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조선의, 역사를 거슬러 가다.
맥은 놀라 크아앙~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선의는 이미 감을 잡았다. 그물이 슬로비디오로 내려오는 줄 알았다. 이렇게 천천히 내려와서 어떻게 맹수나 적을 사로잡겠나 할 정도로 그물은 더디게 내려왔다. 다시 말하면 일부러 잡혀 준 거였다. 맥이 펄쩍 뛰자 손짓으로 일부러 잡힌 거라고 신호를 보냈다.
- 아니, 애잖아? 너 어디서 왔어?
- 아랫동네에서요...
- 내가 아랫동네에 사는데 널 본적이 없는데?
- 아랫동네 그 옆 동네요.
- 그러면 우리 동네네, 나도 널 본적이 없다, 누구 집 딸이냐?
- 조 서방네 딸입니다.
- 우리 동네에 조씬 없는데, 너 자꾸 거짓말할래? 맞는다?
- 묻지만 말고, 잡아가세요. 그러면 될 거잖아요?
- 야, 당돌하네, 우린 쓸모없는 널 잡으려는 게 아니고 적군(敵軍)이나 아니면 멧돼지나, 곰 이런 야수나 맹수를 잡아가야 돼, 에이 재수 옴 올랐다, 가거라...
- 얘들아, 풀어 줘라.
흉노족 병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실망한 표정으로 부하에게 선의를 풀어 주라고 했다.
- 아, 싫어요, 잡아가세요, 왜 수상한 사람인데 안 잡아가세요, 내가 첩잔 줄 모르잖 아요?
- 니가 첩자면 난 동한의 광무제다, 으하하하~
우두머리와 부하들이 웃는 사이 선의가 우두머리가 옆구리에 찬 칼을 빼서 우두머리 목에 겨눴다. 찰나였다. 전광석화(電光石火)가 따로 없었다. 갑자기 좌중이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했다.
- 얘야, 장난치면 안 돼, 이리 줘 칼...
- 그러니까, 포로로 묶어서 데려가세요.
- 야, 진짜 니 머리 나쁘네...
- 키키 크아앙~
맥이 갑자기 나무 위에서 뒹굴며 웃었다. 웃을 만도 했다. 선의 보고 머리가 나쁘다고 했으니 근엄하기 짝이 없는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웃었을 것이다.
- 무슨 소리야?
- 맥 같은데요? 저 천년송(千年松) 나뭇가지에 누워서 뒹굴고 있는데요? 잡을까요?
- 이 고문관 자슥, 니나 잡히지 마라...
우두머리가 부하에게 핀잔을 줬다.
- 왜 안 잡아가세요?
- 내가 아까 말했잖아? 뭔가 소득 있어야 갈 거 아냐? 점심으로 주먹밥까지 싸 들고 와서 먹어 치웠는데 빈손으로 내려가면 어떡하냐? 밥값을 해야지, 대장 보기도 그 렇고 식구들 보기에 면이 안 서잖아?
- 본래, 인생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잖아요?
- 우아, 얘 봐라, 문자 쓴다...
- 형님, 무슨 뜻인데요?
- 얌마, 공부 좀 해라, 공수래 공은 수레에 담아야지, 공수거 공을 수거하기 좋다, 즉 가져가기 좋다, 공이 둥그니까, 여기저기 굴러가면 안 되잖아...
- 역시 우리 형님은 학문이 깊어...
선의는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맥은 천년송 나뭇가지 위에서 배를 잡고 뒹굴지만...
- 그럼, 알았어요.
선의가 어디론가 쏜살같이 뛰어갔다. 보이지 않았다. 맥이 긴장해서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서 따라갔다.
- 아저씨! 아저씨!!
선의가 흉노족 병사들을 불렀다.
- 왜?!
흉노족들이 선의가 소리친 곳으로 뛰어갔다.
흉노족들이 화들짝 놀랐다.
- 됐나요?
- 동, 동, 동~
이상한 동물이 동동 소리를 냈다.
- 이건 동동(羊東羊東)이잖아?
- 무슨 양이 다리와 눈이 하나고 귀 뒤에 눈이 달려 있어요?
- 야, 올해 풍년들겠다...
- 동동이 나타나면 궁(宮)에 큰일이 생긴다고 했어... 선우가 죽는 거 아냐?
