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파리한 얼굴의 젊은 여자 ‘일애’가 촉촉한 눈으로 부르짖는다. 그녀는 주방 안 식탁 의자에 앉아 있다.
“진정하세요.”
맞은편에 있는 다른 젊은 여인 ‘라영’이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달랜다. 한편, 그녀 뒤에 서 있는 얼굴에 수염이 수두룩한 청년이 이어 말한다.
“그래요. 우리도 알아요. 당신이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거짓말을 하는 건 당신 머리죠.”
그러면서 자신의 머리 옆 부분을 콕콕 찌르는 그.
“무슨 말이에요?”
“그들이 그렇게 한 거지만 당신이 원한 거죠.”
“도대체 무슨 소리냐구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뱉는 일애. 하지만 청년은 그 어떤 흐트러짐 하나 없이 말을 계속한다.
“그들이 당신을 바꿨어요.”
“네? 도대체 무슨……”
“당신의 ○○은 ○○됐습니다.”
일순간 모두가 고요해진다. 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녀의 얼굴이 아연해지고 몸은 뻣뻣이 굳는다.
***
몇 시간 전.
…… 딸깍. …… 딸깍. …… 딸깍.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만이 간격을 두고 들려온다.
딸깍. …… 딸깍. ……
소리의 간격이 조금씩 짧아진다.
…… 딸깍. …… 딸~깍~.
이윽고 마지막으로 한 번 길게 울리더니 소리가 그대로 멈춘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이내 중저음의 나긋한 남자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온다.
“이일애씨?”
다시 한 번 들린다.
“이일애씨?”
***
눈을 뜬다. 2인용 침대에 홀로 누워있던 여성이 막 잠에서 깼다.
서른을 갓 넘긴 듯한 여자, 이일애. 얼굴이 제법 야위고 안색은 다소 어둡다. 거기다 눈 밑엔 다크서클이 나 있다.
혹시나 하고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나 침실 안엔 쓸쓸히 그녀만 있을 뿐이다.
‘꿈이었나? 그 목소린 누구지? 최근에 들어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일애가 이불 안에서 천천히 양손을 꺼내더니 깍지를 낀다. 그러고는 얕은 신음과 함께 두 팔을 크게 기지개를 켠다.
이후 눈을 비비면서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보는 일애. 10시 26분.
그 시계 옆으로 작은 액자가 하나 있는데, 이상하게도 안에 사진이 없고 텅 비어만 있다.
***
쏴아아! 샤워기 헤드에서 물이 세차게 뿜어져 나온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일애가 큰 목욕수건 하나만을 달랑 두른 채 샤워기를 이용해 바닥을 청소하고 있다.
샤워를 한지 얼마 안 됐는지 아직 젖어있는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목욕수건 위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맨살엔 물기가 아직 번드르르 남아있다.
‘빨리 끝내야겠어. 곧 그 여자가 올 거야.’
서둘러 바닥을 물로 쓸어내리는 일애. 그러던 중 흰 바닥타일 하나에 그녀의 눈이 간다. 다른 타일들과 달리 색이 유난히 밝다. 그것만 새 거인 듯하다.
‘이 타일……’
일애가 골똘한 눈으로 유심히 바라본다. 한동안 가만히 그 타일을 뚫어져라 보기만 하는 그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더니 불현듯 한 장면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
똑같이 젖은 머리를 하고 있는 과거의 일애. 대신 입고 있는 옷은 다르다. 속옷 위에 헐렁한 민소매 셔츠만 달랑 걸치고 있다. 물인지 땀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셔츠와 맨살이 흠뻑 젖어있다.
그런데 똑바로 서 있는 일애의 팔 자세가 특이하다. 두 손을 손바닥이 위로 보이게 해 앞으로 내민 상태에서 팔꿈치는 오므리고 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모양새다. 허나 그 양손 위엔 엉성하게 접힌 작은 하얀 수건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별안간 일애의 몸이 순간 기우뚱 하더니 그대로 욕실 바닥을 향해 쓰러진다! 비눗물로 뒤덮인 바닥에 그만 발이 미끄러진 것.
