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김수로, 허황옥의 마을에 들어가다.
- 헉, 저분이 김수로...
선의는 김수로의 용모(容貌)에 말문이 막혔다. 쥰페이, 다이히토 등 용모가 뛰어난 남자를 여럿 봤지만, 나, 선의를 압도하는 용모의 소유자는 처음이었다. 나, 조선의야 큰소리칠 정도로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내가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선의는 김수로의 용모에 주눅이 들고 기가 질렸다. 그래도 나 조선의야, 실오라기 같은 자존감으로 버텼다.
김수로의 현갑(玄甲) 기마대(騎馬隊)의 위용은 실로 놀라웠다. 길잡이로 선 기마대 다음으로 선두에 선 김수로와 다섯 형제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특히 9척 장신 김수로는 검은 갑옷 현갑(玄甲)을 입었어도 몸에 광채가 났다. 아우라가 서렸다. 길가의 구경꾼들에게 그리하라 하지 않았는데도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선의도 그러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주위 사람 모두 머리를 조아리자 튀어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억지로 숙였다. 자존심이 살짝 상했다. 김수로를 인정했기에 그 정도로 참았다.
뒤따라 수로와 다섯 형제의 아버지 김궤(金櫃) 장군이 이끄는 막강한 전차 군단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바퀴 소리가 쿵쿵 지축(地軸)을 흔들며 다가오자 길가에 선 주민들은 오금이 저렸고 한편으론 가슴이 터질 듯한 흥분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용맹한 부대가 적을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무찌르고 제압하는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니 전율(戰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온화하지만 카리스마가 넘치는 김궤는 잔잔한 미소로 길가에 선 주민들의 환호성을 화답했다.
* * *
선의는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눈치채지 않게 가라말 타키를 타고 우회해서 수로와 형제들의 현갑 기마대를 따라잡았다. 몇백 년은 족히 돼 보이는 아름드리 만리향 뒤에 숨어서 주먹만 한 돌 두 개를 주워 하나는 벽로를 향해, 하나는 말로를 향해 던졌다. 벽로와 말로가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돌을 칼이 든 칼집으로 쳐냈다. 역시 수로 형제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해천곤익북명중도를 두른 손으로 던졌으니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날아갔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돌을 쳐낸 거였다.
- 누구야?!
말로가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 웬 수선이냐?
고로가 점잖게 타일렀다.
선의가 가라말 타키에 올라탔다.
- 이랴!
가라말 타키가 날 듯이 뛰었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입을 천으로 가린 선의가 쏜살같이 수로 형제들 머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벽로와 말로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말릴 틈도 없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검은 오려마(烏驪馬)도 명마지만 천리마 가라말 타키와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선의가 탄 가라말 타키가 둘을 따돌리고 저 멀리 달아났다. 포기하고 벽로와 말로가 대열에 합류했다.
- 무단으로 대열을 벗어나지 말거라, 위험하다.
고로가 제법 어른스럽게 타일렀다.
벽로와 말로가 돌아오며 분한지 씩씩댔다.
- 저 말은 천리마이기도 하지만 빠르기도 하다, 우리가 탄 말로는 잡을 수가 없다.
어, 비켜라?!
고로가 다급하게 외쳤다.
선의가 말갈기를 휘날리며 되돌아 달려왔다. 곧장 달려오면 부딪힐 공산이 크다. 인상을 찌푸리는데 가라말 타키가 가볍게 수로와 오 형제 대열을 뛰어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성질 급한 대로가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선의를 따라붙었다. 대로의 말은 탄해(驒騱)라고 부르는 야생마를 길들인 명마 중 최고의 명마였다. 선의가 탄 가라말 타키처럼 길들이기는 힘들어도 애마(愛馬)로 만들면 그 어떤 충신보다 충성을 다했다. 대로가 가까이 붙어서 칼을 휘둘렀다. 선의가 몸을 숙여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천리마 타키 말 등에 올라섰다. 말 안장에 서서 달렸다. 꼭 서커스 보는 것 같았다. 대로가 몸을 세워서 선의를 내리쳤다. 선의가 해천곤익북면중도로 막았다. 두 개의 칼이 맞부딪혔다. 불꽃이 일었다. 대로 칼도 명검이라는 뜻이다. 어지간한 칼들이 맞부딪히면 두 동강이 나기 때문이었다. 놀라기는 대로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칼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 칼을 가볍게 막아냈으니 놀랄 수밖에... 대로가 또 칼을 휘둘렀다. 휘두른 칼을 폴짝 뛰어서 대로의 검은 오려마 탄해(驒騱) 머리를 밟고 공중회전을 하더니 다시 타키 등에 올라탔다. 대로의 말 탄해가 선의의 발에 충격을 받아 방향이 틀어져 잠깐 다른 곳으로 달리다가 다시 방향을 잡아 달렸다. 그러나 선의의 말은 잠깐 한눈판 사이 그곳을 벗어나고 없었다.
분기탱천, 화를 참지 못하는 대로, 말고삐를 돌려 투덜대며 대열에 스며들었다.
- 말은 빨리 달려서도, 오래 달려서도 좋지만, 전쟁에서는 꼭 그게 전부이지는 않다.
신중하기로 유명한 수로의 바로 아래 동생 아로가 동생 대로를 위로했다.
- 형, 흉노지?
- 응, 그런 거 같다.
대로가 묻자 아로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 형 내 칼을 막았어, 그게 가능해?
- 너보다 무예가 뛰어나다는 증거다, 세상은 그만큼 고수들이 많다는 거다.
- 콩알만 하던데...
- 콩알도 못 이기는 우리다, 우린 우물 안 개구리야.
- 한 번만 더 걸려라.