- 호도이시도고약제선우(呼都而尸道皋若鞮單于)께서 죽는다? 말조심해 임마...
- 동동이 나타났잖아요, 아니 잡았잖아요?
- 풍년만 생각해, 임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모가지가 날아가고 싶나,
빨리 동동 메고 가자...
우두머리가 새파래지며 부하들의 입단속을 시켰다.
아무튼 동동이 나타나서 그런지 몰라도 공교롭게도 흉노족의 전설적인 인물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를 부르짖던 묵특선우와 자신을 대등한 위치에 놓던 호도이시도고약제선우가 몇 년 뒤 AD 46년에 죽긴 죽었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는 독재자들이 좋아하는 말인데 한 명의 장수가 성공을 하려면 만 명의 부하들이 희생돼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선의는 흉노족 병사를 따라 쫄래쫄래 따라갔다.
* * *
- 공주마마, 밑에 애들이 이상한 계집애를 데리고 왔습니다.
유목민족답게 거주 공간은 천막이었다.
- 꿇어라, 절을 해라.
- 싫은데
- 콩알만 한게...
장수급인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선의를 꿇어 앉히려고 선의의 어깨를 짓눌렸지만, 선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장수는 창피했다. 온 힘을 다 해도 선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수는 땀을 뻘뻘 흘렸다. 난감했다. 흉노족 특유의 씨름 부흐로 선의를 쓰러뜨리려다가 오히려 되치기당해 장수가 선의 발밑에 깔렸다.
- 으하하하~
무령공주가 호탕하게 웃었다.
선의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장수가 벌떡 일어났다.
- 넌 누구냐?
- 이모는 누구야?
- 아니 무엄하게.
선의의 맹랑함에 장수가 칼을 뽑았다.
- 죄대도위(左大都尉)는 상대가 안 될 거 같네, 그만 나가 보게.
- 네, 마마.
좌대도위 장수는 무령공주의 명령을 칼같이 들었다. 흉노족 명령 체계가 엄격한 것도 있었지만 그 장수는 쪽팔렸던 것이 더 크게 작용한 거 같았다.
- 난 좌현왕(左賢王) 무령 공주다.
- 나는 조씨 성에 선자 의자 쓰는 조선의입니다.
- 요괴냐?
-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 이곳에 출몰(出沒)한 이유가 뭐냐?
여차하면 단칼에 요절을 내겠다는 기세였다. 무령 공주의 눈빛이 살아 불꽃이 튀었다.
어지간한 사람도 기가 질려 복지부동(伏地不動)하련만 선의는 눈도 깜짝 안 했다. 무령 공주는 오감으로 느꼈다. 보통 기갈이 아니라는 것을, 여걸은 여걸을 알아본다는 것인가...
- 내가 이곳에 출현(出現)한 것은 검(劍)을 찾기 위해섭니다.
- 검 이름이 뭔가?
- 비천붕익남명중검(飛天鵬翼南冥中劍)입니다.
- 뭐?!
계집애가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무령 공주가 칼을 휘두를 뻔했다.
- 어디 있는지 알려만 주면 아주 신기한 것을 선물하겠습니다.
- 아니 그것보다도 이게 뭔지 알고 싶구나?
무령공주는 진정하고 이 계집애가 뭔가를 알 거 같다는 생각에 호랑이 가죽에 싼 것을 꺼내려 하는데 그때 미나미가 들어왔다.
- 마마 김궤와 아들들이 부대를 이동시켰습니다.
- 왔어, 좌대장(左大將)...
미나미였다. 짐승 가죽을 온몸에 두르고 짐승 가죽으로 만든 부츠 같은 긴 전투화를 신었다. 미모는 여전했지만, 얼굴은 햇볕에 탔는지 까무잡잡했다. 긴 칼은 등 뒤에 차고 옆구리엔 단검을 찼다.
- 미나미 이모!~
지구가 반쪽이 돼도 그러려니 할 정도의 침착한 선의가 미나미를 보자 경악했다. 너무 반가워 앞뒤 재지 않고 미나미에게 뛰어가 안겼다.
미나미가 놀라 선의를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 뭐 하는 짓이냐, 꼬마야?
- 나야, 미나미 이모, 조선의... 조몽대 아빠와 아야코 엄마랑 친구잖아? 기억 안 나? 이모는 일본사람이고.
- 뭐라는 거야, 꼬마가... 돌았냐?