손에 들고 있던 흰 수건이 스르륵 빠지더니 쓰러지는 일애 눈앞으로 팔랑거리며 떨어진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일애는 위급한 순간에도 절박한 얼굴로 그 수건을 향해 손을 내뻗는다.
쾅! 쩍! 수건에만 신경 쓰느라 일애의 옆머리가 타일 바닥에 그대로 세게 부딪힌다. 얼마나 강하게 부딪혔는지 닿은 타일이 바로 쪼개졌다. (현재 새로 바뀌고 지금의 일애가 살폈던 그 타일의 위치이다.)
머리가 바닥에 충돌한 상황에도 두 눈을 크게 뜨고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는 일애. 그러나 그녀에게 보이는 건 욕실 문 앞에 홀로 떨어진 그 수건뿐.
이제야 충격이 전해졌는지 눈의 초점이 흐려지면서 그녀의 눈꺼풀이 닫힌다.
***
하아, 하아……. 현재의 일애가 뜻밖의 떠올림에 엄청 놀란 듯 얼떨한 얼굴로 숨을 몰아쉰다.
‘도대체 뭐지? 왜 그 일이 느닷없이 떠오른 거지?’
쏴아아……. 넋이 나간 일애의 손에 들린 샤워기에선 아직 물이 나오는 중이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일애가 재빨리 샤워기를 끈다.
샤워기 헤드를 제자리에 걸어놓고, 세면대로 가 거울을 보더니 옆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 살짝 들어 올린다. 머리카락 사이로 머리가 자라지 않는 짧은 빗금 형태의 상처자국이 보인다. 과거 타일에 부딪쳤던 부위다.
‘그때 다친 거였지. 근데 그동안 잘 생각나지 않았던 게 왜 지금 와서 갑작스레 떠오른 걸까? 왜 이때에? 그리고 넘어지면서 왜 손을 뻗었지? 수건 때문에? 바닥에 머리를 박는데 수건 하나 잡을려고?’
그러면서 옆에 걸어진 수건을 본다. 마침 당시와 같은 수건이다. 그러나 그저 흔한 수건일 뿐이다.
♪~~♪~~♪~~. 갑작스레 어디선가 휴대전화가 울린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방금 보던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닦는다. 그리고선 역시 방금 봤던 거울을 손으로 대고 옆으로 민다. 그러자 거울로 된 미닫이문이 드르륵 옆으로 이동하더니 안에 있던 수납장 공간이 나타난다.
안에 놓인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는 그녀. 발신자명이 ‘내 동생 희애’라고 떠 있다.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동생이 오늘 중요한 손님을 데리고 오니까.’
통화 표시를 터치하고 폰을 귀에 갖다 댄다.
“응, 그래. …… 이십분 뒤에 도착한다고.”
***
♪~~♪~~♪~~. 현관벨 소리가 큼직하게 울린다. 이내 소리가 멈추더니 띠리리리리, 스르륵, 철컥 소리들과 함께 현관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 앞 아파트 복도에 젊은 여자 둘이 나란히 서 있다. 일애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좀 더 어린 동생 ‘희애’와 그 옆으론 희애와 또래로 보이는 ‘라영’이 있다.
특히 라영은 훤한 얼굴과 영롱한 눈망울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인이다. 거기다 우아한 캐주얼 옷차림에 한쪽 어깨에는 세련되고 큰 숄더백 하나를 걸치고 있다.
현관에서 문을 연 일애가 반가운 얼굴로 이 둘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녀의 수척한 얼굴 때문이지 몰라도, 그 미소가 억지스레 꾸민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선 일애가 동생 희애에게 말을 건다.
“왔구나. 잘 지냈지?”
“응.”
희애가 약간 떠름하게 답한다. 어딘가 태도가 시원치 않은 느낌이다.
“이라영 씨 맞지요? 이일애라고 해요.”
일애가 손을 내밀자 라영이 차분히 그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눈다.
“동생 희애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이후 일애가 앞장서면서 라영과 희애가 같이 거실로 따라 들어온다. 거실이 아주 넓다. 보면 아파트 평수가 족히 50평은 넘을 듯하다.
