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암행, 어설프다.
선의가 도발했다.
돌아서 있던 무령 공주가 발끈했다.
중요 부위만 가리고 따뜻한 물로 손수 몸을 닦던 무령 공주가 획 돌아섰다. 무령 공주 막사에는 미나미와 선의밖에 없었다. 몸을 씻어 주는 하녀가 있었지만 무령 공주가 몸을 남들 앞에 드러내기 싫어해서 혼자서 해결했다. 그런데 미나미와 선의 앞에서 옷을 벗을 정도면 얼마나 신뢰하고 있다는 것일까...
완벽한 몸매였다. 진짜 옥체였다. 온몸이 빛이 났다. 여자가 봐도 황홀했다. 양귀빈들, 왕소군(王昭君)인들 그 어떤 초절정의 미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령 공주의 농염한 몸매는 성(性)을 떠나 숨을 멎게 했다. 경이에 찬 선의의 큰 눈은 뜬 채 멈췄다.
- 경국지색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는 건데, 왜 자충수(自充手)를 둡니까?
- 그 사랑이 나라와 바꿀 만큼이면?
- 어허이, 정말, 큰이모 큰일 났네, 작은이모, 큰이모 상사병 앓는 거 알아요?
- 알지, 내 목에 칼을 대고 죽겠다고 해도 눈도 깜짝 안 해, 중병이야.
미소를 지으며 무령 공주가 벗었던 옷을 입었다. 미나미가 용연향(龍涎香)이 든 향낭(香囊)을 벗은 무령 공주 몸에 톡톡 쳤다. 그윽한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 사랑에 눈이 멀었군...
- 사랑에 눈이 먼다고 해서 할 일을 안 하는 건 아니잖는가?
- 그 용연향(龍涎香)을 찍어 바르고 전투를 한다는 말입니까?
- 털가죽을 옷을 입으니 겨드랑이나 습한 곳에 고약한 냄새가 나서...
- 날 잡아 자시라, 란 말과 뭐가 다릅니까?
- 무슨 말이야?
- 용연향의 향기는 조금만 발라도 그 향이 40년이 간다는 아주 귀한 향입니다. 그걸 바른 마마가 전투에 나가면 적들은 모두 축농증입니까? 불어오는 바람에 마마가 나타났다는 걸 알고 모두 도망을 가거나 아니면 매복의 빌미를 주지 않겠습니까? 천리경을 가지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무용지물이지...
- 알겠네, 바르지 않으마.
화가 났지만, 선의 말이 조목조목 바른 소리라 무령 공주는 쿨하게 받아들였다.
- 마마는 옥체라 마마 몸에서 은은한 향이 납니다. 아무리 두꺼운 털가죽도 덮을 수가 없는 가슴 설레게 하는 향입니다. 상대편이 애달파야지, 왜 마마가 애달파가 안달입니까?
- 내 몸에서 쿰쿰한 냄새만 나는데... 고맙다, 조카... 나도 나를 어쩔 수가 없어, 너무 강렬해, 죽어버릴까도 했어...
- 마마가 그런 마음 약한 소릴 하면 흉노는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탱리고도선우가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 오빠도 있고 동생도 있고...
- 큰이모 참 바보 같다. 사랑은 움직입니다. 내가 알기는 그래요, 또 다른 사랑이 올 줄 모르니 나라를 생각하십시오, 선우의 딸로 태어난 걸 후회 말고 운명으로 받아들이세요. 백성들을 생각하십시오.
- 넌, 콩알만 한 게 모르게 없느냐, 사랑까지도?.. 그 나이에 극심한 가슴앓이라도 했느냐?
- 아뇨, 책에 다 나와 있습니다. 난 흉노의 미래 때문에 사랑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 어휴, 정말 밉다.
- 날 미워해도 좋으니 탱리고도선우 수업이나 착실히 하십시오.
- 너... 뭐 있지? 내 눈을 똑바로 봐?
무령 공주는 느낌이 이상했다. 선의 눈을 바라봤다. 두 큰 눈이 서로 바라봤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 탱리고도선우께서... 호도이시도고약제선우(呼都而尸道皋若鞮單于)께서 병사(病死)하실 겁니다.
- 뭐?!
