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나'의 이야기
작가 : 쉼표
작품등록일 : 20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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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상상은 상상으로만, 추억은 추억으로만.
작성일 : 24-06-07     조회 : 27     추천 : 1     분량 : 4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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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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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꾸고 있었다. 만날 꿈을 꾸는 체질이었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꿈의 내용조차 기억이 나지 않은 시답지 않은 꿈이었지만,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진동음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자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수면 모드로 해놓았기에 전화와 문자 이외에는 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잠결에 침대 옆 탁자에 두었던 핸드폰을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찾았다.

 새벽 두 시 반. 이 시간에 핸드폰이 울린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술 먹자고 연락 오던 친구들도 이제는 직장생활과 건강을 생각하느라 새벽에 불러내는 일은 서로 금기시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스팸 문자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하는 성격이기에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켰다.

 “아무리 스팸이라지만 매너는 지켜야….”

 핸드폰의 불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저장되지 않은 번호의 문자를 확인하던 나는 순간 움찔했다.

 - ???: 오빠, 잘 지냈어요?

 “오...빠? 이것들이 누굴 놀리나….”

 남중남고공대군대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나에게 오빠라 부를 사람은 없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여자들은 있지만 이렇게 저장도 안 된 사람이 나에게 연락할 만큼 넓은 인간관계가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치며 화면을 끄려던 나는 연이어 울리는 문자에 어리둥절했다.

 - ???: 저 혜미에요.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그냥 생각이 나서….

 그런 적은 물론 없었지만,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딱 두 글자, 혜미라는 글자 때문이었다. 찰나의 순간, 잊혔던 이름이라 번호를 헷갈려 잘못 보냈나 보다 생각했었지만 정말 거짓말같이 곧바로 잊고 있었던 몇 년 전의 기억이 파라노말처럼 순식간에 지나쳐갔다. 너무나 당황스러워 잠이 확 깼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굳은 채 핸드폰 화면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한동안 이 당황스럽고 거짓말 같은 이런 상황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 나 자신이 한심하고 찌질하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고 난 뒤에는 이런 상상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았고 기억 속에서 잊어버렸다.

 “이제 와서 연락이라니….”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모른척하며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다시 방안엔 어둠이 가득 찼고 눈을 감았지만, 잠이 들 리 만무했다.

 “하….”

 들면 안 돼…. 보면 안 돼…. 답장하면 안 돼…. 마음속에서 외쳐댈수록 정신이 또렷해지고 다시 그녀의 생각으로 가득 차버렸다. 70초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7년 전 그때의 나로 되돌아 가버린 것이다.

 “그래, 이렇게 고민할 바엔….”

 결정해야 했다. 문자를 삭제하고 수신 차단을 할지 아니면…. 답장을 할지…. 어중간한 태도는 나를 더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진작에 깨달은 나이였다. 그리고 전자를 택해야 한다는 것도….

 

 “병신새끼.”

 아직 쌀쌀한 새벽 공기에 옷을 여미면서 나 자신에게 하염없이 욕을 했다. 보고 싶다는 한마디에 다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다. 겉으로는 욕을 했지만, 사실은 심장은 두근거렸고 기대가 되고 설렜다. 내 인생 최고의 흑역사였던 때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금요일의 번화가였기 때문에 이런 대목을 놓칠 리 없는 술집들이 대낮처럼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빛을 내는 술집 중에 나름 한적한 술집에 들어갔다.

 ‘제발 없어라…. 누군가의 악질 장난이거나…. 그냥 그녀가 다음날 기억도 못 할 정도로 취해서 보낸 실수이거나….’

 “몇 분이세요?”

 종업원이 나에게 물었지만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술집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오빠, 여기야!”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기분이 이런 거였구나. 문자가 아닌 음성을 들은 나는 두 다리가 풀릴 듯 힘이 쭉 빠졌지만, 간신히 버티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간단한 탕에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술잔을 든 채로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턱선까지 길렀던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렀고 염색했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 되었다. 소녀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짧은 치마를 즐겨 입던 예전과 달리 차분한 옷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게 7년 전과 달랐지만…. 여전히 미소가 예뻤다. 그래…. 저 미소에 내가 반했었지….

 “얼른 여기로 와요.”

 그녀의 손짓 한 번에 강형욱 선생님 앞에 있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에 앉았다.

 “오빤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악의가 없는 저 말이 얼마나 아픈지 본인은 알고 있을까?

 “너도 그대로네.”

 “에이~. 이제 저도 서른이예요. 좋은 날 다 갔죠.”

 좋은 날이 가도 이렇게 예쁘다면 7년 동안은 얼마나 더 예뻤다는 걸까.

 “갑자기 연락해서 당황스러웠죠?”

 “어…. 그렇지 뭐.”

 “그래도 바로 답장 해주실 지는 몰랐어요, 헤헤.”

 헤헤는 무슨, 그리고 바로는 아니야. 70초는 고민했다고. 그녀의 말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뻔했지만 이제 그 정도는 컨트롤 할 수 있는 30대 였-

 “귀가 빨개요. 더우세요?”