일애가 라영을 보며 거실과 방들을 각각 가리키며 일일이 알려준다.
“여기는 거실, 여긴 주방, 저기는 큰 방 작은 방, 저긴 작은 방 두 개.”
그러면서 자연스레 거실 창 쪽으로 다가가는 그녀.
“전망도 좋구요.”
거실의 한 면 전체가 탁 트인 창으로 그 너머에 새파란 하늘과 도심의 대낮 전경이 훤히 보인다. 절경이 따로 없다.
일애를 따라 라영과 희애도 창 앞으로 온다.
“혹시 결혼은 하셨나요?”
일애가 대뜸 라영에게 질문을 한다.
“아뇨.”
담담하게 대답하는 라영.
“그래요? 혼자 살기엔 여기 아파트가 크진 않나요?”
“부모님과 같이 살 거예요.”
“아, 그렇군요.”
“근데 일애씨는 여기서 지금 혼자 사시는 건가요?”
“저요?”
“네에.”
라영의 되물음에 오히려 당혹해하는 일애. 답을 망설인다. 그녀가 천천히 창 앞에서 뒤돌더니 거실 한복판으로 어정어정 걸으면서 말을 잇는다.
“지금만요. 원래는 남편하고 같이 살았어요.”
“그럼 남편 분은 지금 어디?”
일애가 답하기 전에 살짝 뒤돌아 동생 희애를 슬쩍 본다. 그녀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별거 중이에요. 어쩌면 완전히 갈라설지도 몰라요.”
“죄송해요. 괜한 걸 물어 봤네요.”
“아니에요. 어쨌든 당장은 혼자 살기엔 집이 너무 크니까 이렇게 내놓은 거죠. 집은 어떻게 마음에 드세요?”
“네. 일단은요.”
얘기가 일단락되자 일애가 재차 희애를 쳐다본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선 언니를 빤히 보고 있는 희애.
그런데 일애에게 갑자기(!), 조금 전 욕실에서 겪었던 것처럼, 현재와는 다른 광경이 다시 또렷이 떠오른다!
***
떠오르는 영상 속에 희애가 똑같은 위치에 서 있다. 동일하게 창을 등지고 있는데, 창 너머가 낮이 아닌 새까만 저녁이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도 다르다. 현재와는 전혀 다른 더욱 어둑한 느낌의 정장 차림이다. 그리고 얼굴도 역시 현재보다 근심이 가득하고 미간은 잔뜩 찡그리고 있다.
***
지금 현재 멍하니 생각에 잠긴 일애의 얼굴을 희애가 걱정스레 보고 있다. 일애가 곧 정신을 차린다. 보면 희애와 라영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흐흠. 일애가 아무렇지도 않은 양 일부러 한번 헛기침을 한다.
‘아까 전에 장면은 뭐지? 동생이야 이전에 여기 자주 왔는데 왜 난데없이 그 장면이 떠올랐을까? 그게 언제였지?’
아직도 희애와 라영 둘 다 그녀를 염려되는 듯이 보고 있다. 그녀로선 그 시선이 부담스럽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말마따나 일단 의문을 접어둔 일애가 라영과 희애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인다. 별일 아니라는 양.
***
방문이 열린다. 이번에도 일애가 앞서고 라영과 희애가 뒤따라 들어온다.
빈 방이다. 그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완전히 빈 방.
“여긴 완전히 비었네요?”
라영이 말한다.
“원래는 아가 방으로 쓸려고 했던 데에요.”
일애가 답한다.
“그럼 아직 자녀가 없는 거세요?”
“네.”
그녀의 답에 라영과 희애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다. 이후 라영이 빈 방이더라도 간단히 둘러보는 척을 한다. 그런데 정말로 방에 쌀 한 톨만큼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짜 심하다 싶을 정도로 어떤 물체도 하나 없다.
라영이 일애의 시선을 피해 희애에게 다시 눈길을 준다. 그러자 희애가 되도록 티나지 않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신호를 확인한 라영이 일애에게 불쑥 말을 꺼낸다.
