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모두가 적막에 잠긴다. 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일애의 얼굴이 아연해지고 몸은 뻣뻣이 굳는다. 김화와 라영, 희애 모두 그런 일애의 반응을 잠자코 지켜본다.
“네? 기억이요? …… 내 기억이 조작됐다구요?”
“그래요. 말 그대롭니다. 당신의 기억은 조작됐어요.”
화가 또박또박 다시 애기해준다.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지 일애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화와 라영, 희애를 간절한 얼굴로 둘러본다. 하지만 모두들 그녀를 가만히 바라만 볼 뿐이다. 일애가 간신히 소리 내어 질문한다.
“정말이에요? 정말로 내 기억이……”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일애가 말을 좀처럼 잇지를 못한다. 화가 다시 입을 연다.
“안경 쓴 중년 남자 그리고 검은색 추리닝을 입은 젊은 남자, 생각나나요?”
일애가 답을 하려 하나 고민이 되는지 망설여 한다.
“생각나는 대로만 얘기하세요.”
이에 일애가 마음을 조금 추스르고 말을 꺼낸다.
“언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이 집에 있었던 건 떠올라요.”
“바로 그들이에요. 그들이 당신 기억을 바꿨어요.”
화가 일애를 똑바로 보며, 아까처럼 자기 머리를 콕콕 찌르며 힘주어 얘기한다.
“그리고 그때……”
일애가 뭔가 더 생각났는지 말을 더 이어간다.
“희애도 있었어요.”
그 말과 함께 일애가 곧장 화 뒤에 서 있는 희애를 쳐다본다. 희애는 딱 그 저녁때처럼 염려로 가득 찬 얼굴로 그저 언니를 바라보고만 있다.
일애가 답답한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는 한숨을 거칠게 뱉어낸다. 그리고는 화에게 묻는다.
“도대체 그 사람들이 누구죠?”
화가 잠깐 뜸을 들이고는 말한다.
“그건 당장 설명하기 힘들어요. 다만 당신도 알고 있던 사람들이죠.”
“네?”
“그들을 부른 건 당신이니까.”
일애가 놀라면서 다시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들은 당신 의뢰로 온 거예요. 당신 기억을 바꾼 건 그들이지만, 그걸 원한 건 바로 당신이었죠.”
“내, 내가요? 내가 원해서 기억을 바꿨다구요?”
“그래요.”
담담히 답하는 화.
“그럼 그게 뭐죠? 내가 원해 바꾼 기억이란 게.”
대답이 없다. 아무도. 김화를 포함해 라영, 희애 모두 입을 닫은 채 고요히 그녀를 주시한다. 떨떨한 일애가 애절하게 이들을 번갈아 보지만 누구도 응답을 하지 않는다.
‘왜 아무 말이 없지? 왜 다들……’
이내 일애가 고개를 숙이고는 스스로 알기 위해 속으로 생각을 집중한다.
‘내 자신이 원해서 조작한 기억이라……’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방금 여기서 계속 쉬지 않고 얘기하고 들었던 건 오로지 그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다렸을 뿐이다. 그녀 스스로가 알아채기를.
머잖아 일애의 입에서 단어 하나가 나직이 흘러나온다.
“아이?”
일애가 혼란스러운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욕실에서 머리를 다쳤죠?”
화가 말을 재개한다.
“네.”
“그때 어떻게 다쳤는지도 기억하나요?”
“미끄러지는데 수건을……”
헉. 불현듯 일애의 말문이 막힌다.
“설마?”
이어 일애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자제를 잃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게 이유죠. 당신이 기억을 조작한 이유. 당신은 그 때 수건 안에 있던 걸 지웠어요. 당신의 머릿속에서.”
그녀가 꺽꺽 소리 내어 운다. 물줄기가 흐르는 눈을 질끈 감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이제 다시 떠오를 겁니다. 본래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욕실에서 미끄러졌던 당시의 상황이 또 다시 되풀이된다.
***
대신 이번엔 거꾸로다. 바닥에 부딪혀 의식을 잃기 전부터 쓰러지기 전에 서 있던 때까지 ‘되감기’를 하듯 광경이 펼쳐진다.
