숨을 거두셨다.
‘불운이란 게 설상가상으로 몰려온다더니, 연말에 딱 그 꼴이네.’
여기서 더욱 골치가 아픈 건 어머니의 추락 원인이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사건 조사 당시, 경찰이나 보험사는 그녀가 아버지 죽음에 따른 심경 불안으로 투신을 했을 수 있다는 의견을 종종 넌지시 드러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주장을 결단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평소 어머니는 결코 ‘자살’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한 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상황 또한 아니라고 장담했다.
본디 그들 가족은 아버지가 땅부자인 덕에 재력이 풍부했고, 이를 기반으로 대빈은 순탄한 성장 과정을 거쳐 현재 위치의 사업가가 될 수 있었다. 거기다 바로 밑의 여동생 경미도 경제력 좋은 의사와 결혼해서 이십년 가까이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었다. 어쨌든 돈에 관해선 그들 집안은 어떤 모자람도 없었다.
설사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 본인이 자기 명의의 상당수 자산을 가지고 있고, 아버지 재산도 유언에 따라 부족함 없이 받았는데 무엇이 모자라서 자살을 택한단 말인가?
거기다 그는 사고 직전 저녁에 동생인 경미, 대주와 함께 어머니를 직접 뵈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녀가 자살을 할 만한 징후 따윈 보이지 않았다.
‘자살일 리가 없어. 그럴 거였으면 그 직전 우리들과 모여 오손도손 얘기를 나눴을 리가 없지. 그리고 유서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똑똑.
“들어와.”
서른쯤 돼 보이는 여자 직원이 문을 열어 머리를 빼꼼히 내민다.
“보험사에서 사람들이 왔는데요.”
“모셔.”
대빈이 간략하게 지시한다.
“네.”
여직원이 고분고분 문을 닫더니, 머잖아 다시 열리면서 그녀의 안내에 따라 화와 라영이 들어온다. 대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한다.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시죠.”
접대용 소파를 가리키며 자신도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대빈과 화, 라영이 서로를 대견(對見)하는 식으로 앉는다. 여직원은 대빈 옆에 정중히 선 채로 추가적인 지시를 기다린다.
“그쪽 조사팀 과장한테서 연락은 받았습니다. 사전에 절 만나 보라 해서 오신 거죠? 미안하지만 지금이 연말인지라 제가 이래저래 챙길게 많아요. 해서 시간을 넉넉히 드리긴 어려울 듯합니다.”
“괜찮습니다. 잠깐이면 되니까요.”
화가 점잖이 답한다.
“뭐, 어차피 오늘 저녁 저희 어머니 집에서 또 만날 예정이니깐.”
대빈이 맞장구친다.
“네.”
“근데 두 분 다 점심은 했습니까?”
“하고 왔습니다.”
“그래요? 커피는 어떻습니까?”
“물만 주시면 될 듯합니다.”
이에 여직원이 곧바로 방 한 편 탁상으로 가 위에 놓인 유리잔들에 물병의 물을 고이 따른다.
“자, 당장 시작할까요? 저도 이미 여러 차례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본지라. 각설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네, 그렇다면.”
그 사이 여직원이 쟁반에 물잔들을 들고 와 대빈을 포함한 세 명 앞 좌탁 위로 차근히 잔들을 놓는다.
“이만 나가봐.”
대빈이 또 짤막하게 지시를 내리자 여직원이 얌전히 목례를 하고는 사뿐사뿐 집무실을 나간다.
“자, 물어보시죠?”
“잠깐만요.”
라영이 두 남자 사이의 이야기를 끊는다. 그녀가 화와 대빈의 눈치를 보면서 주머니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내 좌탁 위에 올려놓는다. 기기의 액정화면으로 녹음 중인 게 보인다.
“괜찮죠?”
라영이 대빈을 보며 묻는다.
“문제없습니다.”
대빈이 사업가다운 호방(豪放)한 기색으로 답한다. 이어 라영이 작은 수첩과 펜을 꺼내 속기(速記)를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곧이어 화가 질문을 시작한다.
“네, 그럼 시작하죠. 우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그날 저녁에 가족분들이 모인 경위와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이미 경찰하고 보험사 측에 일일이 다 얘기한 내용인데 그걸 다시요?”
