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조선의, 김궤 부대에 스며들다.
- 경거망동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 그래도 형, 우리가 도륙을 내야 할 판에 살려줬는데 환영은 못 할망정 악마라니 심하잖아?
발끈한 대로가 퉁명스럽게 툭 쏘았다.
- 넌 너를 스스로 악마나 악인으로 생각하느냐?
- 아니지, 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대장부지.
- 그런데 왜 칼을 빼 드느냐?
- 내가 경솔했네.
수로의 일침에 대로가 쿨하게 인정하고 칼을 거뒀다.
명분 없이 브라만을 죽이는 것은 브라만 세계에서는 중죄에 해당(該當)되기에 자칫 파촉(巴蜀) 지역의 민심이 흉흉해질지 모른다고 마노가 수로에게 미리 귀띔을 해줘 수로는 허씨 일족들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때, 선의가 말을 끌고 가는 벽로와 말로의 팔을 잡아끌었다.
처음엔 극구 사양하다가 수로가 그래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마지못해 따라나가 어설퍼도 함께 춤을 췄다. 춤을 추면서 벽로와 말로는 선의를 어디서 본 듯한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했다.
몽환적인 비파소리가 주위를 휘감아 돌아 넋을 놓게 했다.
영혼을 담은 노래가 일단 끝나자 비파를 연주하는 늙은 연주가의 손이 빨라졌다.
발을 구르고 도는 동작이 점차 빨라지며 몰아의 경지에 이르는 허황옥과 조선의, 그리고 어설픈 벽로와 말로의 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숨을 멎게 했지만 벽로와 말로의 춤은 미소 짓게 했다.
김궤의 부대원들은 마술적인 춤의 매력에 빠져 넋을 잃고 쳐다봤다. 그러다가 선의가 박수를 유도하자 리듬에 맞춰 손뼉을 쳤다. 손뼉 소리가 조용한 밤의 세계를 깨웠고
천지를 움직였다. 역시 예사롭지 않은 인물인 벽로와 말로도 비범했다. 그 어려운 춤을 금세 따라잡아 제법 그럴싸하게 췄다. 물론 춤의 사양(仕樣)이 단조롭긴 해도 세련되게 췄다. 오래전부터 춤을 춘 거처럼 보였다.
김궤(金櫃)의 부대원들이 황옥과 선의와 늙은 연주자, 그리고 벽로와 말로를 둘러싸서 춤에 빠져 있는 사이 황옥의 아버지와 가신들이 숨어 있던 집에서 나와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춤에 별 관심이 없던 대로가 눈치를 채고 칼을 빼 들었다. 김궤의 부대원들도 여차하면 칠 태세를 취하자 김궤가 손을 들어 함부로 행동 말라며 제지했다.
황옥의 아버지와 가신들이 김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김궤와 6형제도 최선을 다해 예를 표했다.
- 왕이시여,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 누구신지요?
- 저, 마노입니다.
- 아, 마노구나... 다시 보게 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 수로 장군께서 구해주시고 김궤 주군께서 저를 거둬주셨습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는 이 아이에게 죄가 많습니다.
허황옥 아버지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은 마노가 10살 때 허씨 일족을 위해 연잠의 장수에게 끌려갔다고 했다. 뛰어난 미모의 마노를 주지 않으면 허씨 일족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에 사고무친(四顧無親)인 마노가 자진해서 따라나섰다며, 마노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허씨 일족의 가구는 1,000여 가구가 넘었고 사람 수도 4~5천이 될 정도 제법 큰
부락이라 김궤의 부대원들에게 충분히 집이나 마당을 숙소로 내주고도 불편하지 않았다. 허씨 일족들은 김궤 부대를 점령군으로 보지 않고 먼 길을 온 손님으로 맞았다.
넓은 광장에 미리 준비한 음식을 차려 김궤 부대를 극진히 대접했다. 처음엔 경계를 풀지 않던 김궤 부대원들도 진심으로 대하는 허씨 일족에 감복하여 거리감을 없애고 오래전부터 알았던 친구나 동료로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 * *
- 너, 몇 살이야?
- 야, 난 장군의 아들이야.
선의가 배를 빵빵하게 허기를 채운 뒤 대뜸 말로에게 물어보자 말로가 언짢다는 듯이 대꾸했다.
- 야, 난 대신의 딸이다.
- 거짓말, 하녀면서...
말로가 믿지 않았다.
- 진짜야, 황옥이한테 물어봐?
- 아까 같이 춤춘 계집애가 황옥이야?
- 계집애가 뭐냐, 공주 마만데... 무례한 놈, 몇 살이야?
- 아홉 살...
선의가 다그치자 말로가 기가 죽어 사실대로 말했다.
- 내 동생이네, 넌?
- 난 11살...
벽로가 마지못해 슬그머니 대답했다.
- 그래? 나도 11살, 너는 내 친구고 넌 내 동생이다. 불만 없지?
- 싫어, 나도 친구 할 거야.
말로가 입이 튀어나와 퉁명스럽게 말했다.
- 야, 니가 얘랑 친구 하면 그럼, 넌, 내 동생이 아니고 친구냐?
벽로가 대로에게 발끈했다.
- 아 그렇네...
- 니가 내 동생 해야 널 귀여워해 주지, 이렇게 이쁜 누나 봤어?
- 아니...
말로가 선의를 한번 쳐다보고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인정했다.
어린 말로가 봐도 맑고 큰 눈의 소유자 선의는 예뻤다.
* * *
저녁을 푸짐하게 대접을 받은 김궤는 아들 6형제와 장수들, 그리고 마노와 모진 등과
기다란 탁자에 둘러앉아 보이차를 마시며 환담(歡談)했다.
