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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성 ‘심경미’는 가정주부다.
이른 나이에 결혼한 그녀는 어느새 장남이 한두 해 후(後)면 성년이 되는 나이가 됐다. 어찌 보면 지금의 그녀는 파릇파릇한 청춘에서 주름살지고 나잇살도 든 일개 주부로 변모했지만, 그럼에도 본인에 대한 프라이드는 언제나 하늘을 찔렀다.
그냥 주부가 아니라, 잘 나가는 의사 남편을 둔 주부이기 때문이다.
주위에선 그런 그녀를 남편 덕에 호의호식하는 여편네라고 쑥덕거렸다. 어떤 동창년은 모임에서 질시 어린 어투로, 요새 유행하는 ‘금수저’라는 단어에 빗대, 자신을 ‘금(金)주부’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하긴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뿐만인가. 결혼이 대박 났다. 결혼으로 인생 폈다. 여자 팔자는 공부보단 시집이다. 등등. 자신을 시기하는 말들을 면전에서 은근슬쩍 뱉어 내기도 했다.
불쾌하기 그지없는 말들을. 일부러 기분 나쁘라고. 그것도 같은 여자들이. 열등한 계집들.
사실 자신의 풍족한 삶은 온전히 남편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혼 이전에 그녀의 친정 쪽 재력이 더 풍부했으니까. 남편이 현재 잘 나가는 개인병원 원장으로 있는 것도 그녀 집안의 부동산과 자금력 덕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이가 의사가 된 건 본인의 재능과 노력 덕분인지 몰라도, 그런 의사들 중에서도 돈 많이 버는, 소위 탑(top)닥터(doctor)가 된 건 엄연히 말해 부자 집안의 아내인 그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덕을 보는 건 남편 이전에 재물이 넘친 아버지였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금주부’ 이전에, 최근 유행 중인, ‘금수저’라는 표현이 더 딱 알맞으리라.
의사 아내인데다 잘난 의사인 남편에게도, 더 잘난 친정 덕에, 휘둘리지 않는 위치. 이 정도라면 주부라도 여자로서는 최고로 만족스러운 위치 아닌가?
아니, 주부가 아닌 사모님. 그것도 금(金)사모님이 어울릴 것이다. 금(金).사.모.
그런데 이 잘나신 금사모에게도 골칫거리는 있었다. 돈으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존재. 바로 자식이었다.
그것도 그 자식이 입시를 앞둔 고3이라면 더 따지고 자실 것도 없다. 재력이건 정성이건 간에 자식 교육 문제에는 도무지 정답이 없다.
아버지가 명색이 의사인데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질 않는다. 그이처럼 의대를 보내고 싶은데, 성적이 딱 그 아래 수준이다.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녀석이 아비보단 어미를 닮았나 하고 자책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자식의 학업에 관해 무척이나 열성적이었다. 어찌 보면 본인의 학력이 신통치 못한 것에 대한 한(恨)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의사가 된 남편이나 기업을 일군 오빠에 비해 뭔가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따른 욕구 해소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잘난 사모님조차도 고3을 관리한다는 건 꽤나 고된 일이었다.
그녀 때는 수능만 보면 다 끝이었는데, 요즘은 ‘수시다.’, ‘자기소개서다.’, ‘논술이다.’, ‘면접이다.’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수능과 논술 등을 치르는 와중에 큰 상(喪)을 두 번이나 연달아 당했다.
거기다 지금은 입시 문제로 골치 아파 죽겠는데, 죽은 어머니 문제가 그녀의 머릿속을 더욱 지끈거리게 한다.
불행은 몰아서 온다더니 딱 그 꼴이다. 오빠가 몇 차례나 그런 식으로 푸념을 해댔다. 그도 요새 정신이 없긴 매한가지니까.
착하고 자식을 위한 어머니였지만, 끝에 가선 자식의 속을 썩혔다.
오빠는 자살이 아니라 믿는 듯하지만, 아니 ‘믿기’보단 ‘믿고 싶은’이란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경미 그녀는 정황상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오빠는 재산이 많은 어머니가 뭐가 아쉬워 자살을 하겠냐고 단순히 넘겨짚었다. 돈 밖에 모르는 그다운 안일한 생각이다.
사실 어머니는 착해도 지나칠 정도로 착했다. 그것도 너무 착해서 짜증이 날 정도로.
