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나와 평생을 함께해줄래? 그 어떠한 장애물이 와도 내가 치워줄게.
한평생을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
에런의 갑작스러운 청혼에 아직 준비가 안 되어있던 레이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자 에런은 한 발짝 물러서면서 레이첼에게 부담감을 줄여주려고 노력했다.
“레이첼, 음... 지금 답을 원하는 건 아니야, 그저 내 마음을 말해주고 싶었어.
그러니 너무 부담가지지 마. 아, 이 말도 부담스러우려나. 어렵네 하하.”
“......풉, 하하하! 애른, 너무 귀여운 거 아니야. 평소와 달리 너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런 모습이 어색한데, 그게 또 너무 귀엽네. ……에런, 지금은 당황스럽기도 해서 금방은 대답 못 해주겠지만, 조만간 내 마음이 정리되면 그때 말해줘도 될까?”
“어... 어어! 그래. 천천히 기다리고 있을게. 난 그대로 있을 테니까.”
레이첼의 거절이 아닌 긍정적인 말투로 기다려달라고 말하니까, 에런은 방긋 웃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이후 스테이크를 마저 먹고 스테이크 전문점[원 타임]에서 나와 옛 추억을 회상하면서 베이커가 221B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 그래, 애른 혹시 기억나? 그 우리 1주년 기념 여행으로 2박 3일로 한국의 수도 '서울'에 놀러 갔던 일. 그때가 3월 아니면 5월이었던 것 같은데. 아 5월이야? 우리 서울에서 한국 전통의상 한복 입고 광화문에 들어가서 사진도 많이 찍었고, 또 그날 밤에 비가 내려 파전에 막걸리 한 잔 마셨지. 처음 먹는 음식이라 불안했는데 생각보다 맛있어서 너무 좋았어. 근데 첫날에만 여행 느낌 나서 약간 아쉬웠어. 가만 보면 애른, 너 영국의 '명탐정 X난' 같다니까. 그 왜 있잖아. 맨날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사신과도 같은 존재.”
“......나 그 정도는 아닌데. 오늘 봐봐.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났잖아.”
“코X도 맨날 사람이 죽지는 않아. 서울 여행 2일 차에 갑자기 우리가 잠깐 휴식을 취하러 들어간 카페 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결국 네가 나서서 해결해 버렸잖아. 나는 구석에서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지. 그때 보니까 애른, 너 신나 하더라.”
“아니야. 정말 아니야. 내가 왜 살인사건을 즐거워하겠어. 뭐 덕분에 훗날 생길 수도 있을 여러 가지 사건 해결에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한국 경찰과의 연이 하나 생기긴 해서 도움이 되긴 됐지.”
“하 정말, 뼛속까지 탐정이네요. 지겨워 정말! 그러다 나중에 범죄자들에게 해코지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뭐 그땐, 내가 독학한 복싱이나, 주짓수 또는 무에타이로 이겨내야지.”
“낙관적이네. 그러다 총에 맞으면?”
“음...... 그건 힘들 수도? 걱정하지 마, 너를 두고 어디 안 갈 테니까.”
“뭐래, 맨날 사건 생기면 나 버리더니.”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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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그동안에 둘이 만든 추억에 관해 이야기하던 도중 에런이 첫 만남 이후 있었던 일을 꺼냈다.
“레이첼, 혹시 기억나? 5년 전에 너에게 맞은 날 이후, 네게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 과연 날 때린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지? 혹시 나를 만난 적이 있나? 원래 저런 괴짜 같은 성격인가? 이런저런 추측을 많이 했어. 왜냐하면, 너도 알다시피 '셜록 홈즈', '존 H. 왓슨', 그리고 '마이크로프트 홈즈'이 세 인물 덕분에 홈즈 가문은 명문가로 이름을 떨치게 됐잖아. 그래서 그런지 내 친구 '지미 왓슨'을 제외하고는 내 주변인들은 날 어려워하더라고. 그런데 넌 초면인데도 나에게 한 방을 줬었지. 진짜 처음 있는 일이었어. 그래서 오기가 생겨서 반드시 너를 찾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때 당시 너가 아르바이트하던 꽃집으로 달려갔어.”