 “어? 아니, 아니. 좀 걸었더니….”

 자연스레 손을 올려 손부채질을 하며 겉옷을 벗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게슴츠레 눈을 뜨며 지그시 날 바라보자,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 큼. 많이 마셨어?”

 “좀?”

 “혼자?”

 그녀의 성격상 혼자 마실 일은 없었겠지만, 혹시나 했다.

 “아뇨.”

 “아…. 그럼 남자친구?”

 병신…. 그런 걸 왜 물어봐.

 “여자애들이랑 마셨어요. 아, 수진이 아시죠? 게네랑 마셨어요.”

 “아…. 수진이….”

 사실 잘 기억은 안 났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대답에 아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 받으세요.”

 “어? 어.”

 “풋. 왜 두 손으로 받아요! 서운하게.”

 “회식 자리가 많다 보니 습관이 됐나 봐.”

 황급히 오른손을 받치던 왼손을 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회사 다녀요?”

 “어…. 그냥 조그마한 회사야.”

 “와, 벌써 취업도 하고. 진짜 어른이 됐네요?”

 그 말을 회사 사람들이 들으면 배꼽 잡고 웃을 거야. 영수증도 제대로 못 붙이고 양면 복사도 할 줄 몰라서 혼났었거든….

 “근데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갑자기 회사 이야기에 현타가 왔는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녀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젠장…. 더 귀엽네.

 “아…. 그냥 생각이 났어요….”

 “그…. 냥…?”

 “그게…. 얼마 전에 경은이 만났거든요. 혁권 오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어쩌다…. 오빠 이야기도 나와서…. 계속 생각이 났나 봐요.”

 원수의 이름이다. 나에게 이 눈앞의 여자를 소개해준 자식. 아직도 나를 보면 지갑을 꺼내며 술값을 계산해 주었기에 용서를 해주긴 했지만….

 “혁권이랑 경은이도 얼마 전에 헤어져-”

 혁권이랑 경은이‘도’? ‘도’라니 망할….

 “아, 네. 들었어요. 사실 그것 때문에 모였던 거였거든요.”

 뇌정지가 온 나를 알아챘는지, 그녀도 슬쩍 눈을 피하며 나름 자연스럽게 말했다.

 “둘이 결혼할 줄 알았는데.”

 “너무 오래 사귀었잖아. 8년? 9년?”

 “9년일 거예요.”

 “그렇게 싸우면서 9년이나 사귄 게 용했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말없이 자신의 술잔을 바라보며 만지작거렸고, 난 불편한 공기를 술과 함께 들이켰다. 문자를 보고,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봤을 때만큼의 두근거림은 진작 사라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무거웠고 답답했다.

 “너무 늦었는데 일어날까?”

 예전에 나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지만…. 깨달았다. 잠깐 꿈을 꾸었던 것이었다. 나는 7년 전의 내가 아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그녀가 올려다보았다. 그녀도 알 것이다. 자신도 7년 전의 본인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오늘같이 있고 싶어요.”

 “예?”

 “네?”

 생각 보다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버린 그녀의 말에 다시 뇌정지가 왔다.

 “뭐, 뭐라고?”

 그래도 부끄러운 듯 볼이 빨개지며 시선을 돌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얘가 취해도 너무 취했네. 얼른 일어나! 택시 잡아줄게.”

 도망치듯 자리에서 나와 계산을 했다. 그 와중에 술값을 계산하는 나 자신에게 데자뷰를 느꼈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예전에 없던 당돌한 문장에 뇌정지가 왔기 때문이다. 실망스럽겠지만 난 그런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보수적이었고 생각보다 앞뒤가 꽉 막혔다. 흔히 말하는 젊은 꼰대이기도 했고 선을 함부로 넘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내가 맞았다. 커뮤니티 사이트에 익명의 게시자로 글을 올리면 비읍시옷이라고 욕이 올라오고 친구들이 들어도 경멸하듯 날 바라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내가 무조건 맞았다.

 과거형이지만 너무나 소중했던 사람이고, 아프지만 추억이 있는 아이이다. 다시 덧칠하면서 바꾸고 싶지 않았다.

 “택시 온다.”

 여전히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붉어진 나는 빈 차라는 반가운 불빛을 내는 택시를 향해 서둘러 팔을 허우적거렸다.

 “오빤 여전하네요.”

 “나도 이제 알았어.”

 “그대로라서 다행이에요.”

 “뭐?”

 “번호 저장해요. 차단하기만 해봐.”

 들켰나? 관심법을 터득했나? 흠칫 놀라고 있을 때 택시가 멈춰 서자 그녀는 택시에 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미안해요.”

 “?”

 “처음 보자마자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용기가 안 나서…. 마지막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미안했었어요.”

 세 번째 뇌정지였다. 멀어지는 택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실 빈 차의 불빛을 내는 택시가 눈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진짜로 팔을 올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으나, 막상 들으니 기분이…. 더럽다. 악의 없는 저 말이 나를 또다시 비참하게 만들었다.

 “병신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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