바닥에서 눈을 감는 일애의 모습. 머리가 타일에 충돌할 때 그녀의 모습. 쓰러지는 동안 떨어지는 수건을 향해 손을 내뻗던 모습. 마지막으로 미끄러지기 직전 양손에 수건을 소중히 들고 있던 모습.
그런데 당시 일애의 양손에 들린 수건 안으로 뭔가가 있다. 그 안에 바로 한없이 앙증맞은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갓난아기’가 있다! 정확히는 아기의 몸이 수건에 둘둘 싸여 있고, 일애가 그를 품에 가까이 보듬어 안고 있다. 아기의 환한 얼굴을 보며 일애가 덩달아 활짝 미소를 짓는다. 이것이 당시의 모습이다.
***
지금의 일애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눈은 벌써 충혈됐고 뺨은 눈물범벅이다.
라영이 이미 백에서 꺼낸 태블릿 PC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스윽 일애 앞으로 민다. 전체화면으로 인터넷 포털 기사가 떠 있는데, 제목이 큼직하게 <엄마의 실수로 갓난아기 낙상으로 사망>이라 되어 있다.
“이게 그 일에 대한 기사예요.”
눈물을 머금은 일애가 기사에 눈길을 주지만 시야가 흐리터분해 자세히 보이진 않는다. 이내 일애가 가슴을 거칠게 문대면서 괴로워한다.
“왜 이렇게 아프죠? 가슴이 너무 아파요.”
“그 아픔을 지웠던 거죠. 그 기억을 지움으로써. 하지만 이제 전부 돌아 올 겁니다. 기억도, 아픔도.”
화가 점퍼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태블릿 PC 옆에 툭 던져놓는다. 일애가 자신의 아기를 껴안고 볼을 맞대며 한껏 웃고 있는 사진이다. 사진 속 일애 옆으로 그녀의 남편이 벙글대며 바짝 붙어 있는데, 방금 전 계단에서 화와 함께 있던 바로 ‘그’이다.
“더 이상 진실을 외면하지 마세요. 진실은 언젠가 돌아오니까.”
마침 벽 모퉁이 너머에 숨어있던 한 남자가 조용히 걸어 나온다. 일애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바로 그 남자 ‘남편’이 그녀 앞에 서 있다!
남편이 서글픈 눈빛으로 찬찬히 아내 일애를 내려다본다. 일애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는지 다시금 울먹인다.
“여보. 나는…… 정말…… 미안……”
흑흑대며 말을 맺지 못하는 일애. 몸이 휘청이더니 이내 털썩, 쿵! 그녀가 의식을 잃고 맥없이 쓰러진다.
***
일애가 침실 안 침대에 눕혀져 고이 잠들어 있다. 곁에는 남편이 침대에 걸터앉아 안쓰러운 얼굴로 아내를 보살피고 있다.
우연히 옆 협탁 위에 놓인 작은 액자에 눈이 간다. 아침에 일애가 일어날 때와 똑같이 액자 안이 여전히 비어있다.
남편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낸다. 방금 전 화가 일애 앞으로 식탁 위에 놓았던 그 가족사진이다. 그가 액자의 뒷면을 열어 사진을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본래대로 돌아온 액자 안 사진을 적적하게 한참 들여다보다가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액자 속 사진 뿐 아니라 모든 게 본래대로 돌아온 듯하다.
자는 일애가 몸을 조금 뒤척인다. 그가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매만져 주고, 이불을 그녀 목까지 바짝 올려다준다.
열린 문틈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희애가 슬며시 문을 닫는다.
이후 희애는 거실로 자리를 옮긴다. 거실에선 라영이 긴 소파 가장자리에서 하릴없이 폰을 손대며 앉아 있고, 반면 화는 창 하나를 열어 놓고선 그 앞에 서 있다. 그가 한 팔은 철제 난간에 기대놓고, 다른 한 손으론 타들어가는 담배를 들고선 입으론 회색 연기를 바깥으로 뱉어낸다.
거실로 온 희애가 숨을 한번 길게 내쉬더니 하소연하듯 얘길 시작한다.