“죄송한데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
철컥. 문이 잠긴다. 라영이 화장실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녀가 오기 전 일애가 샤워를 하고 청소를 한 화장실(욕실)이다. 시간도 좀 지났고 청소도 잘했는지 물기가 안 보이고 깔끔하다.
라영이 변기커버를 내리더니 줄곧 가지고 다니던 숄더백을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백 안을 뒤적이더니 휴대전화를 찾아 꺼낸다.
폰을 든 채 화장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라영. 뭔가를 찾는 듯하다.
이윽고 바닥을 보더니 조금 전 일애가 신경 쓰던 밝은 타일을 발견한다. 타일을 찬찬히 보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휴대전화를 바로 위에 수평으로 놓고 찰칵 사진촬영을 한다. 찍은 타일 사진을 확인하고는 어디론가 전송하는 그녀.
전송이 완료되자 이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뚜~ 뚜~. 흔한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이어지다 끊긴다. 상대가 수신을 했다.
“준비됐어요? …… 알았어요.”
덤덤히 통화를 끊는 라영. 이후 정면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뱉는다. 그 다음엔 앞서 일애가 그랬던 것처럼 거울을 밀어 그 안 수납장 공간을 드러낸다. 그녀가 안의 물품들을 살펴본다. 넓은 공간에 각양각색의 물품들이 있다.
잘 접혀져 차곡차곡 쌓인 수건들. 큰 목욕수건도 하나 있다. 휴지 두루마리들, 비누들과 샴푸‧린스‧트리트먼트‧에센스들, 작은 헤어드라이어.
치약들도 있다. 집주인이 치아 관리에 신경을 쓰는지 일반 치약뿐 아니라 치석 케어 치약, 죽염 치약, 한방 치약, 무불소 치약 등이 보인다. 구강청정제도 있고 칫솔도 일반 칫솔 외에 전동 칫솔, 치간 칫솔, 손가락 칫솔, 치실 등 종류가 다양하다.
“참 많이도 있네.”
다른 한 쪽엔 빼곡히 쌓인 생리대들이 있다. 한 회사가 아닌 여러 상표의 제품들이다. 마음까지 편안해서 ‘좋은 기분’. 깨끗함이 달라요! ‘화이투’. 보송보송 케어 ‘위스파’. 얇고도 흡수력이 좋은 성인용 패드 ‘스완(Swan) 패드’.
라영이 수납장 안을 향해 휴대전화를 수직으로 반듯하게 세우더니 물건들을 촬영한다. 찰칵.
***
아파트 계단의 층계참에 한 남자가 벽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며 휴대전화를 만지작대고 있다. 금방 통화를 마친 듯하다.
나이는 서른쯤 돼 보이고, 점퍼 차림에 얼굴에 수염이 콧수염, 턱수염, 구레나룻이 온통 수북이 나 있다.
그럼에도 수염 길이가 균등하게 가지런히 정돈되어 나름은 세련된 느낌도 준다. 거기다 잘 들여다보면 얼굴선이 제법 매끈하다.
눈매는 매처럼 매섭고, 눈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다. 훤칠한 키, 떡 벌어진 어깨에 전반적으로 체격이 건장하다.
윗계단 중간쯤에는 다른 남자가 좀 떨어져 서서 팔짱을 낀 채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용모에 깔끔히 면도가 되어 있고, 옷은 정장 차림에 몸은 호리하다. 인상은 포근해 보이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다. 초조한지 다리를 조금씩 까딱거리는 중이다.
“아직인가요?”
정장남이 수염남에게 묻는다. 수염남은 말없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고개만 한번 끄덕인다.
***
어느새 라영이 주방에 있다. 여기서도 그녀는 거리낌 없이 조리대 위의 찬장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꽤 넓은 공간에 한 칸이 영양제 상자와 통들로 가득하다. 비타민C, 종합비타민제, 오메가3, 산화마그네슘, 엽산제, 철분제 등 종류가 가지가지다. 라영이 상자들을 하나하나 집어 가볍게 훑어본다. 잘 보면 전부 개봉이 되어 있다.