특히 그런 그녀가 다 큰 동생 대빈을 다른 거 다 제쳐두고 매번 챙기려 드는 걸 보면 가관이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미운 자식이기 보단 못난 자식이지만, 막내가 불쌍하다고 하면서 자기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듯한 행보들은 참으로 꼴사나웠다.
그날도 그랬다. 막내가 형, 누나에 비해 못 사니까 동생이 원하면 상속 재산 중 일부라도 양보해 줄 수 없겠냐고 했다. 심지어 자기 상속분도 고스란히 막내에게 바치려 했다.
막내는 중고등학교 시절 문제아였고, 성적도 별로였고 진학 문제로 부모님의 애간장을 타게 했다.
그것들뿐만 아니다. 커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돈 문제, 여자 문제 등으로 수차례 그들을 괴롭게 했다.
최근에는 결혼 문제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다퉜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런 것도 자식이라고 일일이 신경 쓰며 배려하고 챙겼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대쪽 같은 분이셨다. 막내의 막장 짓거리에 한 치의 타협도, 일말의 용서도 없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매몰찬 분이었지만 자식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 오히려 어머니가 정(情)이라는 걸 앞세워 자식들을 차별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가급적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평소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슬퍼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아버지가 떠나시고 어머니가 얼마나 쓸쓸했을지를 떠올리면 자꾸만 후회가 됐다. 그 일이 있기 전에 좀 더 자주라도 뵈었어야 했다고.
하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당시 고3짜리 아들이 수능을 코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이후에도 2주 정도는 더 논술시험과 면접을 준비해야 했으니.
그래도 어머니의 마지막이 그리 된 건 여전히 편치 못했다. 아니, 평생 회한으로 남을 것이다.
한편, 평생 섭섭하리라 생각되는 것도 있었다.
솔직히 어머니의 유산 상속 조치는 꽤나 서운했다. 그 못된 막내 대주 놈이 어머니의 재산을 날름 독차지하다니 배알이 꼴리기 그지없었다.
지금에 와선 그 놈이 어머니를 죽인 건 아닐까 상상하기도 한다. 걔는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니까.
아니면 마음 약한 어머니가 투신을 한 건 아닐까?
사실 정이 많다는 건,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마음이 여리고 약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 안 듣는 막내에게 상처를 받아 그녀가 우발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단, 사고 전에 뵈었을 땐 그럴 기색은 전혀 없었다는 게 걸리지만. 오빠도 이를 근거로 자살이 아닐 거란 주장에 힘을 주지만.
그러나 여성의 관점에서, 그녀 자신도 그렇지만, 언제든 홱 돌변할 수 있는 게 여자라는 생물 아닌가?
변덕스러워지기 쉬운 여성의 심리와 지나칠 정도로 지고지순한 어머니의 나약한 심성을 고려한다면, 자살을 못할 거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에 하나 자살이 맞다면, 가장 큰 책임은 막내에게 있으리라.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다.
여하튼 어머니의 죽음은 십중팔구 그 싹수없는 동생 놈 때문이리라. 그것이 그녀가 추정하는 전말이었다.
한편,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살일 거라 짐작은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자살이라 대놓고 함부로 뱉어내진 않았다. 더욱이 현재 ‘불편한 손님들’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처지에서 말이다.
그녀는 고급진 인테리어를 갖춘, 드넓은 거실에서 불편한 손님 둘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ㄴ’자형의 커다랗고 값비싼 카우치 소파에서 짧은 지점엔 본인이, 긴 위치에는 상대 남녀 한 쌍이 서로를 비스듬히 보면서 앉아있다.
참 어울려 보이지 않는 커플이다. 이들을 마주한 그녀의 관점에서 말이다.
‘근데 진짜 커플일까?’
여자는 시원스레 생긴 외모에다 그녀가 시기를 느낄 만큼 예쁘장하다. 나아가 겉에서 풍기는 인상이나 입에서 나오는 어투를 보면 성정(性情)이 똑 부러진 것으로 느껴진다.
‘마치 미녀와 야수 같네.’
상대녀가 명백한 미녀라면 그 옆 남자에게서 단번에 느껴지는 인상은 ‘야수’였다. 턱수염에, 콧수염에, 구레나룻까지 얼굴을 둘러치고 있는 수염이 마치 사자의 갈기 같다. 수염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매도 포식자처럼 사납다. 거기다가 몸 전체에서 풍기는 느낌 또한 왠지 거칠다. 신체 곳곳에서 아우라가 뿜어 나오는 듯하다.
