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기죽음 없이 말을 조리 있게 이어간 라영. 일애와 희애 모두 숨을 죽이고 그녀의 다음 설명을 기다린다.
“먼저 첫 번째, 방금 보니까 찬장에 영양제들이 많더라구요.”
“그야 평소 몸이 허약하니깐요. 대부분은 남편이 떠나기 전에 사다 놓은 거예요. 뭐 잘못됐어요?”
“그럼 저기 영양제 전부가 일애씨가 몸이 허해서 드시던 거라 이 말이죠?”
“그래요. 요 근래엔 잘 안 먹었지만.”
“정말요?”
“네.”
일애가 팔짱을 낀 채 불만 가득한 얼굴로 라영을 쏘아본다. 그런데 라영은 무슨 영문인지 자신 있는 얼굴로 그녀를 맞보며 씨익 미소 짓는다. 그녀가 곧 얘길 재개한다.
“그런데 영양제들 중에 엽산하고 철분이 있더군요? 보니까 그것들도 다 개봉이 돼 있던데, 설사 근래는 아니더라도 얼마 전까진 계속 드셨던 거 맞죠? 그것도 오랫동안.”
“네, 그래요. 엽산은 안 먹은 지 좀 됐지만 철분은 이삼개월 전까진 복용해왔죠. 근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네. 당연히 문제가 되죠.”
“뭐라구요?”
일애가 맞받자 라영이 여유롭게 그녀를 치켜 본다. 그녀의 당당함에 일애가 순간 움찔한다.
“일애씨, 분명 당신은 방금 전에 엽산하고 철분을 오래 복용하신 적이 있다 하셨는데, 그럼 그 둘이 언제 먹는 영양제인지도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한번 얘기해 주시겠어요?”
일애가 라영의 말에 무척이나 난감해 한다.
“그건……”
말조차 더 이상 잇지를 못한다. 라영이 그녀의 당혹해하는 모습이 당연하다는 듯 한껏 의기양양해한다.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엽산과 철분 둘 다 모두 여자가 임신했을 때, 즉 아기를 가졌을 때 먹는 영양제죠. 더 자세히 설명하면, 엽산은 임신 직전부터 임신 삼개월까지 먹는 영양제로 태아의 신체 발육을 안전하게 돕는 용도이고, 철분은 임신 오개월부터 출산 이후에 걸쳐서 먹는 것으로 임산부와 출산부의 빈혈을 예방하는 용도죠.”
설명을 듣는 일애의 표정이 얼떨떨하다.
“아까 일애씨가 바로 말을 못 하고 머뭇거리신 걸 보면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을 거예요. 안 그런가요?”
라영의 추궁에도 일애가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한다. 그런 머뭇대는 일애를 라영은 차분하게, 그 옆에 희애는 초조하게 지켜본다.
일애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는다. 도리어 두 눈을 부릅뜨더니 일애를 노려본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연다.
“그래서요? 내가 임신을 했었다. 이 말인가요? 이미 말했지만 저는 아기를 가진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남편하고 헤어진 거구요!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예요!”
일애가 윽박지른다. 그러나 라영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근히 대꾸한다.
“그럼 엽산하고 철분을 복용해 온 건요? 그건 당신도 인정한 사실 아닌가요? 거기다 그것들이 아기를 가졌을 때 먹는 거라는 건 본인도 다 알고 있었잖아요? 안 그래요? 일애씨는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이에 일애가 간략하게 맞받는다.
“아기를 가질 거라 생각하고 먹었나 보죠.”
두 여자 간에 기싸움이 팽팽하다. 당장은 삼자인 희애는 어느새 잔을 놓고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침을 꼴깍 삼킨다.
“그래, 좋아요. 알았어요. 첫 번째는 일단 넘어가고, 다음 두 번째를 얘길하죠.”
그러면서 라영이 자기를 계속 쏘아보는 일애에게 한번 싱긋 웃어 보인다. 분위기를 조금은 풀어 보려는 의도였으나 그녀의 매서운 눈은 변함이 없다. 라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번 입맛을 쩝 다시고는 말을 다시 이어간다.
“영양제가 있는 칸 바로 옆 칸에 의료품들이 있는 건 아시죠?”
“네. 그래서 뭐요?”
“거기 보니까 비판덴 연고하고 카네스덴 파우더가 있더군요. 그것도 뭔진 알고 계시죠?”
“……”
다시 일애가 흔들린다. 이번엔 말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다.
“비판덴이나 카네스덴이나 둘 다 아기 기저귀 발진용 외용제죠. 실제로 둘 다 겉면에 아기 그림이 있고요.”
“그건……”
일애가 그나마 한마디를 꺼냈지만 라영이 재빨리 끊어버린다.
“그것도 아기가 생길까봐 놔뒀다. 이렇게 말하실려구요?”
또박또박 뱉어낸 라영의 말에 일애의 기세가 완전히 수그러진다. 그녀의 동공마저 점차 흔들린다. 그러나 라영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또 있어요. 아까 여기 조리대 서랍에서 이걸 찾았어요.”