“이렇게까지 될 준 몰랐어요. 그날 변고가 있고나선 언니는 너무 힘들어 했어요. 그것도 오랫동안. 그 일 이후 언닌 당시의 충격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해 정신과 의원을 수시로 들락날락했죠. 어느 때건 아무에게나 죽고 싶단 말을 되뇌고, 시시때때로 혼이 나간 사람마냥 멍하니 몇 시간씩 그저 있기만 했어요.”
희애가 쯧쯧 혀를 차면서 자책하듯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라영은 그런 희애를 안쓰러운 낯으로 바라보며 경청한다. 이에 반해 화는 듣곤 있어도 태연하게 연신 담배를 피워댄다.
“주위에선 이런 언니를 살아있는 시체 혹은 움직이는 송장이라 지칭할 정도였어요. 사실상 정상적인 생활이 불능한 상황이었죠. 그런 언닐 보면서 형부도 힘들고, 지켜보는 저조차도 맥이 빠질 정도였어요. 차마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겠는데, 그렇다고 저나 형부나 그녈 위해 마땅히 할 수 있는 건 없었어요. 대신 아파줄 수도, 아들이 죽은 현실을 바꿔줄 수도 없었으니까.”
희애가 장황한 사연을 한바탕 서술하고는 한(恨)을 덜어내듯 한숨을 내뱉는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쥐똥처럼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해서 그녀의 기억을 바꿔버린 거군요. ‘그들’을 통해서.”
라영이 다음에 나올 얘기를 미리 짚는다.
“예. 어떤 남자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어떻게 알아낸 건지 언니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더군요.”
‘어떤 남자’라는 존재에 대한 언급이 라영의 눈빛을 더욱 초롱초롱하게 한다. 반면 화는 관심이 없는 건지 진즉 아는 내용이어선지 본인이 뿜는 담배연기에만 눈길을 주고 있다.
“그자가 제안하더군요. 도와줄 수 있다고. 그러니 동의만 하면 도와주겠다고. 바로 아픔의 원인인 그때의 기억을 바꿔주겠다고. 실수로 자식을 죽게 한 끔직한 기억을 지워주겠다고. 그렇게 기억을 변경하면 잠시 동안이라도 아픔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고. 단, 그 조작된 기억이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희애가 듣는 중인 두 남녀를 한번 쓰윽 둘러본다. 라영은 상체를 내밀어 희애의 얘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지만, 화는 무심한 얼굴로 타들어가는 담배 개비를 가볍게 까딱거리고 있다. 그들 각자의 반응이 어떻든 그녀는 설명을 이어간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정이었지만, 기억을 조작한다는 소리가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었어요. 그렇게 언니뿐 아니라 나나 형부나 다 미심쩍어 하니까 그 남자가 자기들로 인해 진짜로 기억을 바꾼 사람들에 관해 좀 알려주더군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놀랍게도 그 남자의 제안이 허풍만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두 분 다 여기서 직접 봤겠지만, 저희들의 예상과 기대 따윈 완전히 뛰어넘어버린 어마어마한 위력이었죠. 말 그대로 진짜로 기억을 바꿔버렸으니깐. 그것도 통째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가 실제로 낳아 기른 아기 존재마저 정말로 잊게 만들어버리다니.”
이제는 희애의 눈망울이 전부 물기로 차올랐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라영의 표정이 숙연해진다. 허나 그녀의 사연 풀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엔 좋긴 했어요.”
뜻밖의 언급에 라영이 앉은 채로 상체를 비쭉 내민다. 반면, 화는 고개만 살짝 비스듬히 돌려 흘겨 볼 뿐이다.
“언니가요. 기억이 통째로 뒤바꼈다는 사실은 놀랍고 두려웠지만, 그거야 지켜보는 저나 형부 입장이고 당사자인 언니는 자기 기억이 바뀐 지조차 몰랐으니까요. 참 재밌더군요. 기억 속에서 아픔의 원인이 잊혀지니 고통도, 우울증도 사라지더군요. 마치 꿈처럼. 아이를 잃은 일이 현실이 아닌 한순간 꿈이었던 것처럼. 아예 없었던 것처럼. 아니면 그 기억을 잃고 살아간 요 몇 일간이 꿈이었던 걸까요?”