처음엔 그의 수염이 너저분하게 느껴졌지만 몇 차례 보니 그래도 나름 꼼꼼하게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털들 너머 얼굴은 곡선이 미끈한 것이 안은 잘생긴 것으로 으레 짐작이 간다.
‘수염만 밀면 제법 미남이겠는데.’
본인은 뜨끈한 녹차를, 상대는 물만 들고 있다. 얘기를 나눈 지 어언 반시간 정도 된 듯하다.
보험조사관이라는 이들은 오늘 저녁에 보기로 해놓고는, 임과장이 사전에 연락을 해줬지만, 미리 대낮에 가정집에 들어와 다짜고짜 질문을 해댔다. 떠올리기가 유쾌하지 않은, 어머니의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는 사실 염려했다. 자살이면 어쩌나 하고. 자신은 그럴 거라 속으로 추정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라 증명되는 건 두려웠다.
추정과 증명은 다르니까. 추정에는 ‘여지(餘地)’가 있지만, 사실에는 그게 없으니까. 진실을 외면할 수 있는 여지가.
혹여나, 만에 하나 진짜로 자살이라면 어머니는 자식에게 못된 부모일 것이다. 그녀의 목숨도 목숨이지만, 부모가 자살했다는 사실에 남은 자식들은 여생을 어찌 편히 살 수 있겠는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내동댕이친 것만 아니라 더불어 부모가 자식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셈 아닌가?
자식 진학 문제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정말 자살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나아가 자살일 경우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는 번뇌(煩惱)가 그녀의 가슴팍과 머리통을 옥죄였다.
그래서 사람을 정신적으로 지치게 하는 이런 조사가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다. 그들이 얘기한 대로 부디 오늘 저녁에 결판이 나길 원할 뿐이다. 아무튼 좋은 쪽으로. 모두에게, 살아있는 자들에게, 최소한 그녀와 그녀 가족에게.
“전 크게 상관 안 했어요. 아버지가 돈에 관해선 철두철미 하셨거든요. 사업가인 오빠보다도 더. 그래서 전 아버지의 유산 배분에는 털끝만큼도 불만이 없었어요. 게다가 제가 명색이 잘나가는 성형의 원장 사모인데 돈이 무슨 걱정이겠어요? 제 명의로 재산도 많고. 사실 문제는 어머니였죠. 아버지가 유언한대로 하면 될 것을 쓸데없는 생각으로 분란을 야기한 거죠. 자기 딴엔 막내를 배려한단 거였겠지만.”
경미가 한창 이야기를 풀고 있다. 그녀가 긴말을 마치자 화가 곧바로 묻는다.
“그럼 그때 경미씨도 반대를 한 겁니까? 어머니 서순하씨가 자기 상속분을 막내 심대주에게 넘기겠다는 의견을요? 오빠 심대빈씨처럼.”
“네. 저도 똑같이 반대했어요. 오빠가 그걸 앞장서서 막았을 때 얼마나 통쾌했는지.”
“근데 당시엔 동생분도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나요?”
“속은 그게 아니었을 걸요. 녀석이 얼마나 음흉한 놈인데요. 오빠하고 제가 반대하니 어차피 안 될 걸로 보고 그런 거겠죠.”
“그래요?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어머니 몫은 결국 동생에게 갔죠. 본래 어머니 명의의 재산과 함께.”
“네. 그래서 지금도 짜증나요. 그 많은 재산이 자격 없는 놈한테 갔으니. 뭐, 저야 아쉬울 건 없지만.”
“동생을 싫어하군요?”
경미가 흠칫한다.
“그렇게 보였나요? 그야 당연하죠. 싫어 할 수밖에 없는 놈이에요. 어릴 태부터 지금까지도 철이 안 드는 놈이죠. 못난 놈.”
“뭐가 불만인 거죠?”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어려서부터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고, 평소엔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허다하면 가족한테 반항이나 해대고, 심지어 착한 어머니한테도 그랬죠. 공부도 못하고 별다른 재능도 없으면서 가족들 속은 잘도 썩혔어요. 그리고 여자문제. 카사노바가 따로 없어요. 아니, 카사노바가 아니라 호구라는 게 정확하네요. 뱀 같은 여자들한테 얼마나 뜯겨 왔는지. 요 근래엔 나보다 나이 많은 연상녀한테 붙들려선 이것저것 돈이나 써대고. 그것두 물장사하는 년인데 그나마 다행히 얼마 전에 헤어졌더라구요. 정신 나간 놈이 그동안 그 썅년한테 얼마나 갖다 바쳤는지. 그게 지 돈이에요? 다 아버지 돈이지.”