- 경거망동하지 마, 이젠 우리의 위수(衛戍) 지역을 완연히 벗어났다는 증거다, 매사 에 조심해야 한다.
- 꼭 잡고 말 거야.
- 대장부가 쪼잔하게 하는 말이 고작 그 정도냐?
아로가 구상유치(口尙乳臭)한 사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대로에게 핀잔을 줬다.
* * *
김궤의 부대가 허씨(許氏) 마을 들어서기 5(里) 밖에서 일단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許(허)는 성씨가 아니라 세습되는 신앙지도자(巫師)를 일컬었으며 대대로 내려오다가 자연스럽게 지금은 성씨가 되었다고 했다. 허씨(許氏) 일족은 공손술 보호 아래에 그 지역 종교행사를 주도하며 의식주를 해결했는데 공손술이 무너지자 진퇴양난에 빠졌다. 허씨 일족도 공손술의 기의(起義)에 좋든 싫든 무사(巫師)로서 참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작금에 와서는 그게 문제가 되었고 빼도 박도 못하는 곤란한 형편에 놔 진 거였다. 공교롭게도 공손술의 잔당 연잠과 진풍의 잔존(殘存)세력이 진압되지 않고 활개 치고 있는 마당엔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몰라 허씨 일족은 좌불안석이었다.
* * *
- 태산이 그리도 큰 것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고, 바다가 깊은 것은 작은 물줄기 하나라도 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중시하지 않는 군주는 성군(聖君)이 될 수 없다. 쓸모없는 나무가 목수의 눈에 들지 않아 거목이 된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쥐어졌기에 태어났다. 인명은 그만큼 중요하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김궤가 허씨 일족이 사는 마을 진입을 앞두고 여섯 형제를 모아놓고 덕담 겸 주의(主意)를 알렸다. 특히 불같은 성정의 천방지축 대로와 부화뇌동하는 벽로가 걸려서 그렇다. 김궤가 특별히 주의를 환기(喚起)시키는 건 허씨 일족에 대한 배려심일 것이다.
- 알겠습니다,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수로가 먼저 허리를 숙여 대답하자 나머지 다섯 형제도 허리를 숙이며 수로
뒤따라 우렁차게 외쳤다.
- 허씨 족들은 내가 일찍이 알던바 세상 속세와 무관한 신앙을 중요시하는 종교집단 이니라, 어쩔 수 없어 공손술과 엮였을 뿐 법과 욕심 없이 살아가는 무릉도원(武 陵桃源) 같은 마을이니 실례를 하거나 폐를 끼치면 안 되느니라.
- 예, 주군!~
김궤가 부하들 앞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 있게 주의(注意)를 일깨웠고 타일렀다.
* * *
김궤 부대는 다시 진용을 갖추고 출발했다. 김궤 부대는 몇만 몇십만 대부대(大部隊)보다 작아도 군더더기 없이 찰졌고 용맹했고 빈틈이 없어 주위를 압도했다. 김궤 부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유랑민들은 김궤 부대가 오기만 기다렸다가 부하가 될 테니 데려가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고 어떤 화적떼들은 단체로 죗값을 치르고 병사가 되겠다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면 김궤는 선별해서 보급부대원으로 기용하기도
하고 무예가 쓸만하면 보급부대 경비를 맡겼다.
김궤는 일부러 부대를 더디게 행군을 시켰다. 우리가 가니 싸울 생각 말고 알아서 피해라는 의중(意中)이었다. 어쨌든 붙으면 쌍방 간에 피해가 가니 피차 좋은 거 아니냐는 거였다. 그렇게 시나브로 행군하다 보니 허씨 일족이 있는 부락 입구에 날이 저물어서야 도착했다.
맑은 달과 사금을 뿌린 듯한 별 홍수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악마나 악인을 쫓는다는 괴력을 가진 목동 크리슈나(Krishna) 영웅신을 위한 알라리푸(allarippu, 꽃장식)가 마을을 꽃밭처럼 꾸몄다.
김궤 부대는 마을 입구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숨죽이듯이 들어갔다.
다채로운 색상의 비단 사리를 몸에 착 달라붙게 걸치고 재스민 화환과 정교한 보석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손목에는 금팔찌를 차고 물감을 들인 맨발에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방울을 발목에 달고 발을 세게 구르며 헌가(獻歌)에 맞춰 규칙적으로 몸을 돌리며 바라타나티얌(Bharata Natyam)이라는 춤을 추는 아유타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이제 아홉 살이었고 똑같이 춤을 추는 조선의는 열한 살이었다. 두 사람이 추는 춤이 꼭 한 사람이 추는 춤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맞았다. 그것도 동작이 느린 게 아니라 빠른데도 그렇다.
눈먼 늙은 연주가가 비파를 치며 산스크리트어로 헌가를 주술처럼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허황옥과 조선의와 늙은 연주자 셋뿐이다.
김수로 현갑(玄甲) 기마대(騎馬隊)를 앞세운 김궤(金櫃)의 막강한 전차 군단이 마을에 진입해도 허황옥과 조선의와 늙은 연주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주신(主神) 크리슈나(Krishna)에게 바쳐지는 헌가는 여러 가지 리듬을 반복적으로 표현했으며 한 줄이나 두 줄의 짧은 시(詩)를 리듬에 얹혀 불렀다.
- 저 춤과 헌가의 의미는 뭔가?
- 악마와 악인을 물리친다는 크리슈나 영웅신을 위한 숭배의 춤과 헌가입니다.
유심히 지켜보던 수로가 물었고 마노가 대답했다.
- 뭐, 우리가 악마라고, 이것들이 안 되겠네, 살려주려고 왔더니...
악마 취급당한 걸로 착각한 대로(大露)가 화를 참지 못하고 칼을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