“네. 지금 기억나는 대로요.”
대빈은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화가 기억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한다.
“좋습니다. 좋아요.”
대빈은 질문이 내키지가 않는 듯 시큰둥해 한다. 그럼에도 점잖게 서술을 한다.
“일단 두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저희 가족은 사후 처리해야 될 문제들에 대해 논의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재산 상속에 관한 문제와 어머니가 어디서 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 때문이었죠.”
“정확히 어떤 내용들이었을까요? 논의했다는 내용들이요?”
“글쎄 그게 자세히 설명하기가 쉽지도 않고 시간도 오래 걸릴 텐데.”
대빈이 추가적인 설명을 망설인다.
“그럼 유산 상속 관련해서부터 간략하게 먼저 하도록 하죠. 유산과 관해서 당시 문젯거리가 있다든가 하는 건 없었나요?”
“일단 아버지 유산에 대해선 별반 문제될 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미리 유언장으로 요목조목 지정을 잘 해두셨거든요. 그것도 상속법에 최대한 맞춰서 말이죠. 다만 세금이라던지 부동산과 관련해서 서로 간의 조율이 약간 필요했을 뿐이죠.”
“그런데 말 하신대로 상속법에 의거하셨다면, 유산을 자식들에게 동등하게 나눠 주셨겠네요.”
“네. 똑같이 받았죠. 저나 동생들이나.”
“같은 자녀라도 경제력에 차이가 있는 데도요? 제가 알기론 막내분이 사정이 여의치 않는 걸로 아는데.”
“사실 이런 부분에 관해선 저희 아버지는 얄짤 따윈 없는 완고한 분이셨습니다. 어떤 자식이 사정이 안 좋다 해서 특별히 편의를 봐준다거나 하는 분이 아니었죠. 거기다 똑같이 분배가 된다 해도 동생에게 가는 재산이 결코 적지가 않습니다.”
“그럼 다른 특이점은 없었나요? 유산과 관련해서.”
“으음.”
대빈이 콧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한다.
“……그날 어머니께서 저하고 경미한테 만약에 저희 상속분 중 막내 동생이 원하는 게 있다면, 교환을 해준다거나 혹은 양보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긴 했죠.”
“그래서요?”
“동생이 그냥 괜찮다, 상관없다 해서 유야무야 넘어갔죠. 앞서 얘기했지만 대주가 받게 되는 재산이 애초 적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인지 걔 스스로도 별 불만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더 없나요?”
“또 어머니께서 본인이 받을 재산을 막내에게 그대로 넘기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셨나요? 아버지가 상속법에 따라 재산 배분을 했다면, 어머니가 받은 상속 재산이 심사장님보다 절반 더 많았겠군요. 배우자가 자녀의 일쩜오(1.5)배를 받게 돼있으니깐. 만약에 어머니 의사대로 그 상속분을 막내분이 받았다면 형, 누나의 두 배 반이 됐겠군요.”
“하지만 결국 그렇게는 안 됐죠.”
“왜죠?”
“제가 결사코 반대했거든요. 애초 그 녀석이 받을 재산이 적지 않은데 당장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반대를 했습니다. 거기에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시에는 어머니 명의의 모든 재산이 녀석에게 가기로 돼 있었거든요.”
“어머니의 유언장은 그렇게 돼 있었다는 거군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마음이 여리고 잔정이 많은 분이셨거든요. 아버지와 달리요. 어머니는 언제나 대주를 불쌍히 여기셨죠.”
“그런데 어머니가 그런 얘기들을 나눈 직후에 사망을 한 거군요. 그러면 어머니 재산은?”
“당연히 대주에게 갈 겁니다. 이미 상속 절차를 밟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대빈이 물잔을 들어 목 안을 축인다. 대빈과 화가 잠시간 입을 다물고는 서로의 눈을, 그냥 곁에서 보면 마치 노려보듯이, 의미심장하게 마주 본다. 라영은 대빈의 얘기를 수첩에 글로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두 남자 사이의 고요 속에서 그녀의 끄적이는 소리만이 들린다.
이윽고 화가 다시 입을 연다.