희애가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마치 당시의 기억들을 되짚어 보려는 듯하다. 아니면 눈 안에 고여 가는 액체를 감추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치만 시간이 지나니까 점점 무서워지더라구요. 아이가 있었다는 걸 계속 떠올리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구니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낯설어졌어요. 그러다가 문득 이런 시간이 들더군요. 언니가 나중에 갑자기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충격을 받아서 돌발적인 행동을 하진 않을까? 혹여나 자신을 해치지는 않을까? 감당을 못하겠더라고요. 너무 두려웠어요.”
희애가 몸서리를 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래서 오늘 모두가 있는 앞에서 진실을 밝힌 거죠. 혼자 있을 때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
라영이 그녀를 달랜다.
“언닌 정말 괜찮겠죠?”
“걱정 마세요. 별 탈 없이 차차 나아질 거예요. 아시겠지만 저희들이 이런 비슷한 경우를 이미 몇 차례 해결해 왔었고, 그 동안 큰 문제는 없었어요. 그래서 저희를 찾아 부르신 거잖아요.”
라영이 위안을 담아 성심껏 답한다.
“제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니겠죠?”
희애가 다시 눈물을 글썽인다. 그러자 화가 입을 연다.
“마취로 상처의 통증을 못 느끼게 해봤자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죠. 그렇다고 평생 마취된 채로 살 수도 없고. 언젠가는 마취를 풀고 상처를 조금씩 하루하루 아물게 해야죠. 오늘이 바로 그 마취를 푼 날입니다. 어차피 해야 될 일이었어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희애가 화의 말을 들으며 손등으로 눈가에 맺혀 흘러나오기 직전인 물방울을 가볍게 쓸어낸다.
“근데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하세요? 연락을 취한 남자요?”
이 와중에도 그녀는 기자답게 필요한 질문은 미루지 않는다. 이에 희애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들을 살짝 닦아낸 뒤 답한다.
“네. 이후에 직접 만나기도 했으니까요. 이 집에서요. 안경을 쓴 중년 남자였어요. 자기 이름이 김철수라고 했죠.”
“김철수라고요? 그 이름……”
“가명이겠지. 김철수라니 너무 흔해빠진 이름이잖아.”
화가 라영의 말을 가로막으며 끼어든다.
“일부러 그렇게 티 나게 가명을 쓰는 걸 거야. 어차피 그는 핵심이 아냐. 일개 브로커지. 진짜 핵심은 다른 ‘녀석’이야.”
화의 지적에 라영이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그럼 그 사람……, 그니까 김철수씨 말고 실지로 기억을 바꿔준 남성 말이에요. ‘그자’는 만나보셨나요?”
“만나는 봤죠. 그런데 보지는 못했어요.”
“보지 못하다뇨? 만났다면서.”
“그 사람 얼굴이요. 기억을 바꾸기로 한 당일 날 밤에서야 그자가 왔는데, 전체가 검은색인 추리닝에 얼굴은 후드를 눌러쓰고 있더군요. 거기다 집 안에 불은 다 꺼두고요. 빛이라곤 거실에 촛불만 달랑 하나 킨 상태로. 아마도 자기 정체를 드러내길 매우 원치 않는 거 같았어요.”
화가 무슨 연유에선지 그자를 묘사하는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친다. 그의 코에서 숨 대신 회색 연기가 새어 나온다.
“실제로 제대로 된 얼굴은커녕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죠. 다만 언니는 최면이 걸리는 과정에서 목소리는 듣긴 했을 거예요. 그래봤자 몽롱한 상태에서였겠지만. 그나마 그 사람 몸매나 후드 아래로 보인 얼굴 밑 부분이 깨끗한 걸 봤을 때 여러분처럼 젊은 나이일 거예요.”
“어차피 놈의 모습이건 목소리건 상관없어. 그 녀석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니까.”
화가 불쑥 말을 뱉어낸다. 그러더니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으로 고갤 돌려 재차 매연을 내뿜는다.
“단, 어딨는진 모르잖아요?”
라영이 약간 비아냥대듯 농담조로 쏘아붙인다.
“그래서 이렇게 찾고 있는 거잖아. 그 녀석을.”
화가 당당하게 응답한다. 그리고선 다 탄 담배를 열린 창 너머 바깥으로 튕겨버린다. 그런 화에게 희애가 묻는다.