경미가 주야장천 해댄 말을 그치고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앞에 놓인 머그잔을 들어 속에 든 녹차를 홀짝여 혀와 입천장을 축인다.
“아버지, 어머니가 오빠하고 저와 달리 막내라고 지 하고 싶은 대로 풀어서 키운 게 화근이었죠. 아버지 돈하고 어머니의 착한 마음을 믿고서 여태 날라리·망나니로 살아놓곤 결국 유산으로 돈방석이니. 내가 할 말인가 싶어도 세상은 정말루 공명정대하진 않아요.”
“그럼 유산 문제하고 동생 얘긴 이쯤에서 됐고, 어머니를 모시는 문제에 대해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말해 주시죠.”
“그건 오빠가 혼자 먼저 얘기한 거예요. 나와 상의 없이요. 사실 오빠도 그래요. 별생각 없이 뱉어냈겠지만 저는 여건상 어머니 모시기가 그러죠. 고삼(3)수험생 아니 입시준비생을 둔 학부몬데, 거기다 밑에는 내년에 고등학교 입학하는 딸내미도 있고요. 설사 어머니가 오빠 제안을 받아들였어도 저는 나중엔 반대할 요량이었어요. 최소한 저는 안 된다고 할 생각이었죠.”
“그럼 당시엔 직접 반대하는 말은 했나요?”
“아뇨. 어머니가 오빠 의견에 바로 반대 의사를 비치셨으니까요. 굳이 제 의견을 말할 필요까진 없었죠.”
“막내는요? 아무 얘기 없었나요? 당신처럼.”
“그래요. 걔도 별말 안 했어요. 다만, 어머니가 집에 계속 있겠다 한 뒤에 오빠가 그 녀석에게 당분간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게 어떠겠냐 물어봤죠. 오빠와 저는 결혼도 진즉 했고 딸린 자식들도 있지만, 걔는 그 나이에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으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연로하시고 홀로 지내면 쓸쓸하고 할 테니까 잠시 함께 지내라고 했는데, 단칼에 거절하더군요. 책임감 없는 놈. 아들들이 그래요. 오빠는 사려심이 없고, 동생은 책임감이 없고. 제가 딸이고 같은 여자니까 그나마 어머니를 챙겨드렸죠?”
“그런가요?”
곁에서 수첩 종이 위로 필기 중이던 라영이 그녈 향해 대뜸 입을 연다.
“그러면 따님으로써 어머니를 어떻게 챙겨주셨나요?”
라영이 따지듯이 질문을 던지자 경미가 잠깐 당혹해한다. 그러나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며 차근히 답한다.
“시간 날 때마다 낮에 몇 번 찾아 뵜어요. 저야 일단은 주부라 낮시간은 좀 여유가 있으니까. 먹을 것을 사 드리거나 싸 가서도 하고, 꽃도 몇 차례 사 가져가고, 화단 관리도 도와드리고.”
“꽃하고 화단이라고요?”
화가 질문자의 배턴(baton)을 라영에게서 바로 되가져온다.
“네. 아파트지만 베란다에 작은 화단이 있어요. 거기서 꽃 가꾸는 게 어머니 취미였거든요.”
“아버지는 난 기르시는 게 취미였다고 하던데?”
“네. 아버지는 난을 좋아하고, 어머니는 꽃을 좋아했죠.”
“그러면 방금 전 만난 오빠 심대빈씨가, 사건 벌어지기 직전 날, 아버지가 길렀던 난에 물을 줬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난에 물을 줬다는 게 중요한가요? 어쨌든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제가 가족들 중 젤로 늦게 도착했거든요. 얘들 저녁을 챙겨주고 오느라. 그치만 오빠가 그리했다 한다면 그랬겠죠. 가족 중에 난을 관리할 수 있는 건 돌아가신 아버지와 오빠뿐이니까.”
“그럼 난은 됐고, 늦게 도착했다니까 그날 대빈씨가 아버지 유품들을 분리수거 한 것도 못 봤겠군요?”