라영이 방금 전 일애가 커피를 만드는 동안 바지주머니에서 몰래 넣었던 플라스틱 병을 꺼내 식탁 위에 탁 올려놓는다.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일애가 병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알듯말듯 고개를 갸우뚱대며.
“이걸 보면 확실하죠.”
뒤이어 라영이 같은 주머니에서 플라스틱 병 나중에 두 번째로 넣었던 그걸 꺼내 내밀어 보인다. 작은 플라스틱 뚜껑이다. 근데 뚜껑 중앙이 불투명한 고무가 불룩 튀어 나온 꼭지 모양으로 돼 있다. 바로 젖병 뚜껑이다!
철렁 놀라는 일애. 라영이 그녀의 두 눈 앞에서 뚜껑을 젖병에 돌려 끼운다. 정확하게 딱 들어맞는다. 어안이 벙벙한 일애. 눈의 초점이 사라지고 낯빛은 망연해진다.
‘뭐지? 난 분명히 임신한 적도 아이를 낳은 적도 없어. 분명히! 그런데 저 여자 말은 전부 맞아. 난 분명히 엽산과 철분을 복용했었고, 아기용 의료품들도 갖고 있었어. 심지어 그것들이 어떤 건지 다 알고 있었구. 거기다 저 젖병! 저건 분명 있었던 거야. 내가 아는 거라고! 근데 이건 말이 안 돼. 나한텐 분명 아이가 없었는데 저런 것들은 왜 있는 거지?’
일애가 넋이 나간 동안, 희애가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다급히 문자를 보낸다. 한편 라영은 그 틈에 얼른 거실로 가 소파에 올려둔 자신의 큰 숄더백을 챙기고는 속히 그녀가 있는 식탁 앞으로 되돌아온다.
다시 자리에 앉더니 라영이 백 안에서 골무 같은 걸 한 개 꺼내 일애에게 보여준다. 투명한 실리콘으로 이루어진, 골무보다는 더 길고 손가락 두 마디 정도에 딱 끼울 수 있는 형태의 물건이다. 그리고 윗부분 한 면엔 손톱만한 크기의 흰 솔이 달려 있다.
“이건 화장실에 있던 거예요. ‘손가락 칫솔’이라고 신생아나 영아한테 쓰는 칫솔이죠. 이것도 당신은 알고 있었을 거예요. 여기까지 네 번째군요.”
일애는 보고 듣곤 있지만 이제 반응이 없다. 이미 패닉 상태에 빠져서 그녀의 몸은 이미 미동 하나 없이 아득할 뿐이다. 오히려 그녀의 머릿속에선 뜬금없는 환청이 들려온다.
‘이일애씨?’
낮은 톤에 부드러운 그 남자의 목소리. 오늘 일어나기 전 꿈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다.
‘잠듭니다. …… 서서히……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 이제 셋을 세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말들이 두서없이 귓가를 맴돈다.
♪~~♪~~♪~~. 이런 와중에 느닷없이 현관벨이 울린다. 희애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다. 라영이 이번에는 백에서 작은 치약을 꺼내 놓는다.
“다섯 번째, ‘무불소 치약’. 이것도 역시 아가한테 쓰는 거죠.”
치약 겉면에 ‘불소 무함유’라는 문구가 크게 박혀 있다.
여전히 망연자실해 있는 일애. 라영의 설명을 듣고 말고는 이제 안중에 없어 보인다. 지금은 환청 대신에 여러 장면들이 영화의 플래시백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마구 떠오른다.
***
조금 전에 거실에서 떠올랐던, 동생 희애가 깜깜한 저녁에 창을 등지고 서 있던 장면. 이어 전등이 꺼져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한 거실 안의 광경이 이어진다.
거실 중앙에 놓인 좌탁 한복판에 아주 작고 납작한 원통형의 하얀 티라이트 양초가 있고, 그 심지에 붙은 촛불이 자꾸 일렁거린다.
그 희미한 빛이 좌탁 앞 소파에 앉아 있는 한 정장 남자를 어렴풋이 비춘다. 머리엔 흰머리가 듬성듬성, 이마엔 주름이 줄줄이 나 있는 안경을 쓴 중년의 남성.
그의 뒤편에는 왜소한 몸집의 다른 남자가 일어서 있다. 칠흑같이 온통 검은색 추리닝 차림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한 손을 바지주머니 쑤셔 넣고 있다. 후드에다 고개를 숙이고 비스듬히 서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후드 틈 사이로 매끈한 아래턱과 새하얀 볼살, 오뚝한 코끝과 도톰한 입술이 약간씩 보이는데, 그가 꽤나 잘생긴 청년이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지 않은 나머지 한 손에는 줄이 달린 금색 회중시계를 가볍게 집어 들고 있다. 깜깜한 거실 안 촛불의 빛이 회중시계에 살짝 반사된다.
이후 어두운 침실 안으로 배경이 바뀐다. 침대에 누워있는 일애의 흐릿한 시선으로 그 추리닝 남자가 침대 옆에 차분히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역시 껌껌한 조명과 후드 때문에 그의 얼굴은 제대로 안 보인다.
‘이일애씨?’