무령 공주가 칼을 빼 들었다. 무령 공주의 칼도 둔탁해 보여도 예사로운 칼이 아니었다. 경로도(徑路刀) 또는 아키나케스(akinakes)라고도 하는 철제(鐵製) 장검(長劍)이었는데 황금 손잡이에 상서로운 기운이 돌았다.
선의는 천기를 누설했지만 무령 공주가 안타까웠다. 선의 말대로 흉노의 제2 부흥기를 구가하던 호도이시도고약제선우(呼都而尸道皋若鞮單于)는 AD는 46년에 병사한다. 이 정도의 역사는 박학다식한 선의가 모를 리가 없었고 그렇다고 아는 사실을 천기누설(天機漏泄)이라는 명목으로 가만히 있기가 선의의 성정(性情)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 앞으로 몇 년 안에 돌아가실 겁니다, 흉노의 미래가 마마의 손에 달렸습니다, 마마가 안타까워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 넌, 뭐냐? 갑자기 나타나서, 사술(邪術)을 쓰는 무당이냐, 미래를 내다보는 천리안을 가진 예언가(豫言家)냐?
무령 공주가 금방이라도 선의를 내려칠 듯이 칼을 겨눴다.
- 아무것도 아닙니다. 난 단지 흉노의 역사를 알 뿐입니다. 역사는 거슬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대비는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충언(忠言)을 드리는 겁니다.
- 날 어쩌란 말이냐, 죽지도 못하고... 이런 고통스런 형벌도 없을 것이야.
선의의 충심(衷心)에 무령 공주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며 칼을 내려놓고 무너졌다. 지켜보던 미나미가 가슴이 아픈지 또한 자기도 도움이 될 수 없는 자격지심(自激之心)에 말없이 무령 공주를 안았다.
* * *
- 괜찮냐, 한족(漢族) 같아?
- 소풍 가는 사람 같이 들떠서... 머리는 왜 앞을 가립니까?
선의가 이마 한쪽을 가린 무령 공주의 머리칼을 손으로 올렸다. 이마 가장자리에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눈이 동그래졌다. 싸움터에서 생긴 상천가?
- 흉노의 상징이야.
- 네에? 이쁜 얼굴에 이런 짓을, 보기 흉하게...
선의가 깊게 칼자국 난 곳에 해천곤익북명중도를 감은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상처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
- 청동 거울을 보십시오.
- 어, 칼자국이 사라졌네, 어디 갔어?
- 예부터 얼굴에 칼자국을 내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칼자국을 내야 흉놉니까? 복장만 봐도 흉노인 줄 삼척동자도 아는데, 제발 백성들에게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특히 여자에겐 치명적입니다.
- 요술이야?
- 아닙니다, 화장(化粧)으로 지운 거라, 생각하십시오, 얼굴 다 드러내고 머리를 뒤로 묶어 올리니 얼마나 예쁩니까?
- 그래?
무령 공주가 청동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에 흡족한지 미소를 지었다.
- 그만 보십시오, 닳겠습니다.
- 그러지 마, 보지 않았어, 두 번밖에, 호...
- 마마도 마마를 보니까 반하겠죠? 색목인 말로 나르시즘이라고 합니다.
- 나르시즘?
- 네, 그러니 먼저 좋아하지 마십시오, 마마는 충분히 저쪽에서 좋아하게 될 겁니다.
- 그럴까?
- 아니면 손에 장을 지질게요.
- 또, 그런다...
- 마마, 준비가 끝났습니다.
미나미도 한족 복장을 하고 막사에 들어왔다. 무령 공주뿐만 아니라 여기도 항우의 우미인(虞美人)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경국지색이었다. 혈기방장한 남성들이 보면 눈 돌아가고도 남을 미모였다.
선의는 살짝 걱정됐다. 무령 공주나 미나미의 미모가 너무 역대급이라 눈에 띄기 쉬워 암행(暗行)과 잠행(潛行)을 수행하기엔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데 빅 아이즈를 가진 선의 또한 미모가 두 미녀에게 떨어지지 않아 신분을 숨기고 돌아다니기엔 살금 부담스러웠다.