“맞아. 그때 심부름으로 꽃 배달 도중 너를 만나서 한 대 때렸지. 근데 그때 날 찾으러 꽃집에 왔었어? 아쉽겠지만 그날 허탕을 쳤겠네. 왜냐하면, 그날이 내 마지막 아르바이트에다가 난 줄곧 '로즈'라는 가명을 사용했거든. 근데 이 이야기 저번에도 하지 않았어?”
“맞아. 그래도 오늘따라 또 이야기 하고 싶더라고. 아무튼 그 꽃집에서 단서가 뚝 끊겨버렸어. 이런 사소한 일에 형의 도움을 받기엔 좀 그래서 이 이후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3주 뒤, 우연히 [대영 도서관] 앞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너를 발견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운이 정말 좋았어. 너를 발견한 내가 너의 가명 '로즈'를 부르면서 손을 흔들며 다가갔는데, 나와 눈을 마주친 너는 대화하고 있던 사람을 내 쪽으로 밀치면서 도망갔었지. 그때 정말 황당했었는데.”
“윽, 그런 사소한 일들까지 기억하고 있었어?”
“당연하지, 탐정의 기본소양이지.”
“아 맞다. 레이첼, 그때가 5년 전쯤 되었는데 신기한 게 하나 있어. 물론 내가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긴 하지만, 그때 너에게 밀쳐진 사람이 왜 아직도 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지? 음... 머리는 장발에 은 백발이었고 짙은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고, 나랑 동갑처럼 보이거나 한두 살 더 많아 보였어. 온화해 보이는 인상에 매우 잘생겼는데 근데 왠지 모르게 차가워 보이는 한 남자였어. 아 맞다. 그 남자의 특이한 점 때문에 그런가? 방금 내가 짙은 회색 눈동자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오드아이’였어. 오른쪽 눈이 짙은 회색이었고, 왼쪽 눈이 긴 머리에 가려져서 안 보였는데 바람결에 잠깐 보았는데 보기 드문 빨간색 눈동자였어. 이렇게 그 남자의 생김새에 대해 모든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 그 특이한 남자, 그 사람의 이름이…. 도대체 뭐였더라?”
“...다니엘. 그 사람의 이름은 다니엘이야.”
레이첼이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눈빛으로 에런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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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핫…. 감사합니다. 어떻게 저런 몹쓸 여자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저를 밀치고 도망치고 있는 저 여자랑 아는 사이냐고요? 설마 그럴 리가요. 길을 걷던 제게 [대영 도서관] 열람실을 이용 방법을 물어봤었습니다. 그래서 전 '출입증'이 필요하고 출입증을 만들 때 필요한 몇 가지 서류들에 관해 설명해 주고 있었는데... 이런 봉변을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은 백발의 잘생긴 남자의 설명을 들으며 에런은 속으로 매우 아쉬워했다.
‘젠장, 또 눈앞에서 놓쳤어. 아쉽게도 이 남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어.’
“실은 저도 3주 전에 다짜고짜 첫 만남에 뺨을 맞았습니다. 서로 같은 처지군요.”
“푸하하핫, 아. 이거 웃어서 죄송합니다. 진짜인가요? 하하.
저 여자 보통내기가 아니군요. 혹시 저 여자의 이름을 아십니까? 궁금하네요. 저 발칙한 여성의 이름이. 네?! 가명을 쓴 것 같다고요... 흠... 혹시 저 사람은 범죄자입니까? 그래서 유명하신 명문가 홈즈 가문의 '에런 홈즈' 명탐정님께서 찾아다니시는 겁니까?”
남자의 그럴싸한 추리에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에런은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나저나 저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아직 애송이 탐정인데 말이죠.”
“에이, 애송이 탐정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항구 도시 포크스톤(Folkstone)에서 5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시체를 꽁꽁 위장시켜 아무도 찾지 못하게 만든 최악의 연쇄살인마 '제이콥'을 잡았던 홈즈 씨의 첫 사건인 「사라진 바위」 살인사건 해결 기사를 보면서. 제가 얼마나 당신에게 열광했는데요. 아, 혹시 싸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잠시만요.”