남자의 그 목소리가 또렷이, 그것도 울리듯이 다시 한 번 들려온다.
***
한창 생각에 빠져 여전히 멍해 있는 일애. 어느덧 그녀 앞엔 예의 젖병과 손가락 칫솔, 무불소 치약 그리고 이어 새로이 ‘스완(Swan) 패드’란 포장 제품이 놓여 있다. 라영이 칫솔과 치약처럼 화장실에서 챙겨 내놓은 것이다.
“이제 마지막이에요. 생리대하고 같이 섞여 있더군요. 산모용 패드라고 산모가 출산 직후 그곳에서 분비물이 나오는 걸 처리하기 위한 거죠. 역시 이것도 알고 있죠?”
일애가 알아듣건 말건 거침없이 설명을 이어오던 라영이 드디어 얘기를 멈춘다. 그리고는 일애의 상태를 살핀다. 일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직도 생각에 깊이 잠겨 있다. 오히려 골이 아픈지 잔뜩 인상을 찡그리더니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짠다.
띠리리리리, 스르륵, 철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뒤이어 타닥타닥 발소리들이 이어진다.
한편, 현재 일애의 머릿속에선 욕실에서 그녀에게 떠올랐던, 과거에 미끄러져 머리를 다쳤던 당시의 그 영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
일애가 넘어지기 전 양손 위에 고이 들고 있던 흰색 ‘수건’. 그 다음 팔락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수건’. 마지막으로 바닥에 쓸쓸히 구겨진 채로 놓인 그 ‘수건’. 유독 ‘수건’이 나타난 장면들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다.
그러나 막판에 일애가 기절하기 직전, 그녀의 눈은 떨어져 있는 ‘수건’이 아닌 그 앞 텅 빈 바닥의 공간에 고정돼 있었다.
***
‘또 뭐야? 지금 이런 상황에서 왜 이런 장면들이 생각나는 거지? 그 남자는 뭐고, 그 때 그 수건은 또 뭐야? 아니. 아니야. 수건은 아니야. 그때 수건이 아닌 다른 뭔가가 있었어. 다른 뭔가가. 근데 그게 뭐였지?’
정신이 돌아온 건지 일애가 눈을 껌벅껌벅거린다. 그녀의 눈망울이 어느 틈에 촉촉이 젖어 있다.
앞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두 손을 풀어 얼굴을 스르르 매만진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손을 내리면서 주변을 확인한다.
맞은편에 라영이 이제는 태도를 바꿔 측은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대각선 뒤로 한 남자가 서 있다. 아파트 복도에 있던, 수염으로 얼굴이 둘러싸인 남자로 날이 선 눈빛에 엄정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 남자 뒤론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있는 희애가 보인다. 일애가 의아한 눈으로 빤히 남자를 보더니 묻는다.
“누구……세요?”
그러나 남자는 아무 말하지 않고, 라영이 대신 답한다.
“이 사람이 지금 제가 돕고 있는 사람이에요. 성명은 김화. 성이 ‘김’이고, 이름이 바로 ‘화’죠. 이제까지 제가 설명한 이 모든 걸 저한테 알려준 게 이 사람이에요. 사실 저는 이 사람이 시킨 대로 확인하고 미리 짜논 대로 얘길 한 것뿐이에요.”
라영이 ‘화’의 등장 때문인 건지 금방까지 일애를 한껏 쏘아붙이던 것과 달리 말하는 톤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라영의 말에 일애가 다시 화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런데 화는 입을 다문 채 지그시 눈만 맞출 뿐이다. 그렇게 일애와 김화가 잠시간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마주 본다. 계속 그의 응답이 없자 일애가 한숨을 크게 내쉰다. 그리고는 격양된 소리로 갑작스럽게 말을 뱉어낸다.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가요? …… 난 정말로 …… 아이가 없었어요. …… 거짓말이 아니에요. …… 근데 저 여자가 한 말은 다 맞아요! …… 영양제, 연고․파우더, 젖병, 칫솔․치약 그리고 패드까지! …… 몽땅 다 맞다구요! 거기다 나도 그걸 다 알고 있구요!”
말하는 동안 호흡이 가빠지더니 급기야 훌쩍거리기까지 한다.
“그치만 난 정말 애가 없었어요. …… 진짜로요. …… 정말이에요. …… 거짓말하는 게 아니에요. …… 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라영이 자기 손으로 일애의 손을 감싸 어루만진다.
“그래요. 우리도 알아요.”
드디어 김화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외양과는 다르게 낭랑하면서 절도가 있다.
“당신이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거짓말을 하는 건 당신 머리죠.”
그러면서 화는 자신의 머리 옆 부분을 콕콕 찌른다.
“무슨 말이죠?”
“그들이 그렇게 한 거지만 당신이 원한 거죠.”
“도대체 무슨 소리냐구요!”
일애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뱉는다. 그렇지만 김화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말을 계속한다.
“그들이 당신을 바꿨어요.”
“네? 도대체 무슨……”
난간함에 머뭇대는 그녀를 향해, 드디어 그가 분명한 어조로 결정적인 말을 꺼낸다.
“당신의 기억은 조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