“네. 하지만 그것도 하긴 했을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유품들을 쌓아 놓는 방이 거의 비어 있었으니까요.”
경미가 재차 말을 멈추고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입을 계속 쉬지 않으니 진이 빠지네요. 제가 말을 하면 길게 하는 편이거든요. 이만 좀 끝냈으면 좋겠네요. 저녁에 또 봐야잖아요. 어머니 집에서.”
“서너 개만 더 하고 마무리하죠.”
“좋아요.”
그녀가 차(茶)로 한 번 더 입과 목을 적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세 남매분이 모인 거 말고도, 아버지 장례 후에도 똑같은 모임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경미가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서 곰곰이 기억을 짚어본다.
“어머니와 남매 세 분만 모인 것 말입니다.”
화가 부연 설명한다.
“네. 맞아요. 그랬어요.”
“혹여 그 두 날 간에 특별한 차이가 있었습니까? 심대빈씨는 비슷한 얘기를 이어서 나눴다는데.”
“으음.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전혀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요?”
“특별히 딴 얘기는 안 했던 거 같아요. 사실 아버지 일 이후로 만났던 때는 기억이 자세히 안 나요. 거의 두 달 전 일이라. 글고 가족 모임이란 게 나이가 들면, 시시콜콜한 애기보단 꼭 필요한 얘기만 하게 되잖아요. 평상시엔 본인 가족 일에 더 신경을 쓰니까.”
“그날 결론 못낸 걸 이후 모임에서 냈다고 하던데 맞나요?”
“오빠가 그러던 가요? 네. 생각해보니 그런 거 같네요.”
“그럼 당시 가족 모임에서 뭔가 이상했다거나 인상적이었던 일은 없었습니까? 아무거라도 괜찮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는다.
“딱히는 없었어요. 그래도 굳이 기억에 남았던 게 있다면 어머니의 얼굴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제가 어머니를 탐탁지 않게 여기긴 하지만, 그날 저녁에 얼굴을 보니 안쓰럽더군요. 수척해 보이는 피부에, 주름살에, 더 늘어난 흰머리에. 아버지가 떠나시고 금세 십년은 더 늙어버린 거 같았어요.”
“그 외에 어머니한테 다른 이상은 없었고요?”
“예. 나머진 별다를 게 없었죠.”
“근데 그날 만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보름이 자나도록 안 만났다가.”
“아, 어머니가 그 전날에 전화를 하셨어요. 저희들이 보고 싶다고. 가족들끼리 모여 함께 얘길 나눠보자고.”
“그런 거였나요? 어머니가 무슨 이상이 있어서 전화를 한 건 아니구요?”
“그건 아니에요. 그런 전화는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자주 거셨으니까요? 아마도 혼자 집에 사시니까 쓸쓸해서 그러셨을 거예요. 그리고 그날은 그나마 저나 오빠, 동생 다 여건이 되서 모이는 게 가능했죠.”
경미가 또 다시 말을 쉬고선 이번에도 잔을 드나 손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시던 차가 어느새 다 떨어졌다. 반면, 상대 남녀의 물컵들은 절반도 안 떨어져 있다.
“이제 다 끝났나요?”
“이만하면 된 듯합니다.”
빈 잔을 만지작대며 흘끔 벽시계를 살핀다.
“곧 딸이 올 시간이네요. 이만 가주시겠어요? 자식들한텐 들려주기도, 티도 내고 싶지 않은 일이니까.”
“예, 그럼.”
화가 일어나자 라영도 같이 몸을 일으키면서 좌탁 위에 둔 녹음기를 챙긴다. 따라 일어나는 경미에게 화가 추가적인 질문을 건넨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죠. 경미씨는 진상이 밝혀지길 바라십니까?”
“진상이요? 그거야 당연히 밝혀져야 하겠죠.”
근데 말끝을 조금 흐리게 발음했다. 그녀가 곧장 첨언(添言)을 한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그 진상이란 게 정말로 드러날까 두렵기도 하네요. 차라리 이대로 꽁꽁 감춰졌으면……”
말미의 마디들은 혼잣말을 읊조리듯 뱉어낸다.
“좀 밝혀진 게 있나요?”
“아직은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일단 저녁에 뵙죠.”
화가 목례를 하고 뒤돌아서자, 이에 맞춰 라영이 집어든 녹음기를 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