미나미는 기억을 잊어버렸는지 선의를 알아보지 못했다. 처음엔 섭섭했지만 총명한 선의는 이해했다. 시공간을 초월해 오면서 기억을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어떤 연유로 기억이 지워졌다고 판단했다. 선의는 냉정을 되찾았다. 나는 여기에 비천붕익남명중검(飛天鵬翼南冥中劍)을 찾으려고 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명심했다.
- 아는 사이냐, 좌대장?
- 전혀, 못 보던 아입니다. 이 꼬마가 뭔가 착각하는 거 같습니다.
- 그래? 꼬마야 이게 뭐지?
무령 공주가 호랑이 가죽에 싼 것을 꺼내 보였다.
선의가 깜짝 놀랐다. 핸드폰이었다.
- 이게 어디서 난 겁니까?
- 좌대장이 가지고 있었어...
선의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나미 이모가 아빠랑 여기 올 때 가지고 온 것인데 배터리가 다 닳아 꺼진 상태였다.
- 이건 장난감입니다.
- 장난감?
- 그렇습니다, 구슬 같은 겁니다.
- 구슬은 보석이다.
- 아닙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보석이 아닌데요, 구슬치기 몰라요? 딱지치기는요?
- 우리는 그런 거 모른다, 말달리기나, 활쏘기, 도끼 던지기, 돌멩이 던지기, 이런 거 하고 논다.
- 아무튼 알겠어요, 내가 고칠 수 있는지 한 번 볼게요.
선의가 믿음이 가는지 무령 공주가 호랑이 가죽에 싼 핸드폰을 건넸다. 하긴 점바치도 모른다고 발뺌을 했는데 어린 계집애가 아는 척을 했으니 믿을 수밖에...
선의가 미나미 핸드폰을 받아 바닥에 놓고 자기 핸드폰을 꺼내 나란히 옆에 놓았다.
앞면을 가볍게 터치해 밀어 자기 핸드폰에 든 배터리를 미나미 핸드폰에 옮겼다.
조한이가 만든 최첨단 핸드폰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터리가 충전되자 핸드폰이 켜졌다.
무령공주와 미나미가 토끼 눈으로 신기해했다. 그러나 패턴으로 잠겨 있어서 열 수가 없었다. 선의가 몇 번 잠금 해제 패턴을 시도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 미나미 이모, 열어봐, 잠금 해제 패턴을 그려봐?
- 패턴, 어느 나라 말이야?
- 이모야 기억을 더듬어 봐?
- 야, 난 니 이모 아니야, 이모 이모 하지 마, 기분 나빠.
- 그럼, 미나미 이모는 조카 없어?
- 없어...
- 그럼, 내가 조카 하면 되잖아, 싫어? 싫으면 안 할게...
- 아니, 싫은 건 아닌데... 피도 안 섞였잖아?...
- 그래, 이모 해, 닮았어, 눈도 큼직 만 한 게, 난 이렇게 눈 큰아인 처음 봐.
처음엔 둘 사이가 의심이 가는지 갸우뚱하다가 미나미가 극구 부인하자 아예 무령 공주가 나서서 족보 정리를 했다.
- 마마 하고도 닮았는데요?
- 뭐? 아냐...
- 마마 진짜 닮았어요, 혹시 옛날에 숨겨놓은 딸이 아닙니까?
미나미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찐한 농담을 할 정도면 아주 가깝다는 것일 거다. 비록 농담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닮지 않은 건 아니었다. 눈 큰 건 닮았고 무엇보다도 세 여자 절세의 미인이라는 거다. 전혀 얼굴이 다르면서 미인이 아니라 어딘지 느낌이 같은, 풍미(風味)가 같았다. 다만 선의만 얼굴이 상아처럼 하얗다는 것이다. 원래 무령 공주나 미나미도 하얗게 태어났는데 햇볕에 거슬려서 피부가 가무잡잡하게 된 거라 어떻게 보면 세 미녀는 초록은 동색(同色)이라고 봐야 할 것이었다.
- 공주마마는 큰이모, 좌대장은 작은이모, 나는 이모들의 귀요미 조카, 됐죠?
무령 공주와 미나미가 서로 쳐다보며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 패턴인가 뭔가 어떻게 하는데?
- 진짜 기억 안 나?
- 나도 몰라 이게 왜 내가 가지고 있었는지...
- 알았어... 내가 찾아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