“그 사람인 거죠? 당신들이 쫓고 있다는 사람이.”
당장 답하지 않고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개비를 하나 꺼낸 뒤 허공에서 만지작대는 화.
“네, 그렇습니다. 녀석이죠. 바로 그 ‘녀석’. 타인의 기억을 멋대로 조작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최면술사. 그 녀석이 제가 막아야 할 자이자 붙잡아야 할 자 그리고 응징해야 할 잡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그 녀석이 꾸민 거짓 기억을 되돌리는 것 또한 제가 처리해 할 책무이죠. 녀석의 뒤를 밟아가면서.”
한껏 엄중한 분위기를 잡으며 의연하게 얘길 뱉은 화. 여기에 라영이 촐싹대듯이 덧붙인다.
“‘이 몸’만이 아니라 ‘우리’죠.”
이에 화가 실실 웃으며 자기를 보는 라영의 똘망똘망한 눈을 빤히 보며 한 번 더 코웃음 친다.
“도대체 그자는 누구죠? 어째서 사람들 기억을 바꾸는 일들을 하는 거죠?”
희애가 채근하듯이 묻는다. 근데 화는 굳이 서두르지 않고, 우선 손가락 마디 사이에 집고 있던 담배를 서서히 입술 사이로 옮긴다. 그리고선 라이터를 다시 빼내 그 끝자락에 불을 붙인다.
“사연이 너무 길어요. 당신네들보다도 훨씬. 그리고 자세한 내막까지 당신이 알 필욘 없습니다.”
화가 그녀의 의문을 짤막하고 단호한 문장들로 끊는다. 허나 그녀는 조금이라도 정보를 주길 바라는, 아니면 본인의 호기심을 일말이라도 채워주길 갈망하는 그런 눈빛으로 그를 주시한다. 이에 그가 씨익 한번 미소를 짓고는 첨언(添言)한다.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녀석이 한 짓은 그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것. 그리고 현재 이 세상에서 녀석의 기억 조작 능력에 맞설 수 있는 건 오랫동안 그를 옆에서 지켜봐온 나뿐이라는 것. 이것들이 제가 아는 한 자명한 사실이죠. 지금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군요.”
얘기를 끊은 화가 동료인 라영의 눈을 쳐다본다. 마치 이정도만 말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을 보내듯이. 눈빛만으로 뜻이 통하기라도 한 건지 라영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러나 질문자인 희애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마지막 문답을 더 하기로 한다.
“죄송하지만 딱 한 가지만 더 여쭤 볼께요. …… 쫓고 있는 그 사람하곤 무슨 관계인 거죠? 대체 어떤 사이길래 그 사람의 능력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죠?”
희애의 기습적인 질문에 화는 이번에도 또 뜸을 들인다. 근데 이번엔 희애뿐 아니라 파트너인 라영마저 그가 뒤쫓는 술사에 관해 어떤 관계라 정의(定義)할지 목을 빼며 주시한다. 이윽고 그의 두 입술 사이로 두 여자가 기대하는 대답이 나온다.
“친구였죠, 한때는. 그것도 둘도 없는 가까운……”
호기심이 가라앉기는커녕 더 심란케 하는 말이다. 라영은 그 내용보다도 어느 때보다 진지한 그의 모습에서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입술을 조용히 깨문다.
“당시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이제는 이 세상에서 제가 누구보다도 가장 원망하는 인간이 바로 그 녀석이니까요.”
화의 말이 끝나자 세 남녀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화의 숙연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누구도 뭐라 아무 말도 잇지를 않는다. 희애는 더 이상 그에게 말을 붙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밖에 나가서 언니한테 먹일만한 약 좀 사 와야겠네요.”
희애가 고요를 깨고는 얌전히 자리를 뜬다.
화는 그녀에게 목례만 가볍게 하고는 다시 다 타진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던지고는 다른 개비를 꺼내 재차 불을 붙인다. 이후 담배를 꼬나물고 바깥경치를 무심히 감상하는 그.
머잖아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려오고 잠깐의 적막이 지나고 나서야 어줍게 앉아있던 라영이 새로이 얘길 꺼낸다.