한편 라영 옆에서는 일애가 전자동 커피머신을 이용해 커피를 뽑으려 하고 있다. 머신 추출구 밑 받침대에 빈 머그잔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나머지 머그잔 두 개가 역시 빈 채로 쟁반 위에 대기 중이다.
“라떼 연한 거 맞으시죠?”
“네.”
일애가 버튼을 누르자 위이잉 기계음과 함께 추출구에 커피가 흘러 나와 모락모락 김을 내며 잔을 채운다.
“이것저것 많지요? 찬장이 넓어서 물건 놔두기가 좋아요.”
“그러네요.”
라영이 방금 살펴본 영양제들을 간단히 정리하고는 다음 옆 칸을 연다. 이번엔 의료품들이 한가득 진열돼 있다. 밴드, 거즈, 붕대, 반창고, 알콜병, 알콜솜, 후시틴, 마테카솔, 매디폼, 비판덴 연고, 카네스덴 파우더 등등.
금세 훑어보고 나서 문을 닫고는 자기 옆에 있는 일애를 한번 힐끗 본다. 일애는 머신의 버튼들을 조작하며 나머지 잔들에 커피를 채우는 것에 여념이 없다.
라영이 이제는 여유롭게 아래에 서랍을 당겨 열어 본다. 안에 플라스틱 컵과 통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다. 크기도 형태도 제각각이다.
손을 집어넣어 투명한 작은 병 하나를 꺼내더니 살짝만 들어 올려 찬찬히 살핀다. 손바닥에 놓고 네 손가락을 굽히면 딱 들어맞을만한 사이즈다. 원형통 구조에 중간 허리 부분이 아주 조금 안쪽으로 오목 들어가 있고, 겉면에는 한가운데 수직선에 눈금들이 표시되어 있다. 뚜껑은 없다.
병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유심히 보는 라영. 그러다 스리슬쩍 병을 바지 옆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다시 일애를 확인한다. 그녀는 이제 마지막 잔을 채우는 중이다.
라영이 또 어떤 걸 더 찾으려는지 서랍 안의 통과 컵들 사이를 다시 뒤적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영의 팔 동작이 돌연히 멈춘다. 원하는 걸 발견한 듯하다. 뻣뻣이 멈춰선 상태에서 슬그머니 옆의 그녀를 한차례 더 체크한다.
일애는 라영이 안중에 없는 듯 다 만든 커피들을 쟁반에 올리고는 홱 뒤돌아 식탁으로 향한다. 식탁에선 희애가 앉은 채로 과도로 사과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있는 중이다.
자연스레 라영과 희애의 시선이 서로 교차한다. 희애가 라영을 보며 신호를 보내듯 눈살을 약간만 찌푸린다. 응답하듯 고개를 까딱하는 라영. 그러곤 손 안에 든 작은 뭔가를 꾹 쥐어 아까처럼 주머니에 넣는다. 그 사이 일애는 잔들을 식탁 위에 배치한다.
“다 됐어요. 이리 앉아서 드세요.”
일애의 말에 라영이 서랍을 살며시 닫고 천연덕스레 식탁으로 간다. 4인용 식탁 위의 각 자리마다 세 개의 커피가, 중앙엔 과일과 과자가 정갈하게 차려 있다.
일애의 손짓에 따라 라영은 희애 옆에 자리를 잡고 일애는 라영의 맞은편에 앉는다.
“잘 마실게요.”
우선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하는 라영. 고갤 돌려 식탁 끄트머리를 응시한다. 그곳에 나무로 된 수저함과 티스푼이 담긴 자기병, 조화가 담긴 작은 꽃병이 있는 게 보인다.
그 바로 옆으로는 크고 두툼한 약봉지 하나가 뉘어 있다. 보면 ‘이일애’라는 성명 글씨와 함께 ‘마음약국’이라는 상호가 인쇄되어 있다. 그냥 봐도 약의 양이 많아 보이지만 일수가 분명하게 봉지에 28일로 적혀 있다.
“어디 아프신가 봐요?”