“그럼 다음으로 어머니가 어디서 생활할 것인가라는 건 어떤 얘기였나요?”
“그거야 나이 드신 양반이 홀몸으로 살기는 위험하고 힘들지는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집도 혼자 살기엔 큰 편이고. 그래서 저희 남매가 서로 돌아가면서 모시고 살겠다고 했죠.”
“해서 어머니가 어떻게 답하시던가요?”
“뜻밖에도 어머니가 고집을 부리시더군요. 도저히 집을 떠날 수가 없다고. 본래 완고하고 그런 분이 아니셨는데. 저희들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결국 집에 남기로 하신 거군요.”
“네. 근데 그러겠다 해놓고는 몇 시간도 안 돼 세상을 떠나 버리신 거죠. 그래서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자살이란 게. 정말로 자살할 거였다면 자식들에게 그런 얘길 할리가 없죠. 안 그렇습니까?”
화가 마지막 질문에는 굳이 답하지 않는다.
“근데 그런 얘기들을 다소 늦게 한 건 아닌가 싶군요.”
“늦게라뇨? 무슨 뜻입니까?”
“유산 상속이라든지 홀어머니를 모신다는 건지 그런 얘기라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에 했어야지 않습니까?”
“아하.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일주일 뒤에 같이 모여서 그 얘기를 이미 나눴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정리하자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주일 뒤에 첫 번째 모임이 있었고, 그 이후 어머니가 죽기 직전에 두 번째 모임이 있었던 셈이죠.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겁니다.”
“그래요?”
화가 이에 모종의 흥미를 느낀 것인지 한 손으론 턱을 괴고, 다른 손의 집게손가락으로는 좌탁을 탁탁 두드린다.
대빈과 라영이 의아해하며 그런 그를 잠시간 바라본다.
머잖아 그가 질문을 재개한다.
“첫 번째 모임과 두 번째 모임이라 하셨는데, 그때 모이신 분이 어머니와 사장님을 포함한 세 자녀분 이렇게 동일했습니까?”
“네, 그랬죠.”
“그 사이에 어머님을 뵌 적은 없고요?”
“아뇨. 바빠서 자주는 못 갔지만 잠깐이라도 댓번 정도는 찾아뵈었죠. 다만 우리 남매 셋이 다 모이기가 힘들었죠. 서로 사정들이 있다 보니.”
“그런가요? 그렇다면 첫모임과 둘째모임 각각 날짜가 어떻게 됐나요?”
“어디 보자.”
그가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에 달력을 띄어 보면서 되짚는다.
“두 번째 모임이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전날이니 십일(11)월 삼십(30)일이고. 첫 번째는…… 으음. …… 그건 십일(11)월 오(5)일이었군요.”
“확실한가요?”
“네. 확실합니다.”
대빈이 화면 속 달력을 다시 점검하면서 고개를 끄덕대며 답한다.
“그러면 그 첫째 모임하고 둘째 모임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었나요?”
“차이점이라고요?”
“아무거라도요. 가령 이때는 이런 종류의 얘기를 나눴다라든가.”
“그게 글쎄요.”
대빈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특별한 차이는 없었던 듯하군요. 사실 첫 번째 모임 때 결론을 못 내린 얘기를 두 번째 모임에서 이어서 논의를 한 셈이거든요. 두 모임 모두 거의 비슷한 내용에 관해 얘길 나눴습니다.”
“그러니까 유산 문제와 어머니의 거주지 문제를 첫째 모임에서부터 의논을 했는데 당시엔 결론이 안 났고, 다음에 모였을 때에서야 비로소 결론이 났다. 이렇게 봐도 되겠습니까?”
“딱 맞는 말이군요. 그래요. 두 번째 모임 때에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게 그나마 차이점이겠네요.”
“그러면 당시에 가족끼리 나눈 이야기 말고, 여느 때와는 이게 달랐다던가 아니면 특정한 뭔가를 했다든가 한 기억은 없습니까?”
“그렇게 물어보시면 어떻게 답해야할지……”
“아무거나 떠오른 대로 얘기하시면 됩니다. 그냥 지금 막 기억나는 대로요.”