“어쨌든 오늘 일은 정말 놀라웠어요. 이전에 겪었던 일들과는 차원이 다르네요. 설사 기억을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아이엄마가 자신이 아기를 낳았단 사실을 잊게 할 수가 있죠? 대체 어떤 식으로 그런 게 가능할 수 있는 거죠?”
화가 입에 머금은 연기를 먼저 빼낸 뒤 라영의 질문에 간략하게 답한다.
“그야 그 ‘녀석’이니까. 그 ‘녀석’이 했으니까.”
“그러니깐 그 녀석이란 사람이…… 어떻게 한 거냐구요?”
화가 즉답 대신 담배를 집어든 채로 한껏 기지개를 켠다.
“좋아, 그럼 또 한 번 설명해주지. 똑똑히 잘 들으라고. 술사인 녀석이 어떤 원리로 남들의 기억을 조작하는 지를. 무슨 방식으로 이일애의 기억을 바꿔버렸는지를 말야.”
화가 재차 연기를 들이마시시고 뱉어낸 뒤, 목을 가다듬고 차근하게 그것도 길게 얘길 풀어놓는다.
“정확히는 그 녀석이 그녀에게 ‘암시(暗示)’를 건 거야. 아주 강력한 ‘암시’를 말야. 그것도 의식 깊숙한 곳에 들어가서. 아마 이런 식이었겠지. 먼저 이일애 그녀를 최면요법과 약물을 통해 깊은 잠재의식 상태로 만들어. 그리고는 그 상태에서 ‘아이가 없었다.’라고 강하게 암시를 걸어. 그 다음엔 이 암시를 그녀가 잠재의식 상태에서 계속 되뇌도록 만들지. 그렇게 암시를 의식 속에서 쉬지 않고 반복하면서 저 여자 스스로가 그 암시에 맞춰 자신의 기억들을 ‘재구성’시켰을 거야. 그것도 아이의 존재만 지우는 게 아니라 관련된 기억들마저 최대한.”
화의 설명을 들은 라영이 조금은 납득이 됐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그런데 그걸 그 ‘녀석’이란 사람만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 그래서 아까 내가 그 녀석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거야. 다른 술사들은 절대로 그런 걸 못해. 기억 조작은커녕 간단한 암시조차 걸기도 버겁지. 그런데 이 녀석은 암시는 기본이거니와 이를 바탕으로 피험자가 스스로 자기 기억을 통째로 변경해버리게끔 만드는 거야. 오직 이 세상에서 그 녀석만이. 녀석만의 기술과 능력으로 말야.”
설명을 정리한 화가 입 안을 또 매연(煤煙)으로 한가득 채운다.
“아무튼 무섭네요. 진짜로 그런 게 가능하다니. 아무리 그래도 부모가 자식의 존재를 지우게 하다니.”
그러면서 라영이 양팔로 몸서리치는 본인의 상체를 둘러 감싸 안는다.
“그래, 두려울 만큼 어마어마한 능력이긴 하지. 그래도 한계는 있어.”
“한계요?”
“아까 직접 봤잖아. 이일애의 기억이 본래대로 돌아오는 걸.”
“네, 그랬죠.”
“즉, 암만 녀석이 기억을 조작한다고 해도 진짜 기억을 없앨 수는 없다는 거야. ‘진짜 기억’을 말이야.”
“진짜 기억……이요?”
“그래. 녀석이 기억을 조작한다는 건, 정확히는 ‘진짜 기억’을 암시를 통해서 ‘가짜 기억’으로 덮어버리는 거야. 즉, 진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거지. 진짜 기억은 잠재의식 속에 아직 남아 있는 거고, 다만 그걸 최면 과정에서 형성된 가짜 기억이 막고 있는 거야.”
“즉, 그 가짜 기억을 깨뜨리면 진짜 기억이 나타난다 이거군요. 그게 바로 우리가 방금 저 이일애에게 썼던 방식인 거구요.”