남자는 한껏 들뜨며 검은색 코트 안 주머니에서 작은 갈색 노트 한 권과 만년필을 꺼내 에런에게 내밀었다. 에런은 싸인을 하려다가 순간 머뭇거리고서는 민망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남자의 이름을 물어봤다.
“어... 뒤늦게 물어봐서 죄송하지만,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알려주신다면 평생 기억할게요.”
“그래 주시면 크나큰 영광이죠.
제 이름은 '다니엘 스미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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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그런 일들이 있었단 말이지. 그때 만약 네가 안 왔다면 내가 다니엘이랑 잘 될 수 있었을 텐데, 아 왜 다니엘 잘생겼잖아. 뭐야 애른, 설마 질투하는거야. 진짜로?”
“흥, 누가 질투했다고.”
“저기 애른... 아니 에런, 혹시 만약에 말야. 진짜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좀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좀 더 좋은 추억들을 쌓으며 더욱 행복했겠지? 너무 늦게 만나서 정말 아쉬워. 5년 전, 그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럴 수만 있다면 뺨이 아니라 따뜻하게 안아줬을 텐데. 도서관 이후로 7개월 동안 너가 날 사방팔방으로 찾은 다음에야 만났잖아...”
레이첼이 말을 마치고, 급속도로 표정이 우울해지면서 조용히 눈물을 한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러자 에런은 걸음을 멈추고 왼손으로 레이첼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레이첼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들어 본인을 위로 해주는 에런을 감동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7개월, 널 찾는 데 걸린 시간이야.
고작 7개월. 7개월밖에 안 걸렸어.
1년이 걸리든,
5년, 10년이 걸리든지
널 찾을 때까지 쭉 찾았을 생각이었어.
이 정도면... 별로 안 걸렸잖아. 안 그래?”
진심이 담겨있는 다정하고 따뜻한 위로에 레이첼은 울적한 기분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띠링. 그때, 레이첼의 휴대폰이 울리며 메시지가 왔다. 레이첼은 급격하게 눈동자가 흔들리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 문자를 확인했다.
문자를 확인한 이후, 레이첼의 표정이 약간 씁쓸하고 슬프게 혹은 허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레이첼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 것을 눈치채고 에런은 문자 내용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계속 둘러댔고, 마지막엔 정색하면서 더는 묻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자 에런은 더는 묻지 않고 화제를 음식으로 바꿔 분위기를 밝게 전환하려고 노력했지만, 레이첼의 표정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레이첼은 에런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대충 대답하면서 메시지를 계속해서 힐끔힐끔 확인했다.
『 레 이 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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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미안, 레이첼. 내 하숙집까지 와버렸네.”
“아냐, 그냥 오늘은 네 집에서 같이 있고 싶어서 따라온 거야. 그러니까 재워줄 거지?”
순간 얼굴이 빨개진 에런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참은 채 다시 한번 물어봤다.
“진짜? 자고 간다고?”
“애른,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 이미 우리 할 것도 다 한 사이 아니었어? 설마 네 방 상태 때문에 그래? 각종 실험에 빠져있는 널 내가 모를까 봐? 내 특별히 방 상태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을게. 앗, 신호등 켜졌다. 춥다, 어서 네 방으로 가자.
아, 혹시 네 하숙집 주인인 마리 부인이 싫어하려나? 아 뭐해, 애른 신호등 바뀌었어. 빨리 ㅇ-”
“잠시만, 뭐 하나만 확인 ㅈ-”
끼이이이익! 쿵!!!
갑작스러운 폭음에 콘돔이 있는지 확인하던 에런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까까지 웃으며 대화하던 레이첼이 도로 위에 피를 잔뜩 흘리며 쓰러져있었고, 그녀를 친 흰색 랜드로버 차량은 쓰러진 그녀를 확인하지 않은 채 도주했다.
그때, 에런은 본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짐을 느꼈다.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분노와 슬픔이 가슴팍 가운데서부터 끓어올랐다.
“어? 아아, 아, 아니야…… 어어어아아아아아악!!! 레이첼!!!!!”
단순하고도 강렬한 소리와 함께
이 날, 에런의 세상이 무너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