“그러시다면. 그날 동생들이 도착하기 전에 제가 어머니 집에서 필요한 몇 가지 일을 좀 하긴 했죠.”
“어떤 일들이었죠?”
“아버지 유품 정리였습니다.”
“유품 정리요? 아버지 사망 직후에 하신 게 아니고요?”
“네. 그게 제가 당시 워낙에 바빠서 말이죠. 입찰건이다 뭐다 해서 눈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다른 동생들도 시간 없기는 매한가지였고요.”
“그럼 그날 정리한 유품들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우선 아버지 의복들하고 운동도구들. 참고로 아버지는 골프나 테니스를 포함해 여러 운동을 좋아하셨거든요. 나이가 들어선 자주하실 순 없었지만. 이외에 본인이 오래 소장해 오신 서적들. 그리고 지금은 전혀 쓸모없는 옛날 서류라든지 잡동사니들도요. 참 정리할 게 이것저것 많았죠.”
“그 많은 걸 혼자 다 정리한 겁니까?”
“아니요. 사실은 그것들 전부를 제가 다 직접 정리한 건 아닙니다. 어머니가 미리 틈틈이 정리를 해서 따로 놔두시고, 저하고 동생들이 와서 그 중 아직 쓸 만한 건 챙기고 소용없는 건 버리는 식으로 처리를 했죠. 다만 그날은 저만 좀 더 일찍 와서 필요 없어 보이는 물품들을 분리수거장에 가져 가 정리했죠.”
“분리수거장이요?”
“네. 아파트 분리수거장이요. 거기서 쓸모없는 옷은 수거함에 넣고, 오래된 서류들은 종이박스에 담아 놔두고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은 플라스틱이나 철물 등으로 분류했죠. 그것만도 양이 워낙 많아서 세 번이나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유품들을 정리하고 처분도 하시면서 특별하다거나 아니면 의아하다고 느낀 건 없었나요?”
“글쎄요, 그다지. 굳이 얘기하면 ‘유품이 참 많구나.’ 이 정도.”
“네.”
대빈이 다시 폰을 들어 화면을 들여다본다. 아마도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유품 정리 말곤 다른 걸 하신 기억은 없나요?”
“으음. …… 난에 물을 줬던 것도 기억이 나는군요.”
“난이요?”
“네, 난초요. 아버님이 난초 기르시는 게 취미셨거든요. 근데 아실지 모르지만 난을 기른다는 것이 생각보다 꽤 까다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 난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 중이셨죠. 그래도 당장 집에 있는 걸 말라죽게 내버려 둘 순 없으니까 제가 물을 주면서 상태도 체크했습니다.”
대빈이 말을 마치자 잠시간 다시 침묵이 흐른다. 이윽고 대빈이 화와 라영의 얼굴을 둘러보고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이제 더 이상 마땅히 얘기할만한 건 없어 보이는군요. 근데 이런 얘기들이 필요는 합니까? 일전에 이런 건 말한 적이 없는데.”
“어쩌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요? 그렇다면은야.”
똑똑.
“응.”
문이 열리고, 아까처럼 여직원이 머리를 내민다.
“곧 가셔야 할 시간인데요.”
“시간이 됐군요. 남은 얘기는 저녁에 마저 하도록 하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네, 하세요.”
“사장님은 어머니가 죽은 진짜 원인이 밝혀지길 진정으로 바라십니까?”
“그야 당연하죠.”
“정말인가요?”
화가 힘을 주어 또박또박 다시 묻는다. 이에 두 남자가 서로를 빤히 쳐다본다.
“무슨 의민지 알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 진실이 밝혀지길 바래요. 어머니의 죽음이 자살도 타살도 아닌 그저 사고라는 진실이 말이죠.”
대빈이 일어나 옷을 매만지면서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어차피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이미 돌아가 버리셨는데. 원인이 사고사건 자살이건 심지어 살인이건 어차피 돌아오실 것도 아닌데. 어쩌면 그 진실이란 게 우리에게 좋은 게 아니라면, 모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이 세상엔 모르는 게 약인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이만하면 됐습니까?”
“네.”
화가 간결하게 한 단어로 답한다. 라영이 때맞춰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녹음을 정지시킨다. 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