“그래. 바로 그거야. 그것도 ‘모순’을 깨닫게 해서 가짜 기억을 깨뜨리는 거지. 아무리 기억을 바꾼다 해도 진짜 현실을 바꿀 수는 없어. 그래서 가짜 기억과 현실 사이에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고. 우리가 오늘 이일애에게 보여준 그 많은 물증들처럼. 그녀가 아가방까지 미리 다 치우면서 나름 신경을 쓰긴 했어도 다른 곳곳에 남겨진 흔적들마저 다 처리할 순 없었잖아. 가짜가 아닌 진짜 현실이 담긴 흔적들 전부를 말이야.”
“아하, 그렇군요.”
라영이 잘 알겠다는 듯 맞장구를 친다.
“어찌됐던 ‘조작된 기억’과 ‘진짜 기억’이 충돌하는 그 ‘모순’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 모순을 당사자에게 직접 보여주고 그걸 스스로 인지하게 하면 본래의 기억을 되돌릴 수 있는 거지. 그게 내가 녀석에게 맞서는 방법이지.”
“이제야 많이 이해가 됐네요.”
수긍을 한 라영이 한껏 미소를 띠우고 화를 바라본다.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라영의 아름다운 미소를 마주하는 화. 애써 관심 없는 척, 감응도 없었던 척 눈길을 돌리더니 초점 없는 동공으로 파란 하늘을 멀거니 관망할 뿐이다.
“그런데 말이에요. 김화씨는 언제나 그 녀석이란 사람에게 집착하는 거 같네요?”
“그야 당연하지. 애초 이 일을 하는 것도 그 녀석 때문인 걸. 녀석은 죄인이야. 진실을 우롱하는 죄인. 그래서 난 그 녀석이 한 짓들을 전부 원래대로 되돌릴 거야. 녀석이 꾸민 거짓을 다 깨고 모두 진실로 되돌려 놓을 거야! 전부 다! 그리고 녀석을 붙잡아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녀석을 언급할 때마다 언성이 점차 높아지더니 말을 마칠 즈음엔 연소가 다 안 된 담배를 난간에 거칠게 비벼 누른다. 이후 콧숨을 크게 한번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쭈그려져 엉망이 된 담배를 손가락으로 바깥 허공을 향해 톡 튕겨 버린다. 그런 그를 라영은 가만히 지켜본다.
“근데…… 이렇게 하는 게 꼭 좋은 걸까요?”
“응?”
라영이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했던 것처럼, 일부러 자기 기억을 조작한 사람들에게 굳이 사실을 알려주는 게 정말 괜찮은 걸까요? 그들에게도 기억을 바꿀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잖아요? 오늘 이일애도 그랬고. 그러니까 ‘진실을 밝힌다는 것’이 꼭 최선일까요? 굳이 그걸 원치 않는 사람에게도.”
“무슨 소리야? 기자라는 양반이.”
“기자니까 그러는 거예요. 진실이 항상 좋은 결과를 주진 않아요. 이 세상엔 감추는 게 더 나은 끔직한 진실들도 많아요. 거짓이 안락하고 진실이 혹독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요. 이일애라는 엄마에게 진실이 잔혹한 것처럼.”
“그래봤자 거짓은 거짓일 뿐이야. 생각해 봐. 어떤 경우건 거짓이 진실이 될 순 없잖아? 거기다 만에 하나 이일애가 영원히 조작된 기억으로 살아간다 쳐보자구. 그걸로 정말 모든 게 괜찮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렇게 계속 살아가는 게 가능이나 하겠어?”
“이일애는 지금이 최선이란 건 알아요. 하지만, 아마 뒤에 만나게 될 그런 사람들한테도 언제나 다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도 항상 진실을 얘기해야만 할까요?”
그새 화가 담배를 새로이 꺼내 입술 사이로 끼어 문다. 그리고 불을 또 붙이기 직전에 이 대화를 매듭짓는다.
“암, 그렇게 해야지. 쭈욱 계속. 거짓은 거짓일 뿐, 아무 가치가 없어. 설령 진실이 고통스럽더라도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해. 현실마저 바꾸지 않는 한 진실은 되돌아 올 수 있어. 그러면 진실을 외면한 이는 더 끔찍한 아픔을 맞이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우린 진실을 쫓아야 돼. 진실은 언젠가 돌아오는 법이거든.”
화가 뿌연 연기를 뿜으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라영도 그를 따라 커다란 창 너머에 비치는 도시의 풍광을 가만히 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