- 아버지, 꼭 귀신에 씐 거 같습니다.
- 너는 꼭 칼에 피를 묻혀야 이기는 거냐?
대로가 돌아가는 상황이 마뜩지가 않았는지 불만을 드러냈다.
김궤가 조용히 타일렀다.
- 그런 건 아닌데... 우리가 이상하게 진 느낌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 진 건 사실이다.
아직 등 뒤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아로가 말했다.
- 무슨 소리야, 형?
- 넌, 아까 그 여자애 제압했어?
- 아니, 제압하려는데 도망갔어... 정식으로 붙으면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진짜야.
- 너를 갖고 논 거야, 정식으로 붙으면 니가 져.
아로가 툭 뱉는 말은 무미건조했다.
- 내가 이겨! 내가 지면 할복할게, 모두 보는 앞에서!
- 할복할 필요는 없어, 넌 져서 죽을 거니까...
대로의 다혈질(多血質)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로에겐 언제나 냉소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대로의 불같은 행동을 주저 없이 지적하고 고쳐라, 일침을 놓았다. 동생한테 너무 심하다? 아니면 다른 사람 눈에 한 살 차이라 시기인가? 할까 봐 조심스러웠지만, 대로의 성격은 앞뒤 재지 않고 덤비는 불나방 같아 항상 그때그때 지적하지 않으면 모두를 한순간에 좌불안석(坐不安席)에 앉게 하기 때문이라 어떻게 보면 아로가 악역을 스스로 택한 거였다. 그래도 대로가 성질이 다혈질(多血質)이라서 그렇지 한 살 형이라도 형에게 깍듯했다.
- 형, 진짜 왜 그래? 난 무술로 진 적 없어, 내가 형한테도 이겼잖아?
- 자식이... 내가 너 경쟁 상대자야?! 너 그러면 수로형한테 이겼어?!
- 아로 말이 천 번 만 번 맞느니라.
팔짱을 끼고 묵묵히 지켜보던 김궤가 아로 팔을 들어줬다.
-그 여자애를 제압하려면 나와 여기 있는 여러분 전부 덤벼도 그 승패는 알 수 없어, 그런데 그 여자애 하나 잡으려고 일당백(一當百) 하는 우리의 전력을 쏟는 동안 나머지 우리 병사들은 누가 지키지? 장기판을 생각해봐, 대장이 없는 졸은 우왕좌왕 전멸하는 거지, 아니 우리는 이미 전멸을 당했다고 봐야 하느니라, 모두 춤에 넋을 놓고 있을 때 허씨 일족은 전혀 제지를 받지 않고 우리 곁으로 안개처럼 다가왔어, 만일 그들이 적이라면 결과는 뻔하지 않겠어? 무방비 상태에서 몰살을 당하는 거지. 물론 이런 논리는 이론상이지만... 실제로 붙어도 우리가 이길 공산은 적어, 그러나 피를 흘리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것도 최상의 병법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모두 숙연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선의가 보여준 행동이 이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부심이 자만심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라는 걸 모두 깨달았다.
* * *
- 벽로야, 말로야, 놀자?!
선의가 숙소 앞에 선 보초에게 제지를 당하자 큰소리로 외쳤다.
- 벽로야! 말로야! 숨바꼭질하자?!
- 아니, 저게, 요절을 내야지...
대로가 성질을 못 이기고 벌떡 일어났다.
- 저 애를 데리고 오너라...
김궤 말에 뻘쭘해진 대로가 문을 열고 외쳤다.
- 야, 꼬맹아?! 이리 온!~
- 나이 많은 오빠하고는 안 놀아요!
- 아버지가 부르셔!
제지하던 보초가 대로 고함을 듣고 선의를 풀어줬다.
선의가 보초에게 눈을 흘기고 투덜대며 숙소로 들어왔다.
- 안녕하십니까,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조선의(曺鮮懿)라고 합니다.
- 음, 그래, 너 참 총명하게 생겼구나...
- 총명하게 생긴 게 아니라 총명합니다.
- 으하하하~ 당돌해서 좋다.
- 당돌한 게 아니라 당당합니다, 헤...
선의의 거침없음에 김궤가 기분이 좋아 모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 벽로와 말로는 알고... 이분이 고로, 이분은 성질 급한 대로, 이분은 미소년 아로, 이분은 난세의 영웅, 김수로... 잘 생겼네, 반할 만하네, 앞에 계신 어르신은 김궤 주군... 이 두 여자분은 모진과 마노... 나의 라이벌, 아니 나의 경쟁자군요, 여러분 환영합니다. 잘 오셨고, 판단 잘하셨습니다, 편하게 쉬다가 가십시오.
- 야, 꼬맹아, 판단 잘하다니, 무슨 뜻이야?!
대로가 성질대로 발끈했다.
- 나 하나 잡지 못하면서 우리랑 싸운다? 백전백패야. 그러니 안 싸운 게 잘한 거라고요...
- 그래? 나랑 한판 붙자.
대로가 칼을 빼 들었다.
- 해천곤익북명중도를 가지고 있던데 네 것이냐?
- 아닙니다, 잠깐 빌렸습니다.
수상한 생각이 들어 수로가 묻자 선의가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그 말뜻은 대로 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 해천곤익북명중도를 가졌다는 것은 비천붕익남명중검(飛天鵬翼南冥中劍)을 찾는다는 뜻인데, 그럼 그럴 것이지 왜 엉뚱하게 남의 일에 끼어들었느냐?
- 역시 수로 오빠는 남다르군요, 수수께끼니 그 비상함으로 알아내십시오, 오빠...
- 뭐, 오빠? 우하하하하!
수로가 크게 웃었다.
그때, 모진이 선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선의가 가볍게 칼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