일애가 이번에도 답변을 망설인다. 이번에도 곁눈으로 희애의 눈치를 본다. 그러나 희애는 특별한 반응 없이 덤덤히 언니 일애를 지켜보기만 한다. 일애가 체념한 듯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연다.
“정신과 약이에요. 남편하고 별거하면서 한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거든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그렇군요. 근데 남편과 헤어지신 게 아기가 안 생겨서라 하셨죠?”
“네. 오랫동안 아기를 원했는데 좀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남편하고 소원(疏遠)해진 거구요.”
“예에.”
한편, 라영 옆에 있는 희애는 말없이 일애를 계속 치켜떠 보면서 커피를 조금조금씩 흡입하기만 한다.
“기자시라구요?”
일애가 화제를 전환한다.
“네.”
“희애한테 들었어요. 중아일보 사회부 기자시라고.”
“아, 근데 정확히는 중아일보 기자였죠.”
“그러면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요?”
“그래요. 사정이 있어서 얼마 전에 그만뒀거든요.”
“그럼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지금은 누군가를 돕고 있어요. 그 사람이 진실을 밝히는 걸 돕고 있죠. 어찌 보면 그를 도우면서 진실을 밝히는 일을 하고 있으니 기자일을 계속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기자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을. 사실 여기도 그 일을 하러 온 거예요. 감춰진 진실을 밝혀내는 일을.”
일애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해 한다. 반대로 라영 옆의 희애는 별다른 동요 없이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싼 채 묵묵히 상황을 예의주시한다.
“솔직히 전 이 아파트를 사러 온 게 아니에요. 실은 살 돈도 없구요.”
그러면서 잠시 멋쩍게 피식 웃는 라영.
“그럼 왜 온 거죠?”
일애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빤히 노려본다. 이를 본 라영이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 숙연한 얼굴로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한다.
“사실 저는 당신이 숨기고 있는 진실을 밝히러 왔어요. 그런데 그 진실이란 게 지금의 당신은 모르는 거죠. 당장은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일애 당신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그 진실을 감춘 거예요.”
라영의 말에 일순 침묵이 흐른다. 일애가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그녀를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죠! 제가 진실을 감추고 있다구요? 내가 나를 속였다구요? 뭔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요. 난 숨기는 게 없어요! 아무 죄도 없구요! 희애야, 이 여자 대체 뭐야?”
얼굴이 잔뜩 상기된 일애가 동생을 본다. 하지만 희애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냉담한 얼굴로 스읍 커피만 들이킬 뿐이다.
“참고로 저는 여기 희애 씨 부탁으로 온 거에요. 당신을 거짓에서 구해달라고.”
“저를 구한다구요? 도대체 무슨 소리에요! 뜬구름 잡는 소리 이제 그만 집어 치우고 알아듣게 얘기 좀 해요!”
“좋아요. 이제부터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얘기할게요.”
라영이 잠시 숨을 고르고는 커피 한 모금으로 목구멍을 적신다. 그리곤 침착함을 유지해가며 다시 얘기를 이어간다.
“먼저 일애씨가 여기 혼자 살면서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던가, 아니면 그런 느낌을 받았다던가 한 적 없었나요?”
“어떤 이상한 거요?”
일애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가령 가만히 있는데 느닷없이 어떤 장면이나 이미지 같은 게 떠오른다거나? 마치 데자뷰처럼요.”
일애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무적거린다.
“있긴 했군요.”
일애가 마지못해 인정하듯 눈을 떨군다.
“그럼 이제부터 ‘모순들’을 얘기하죠.”
“모순들이요?”
“당신이 아는 진실에 반하는 모순들이요. 제가 여기 와서 지금까지 발견한 모순점들이 ‘여섯 개’예요.”
“여섯개라니? 대체 무슨……”
“그 모순들이 당신을 진실로 인도할 거예요. 제가 오늘 당신 집에서 찾은 모순들. 당신도 이미 알고는 있지만, 아직 깨닫지는 못한 모순들. 자, 이제 설명해볼까요? 그 여섯 가지를 남김없이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