* * *
세 미녀가 밖을 나갔다. 밖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하늘은 사금파리를 깔아놓은 것처럼 무수한 별들이 반짝였다. 막사 앞에 세운 횃불만 어둠을 잠식해 더 밝았다. 드넓은 초원의 바람은 싱그럽다 못해 추웠다.
탕쿠투르, 카라키타이, 테무러친, 쿠빌라이친이 무령 공주의 명마 도도와 미나미의 준마 결제와 선의의 천리마 가라말 타키의 고삐를 쥐고 기다리고 있었다. 선의가 이 땅에 왔을 때 처음 만났던 네 사람과 같이 행동을 하기로 한 건 네 사람 모두 수수한 모습이 여느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여서 신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다.
- 이제 갈까요, 대장님?
- 탕쿠투르 이분이 누군지 알겠냐?
선의가 무령 공주를 한번 흘깃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탕쿠투르에게 슬쩍 물었다.
- 높으신 분이겠지요...
- 높은 신 분 누구?
- 무령 공주마마는 절대 아닐 거고... 대신의 딸? 모르겠습니다, 근데 대장님, 좌현왕이신 무령 공주마마의 미모가 어마어마해서 전설의 미인 초선도 평범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합디다, 정말입니까? 보셨잖습니까?
- 보긴 봤는데 무서워서 고개를 못 들어 자세히 못 봤어, 너희들은 이분이 누군지 알겠느냐?
- 우리도 탕쿠투르 형님 생각과 같습니다요... 얼핏 봤는데 상당한 미인이긴 하네요, 그래도 뭐 우리 무령 공주마마나 할까요, 헤...
테무러친이 자기완 별개의 이야기라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말했다.
- 그래, 맞다, 높으신 분이니까, 그렇게만 알고 잘 모셔야 한다.
한의 도시에 잠행해 들어갔는데 높으신 분 여기 앉으세요, 식사하세요,
이러면 산통 다 깨지고 우린 잡혀서 참형을 당한다. 그냥 한 동네 사는 친척이나 이웃사촌처럼 대해.
- 예, 걱정 붙들어 매시라요, 헤, 대장님...
말이 어눌하고 느린 쿠빌라이친이 선의가 계속 주의 주자 답답한지 끼어들었다.
잠행 나서기 전에도 선의가 몇 번 다짐하고 교육도 했는데 혹시나 실수할까 봐 또 일일이 누누이 강조했다. 사실 이들이 실수할 가능성은 컸다. 그만큼 무지했고 발에 차이는 돌 같아서 선발한 거였다. 그리고 이들의 조상이 차사후국(車師後國) 사람들이라
한족과 닮아 있었다.
- 그러니까, 본래 우리 하던 대로, 우리 생긴 대로 해라, 이 말씀이지요?
- 그래, 그런데 탕쿠투른 말끝마다 불만이 있는 거 같다...
- 아닙니다, 그렇다면 천벌을 받습니다요...
탕쿠투르가 손사래를 치며 극구 부인했다.
- 그레, 그렇게 하라고, 자연스럽게 호호...
- 사실 탕쿠투르 형님이 신혼입니다, 헤헤, 입이 튀어나올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카라키타이가 나서서 탕쿠투르의 기분을 대변했다.
- 이번 일만 잘 수행하면 큰 선물이 있을 거야, 싫으면 세 사람만 데리고 가고, 아기도 낳고 하면 돈도 많이 들 텐데,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려나, 모르겠네...
- 아닙니다, 아닙니다, 무조건 작전을 수행하겠습니다, 야이 자슥아, 왜 쓸데없는 소릴하고 지랄이야.
탕쿠투르가 새파래지며 자기 말에 얼른 올라타더니 저만치 앞장서서 갔다.
선의 일행은 서로 쳐다보며 킥킥대고 웃었다.
유성(流星)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세 여자는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탁함과 오염과 더러움과는 별개인 자연 그대로의 고원(高原)은 손만 내밀면 닿을 듯이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었다.
- 김수로!
- 저게...
툭 내뱉고 선의가 천리마 타키의 말고삐를 채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러자, 무령 공주와 미나미도 뒤따라 달려 나간다.
장삼이사(張三李四) 4인방도 화들짝 놀라 혼비백산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