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악의 여자다.
사랑하는 남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어.
복수를 위해,
내 가족을 위해
기꺼이 내 목숨을 바쳐 ■■■ 당신이
결코 넘볼 수 없는 벽을 무너뜨리는 길에
도움을 줬어. 근데... 그런데 왜.
지금 그리운건 복수도 원망도 아니라
쓰러져있는 나를 살피러 울면서 달려오는
홈즈 아니 에런일까......
그는 알까?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걸.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나, 나는 모르겠어...
그저 운명이 이끄는 대로 휩쓸려갈 뿐이야...’
레이첼이 차량에 치이고 쓰러져있자, 에런의 얼굴이 급속도로 매우 창백해지면서 비명과 함께 레이첼의 이름을 외치면서 허겁지겁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레이첼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에런의 표정이 매우 어두워졌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부상이 매우 심각했다.
오른쪽 갈비뼈가 부러졌고, 몇 번을 굴렀는지 온몸이 타박상을 심하게 입었다. 눈은 피했지만, 왼쪽 눈가 밑에 자상이 크게 생겼고, 후두부 쪽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에런은 생에 단 한 번도 흘러보지 못한 피눈물을 흘러내리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셔츠 주머니에서 깨끗하고 두꺼운 손수건으로 급한 대로 지혈했다. 지혈하면서 AMB(구급차)와 경찰에 전화했고, 구급차가 도착하자 레이첼과 함께 [나이팅게일] 병원으로 이동했다. 달리는 AMB 차 안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있는 레이첼의 모습을 보면서 에런은 굳게 한 가지를 다짐했다.
‘반드시... 반드시!...잡아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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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홈즈 군. 무슨 일인가? 지금 밤 11시 30분이네. 급ㅎ—”
“데런 경감님! 지금 당장 AAOO-AAA 흰색 랜드로버 차량 1대 당장 수배 부탁드리고, 베이커 거리로 뺑소니 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설명 다 해드리겠습니다.” 뚝.
“허어 참, 오래 살다 보니 신기한 일이 다 있군. 명문가 홈즈 가문의 차남 명탐정 에런 홈즈 군이 이렇게 예의 없이 굴다니. 항상 태도가 바른 친구였는데. 다급한 목소리로 보아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해해 줘야겠군.”
데런 경감이 전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바라보며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에런에 대해 의아함을 느꼈다. 그동안에 받은 도움을 떠올리며 에런의 태도는 개의치 않게 생각하기로 하고, 서에 남아있는 부하직원들에게 재빠르게 역할을 분배시켰다.
만약, 방금 같은 상황에 다른 타 경감들이었다면 에런의 태도에 화부터 냈었겠지만, '윌리엄 데런' 경감은 달랐다. 그는 촉과 판단력이 매우 뛰어나고 이성적이고 행동이 빠른 베태랑 경감으로 런던 광역경찰청 소속이다. 그의 별명은 늙지 않는 명사수. 약 55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미궁에 빠진 여러 사건을 해결해 나가기에 주위의 동료들과 상관들이 이러한 별명을 붙였다. 준비를 마치고 베이커 거리로 나가려던 찰나, 부하 경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데런 경감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경감님 지시 사항대로 야간 근무자 5명 중 2명은 CCTV 확인 및 수배로, 3명은 현장으로 보낼 준비를 마쳤는데, 방금 템스강 근처[메트로 은행(Metro Bank)]에서 3인조 강도가 침입했다고 저희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베이커 거리로 지원을 갑니까? 아니면 메트로 은행으로 출동합니까?”
데런의 맑은 파란색 눈동자가 꿈틀거리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생각 정리가 끝난 듯 부하 경위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어느 쪽이든 모두 중요한 사건들이다. 그렇기에 CCTV 팀 2명은 그대로, 베이커 거리 출동하기로 한 3명은 메트로 은행으로 출동해라. 혹시 모르니까 무장하고, 출발하기 전에 대테러무장경찰(Counter Terrorist Specialist Firearms Officer)쪽에도 연락해 협조 요청해. 그리고 나도 곧 출발할 테니까 메트로 은행에서 다시 보자고.”
데런 경감은 오랜만의 강도 사건에 약간 긴장한 채, 책상 서랍에서 '리볼버' 한 정을 꺼내고 약실을 채운 채 허리춤 권총집에 끼웠다. 그리고 집에서 막 나오려고 하던 그때, 순간 한 가지의 촉이 데런 경감을 스쳐 지나갔다.
‘잠깐, 뺑소니와 강도 사건 2가지가 야심한 밤에 동시에?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뭔가 이상해. 하지만... 지체하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수 있어. 일단 강도 쪽부터 확실히 끝낸다.’
그의 뛰어난 촉이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상황이 확실하진 않아 하는 수 없이 일단 메트로 은행으로 데런 경감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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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각. 16일 새벽 0시 50분경 에런은 [나이팅게일] 병원 2층 응급수술실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그저 레이첼이 무사하기를 빌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벅. 저벅.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수술실로 향하는 복도 쪽 코너를 돈 후, 절망에 빠져있는 (에런)홈즈를 발견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그를 본 홈즈는 한참 동안 어두웠던 표정이 약간은 밝아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나이팅게일 병원 생각보다 크네. 나도 이런 병원을 차려야 하는데. 수술실이 여기쯤인가? 분명 이쯤에 있다고... 아, 맞게 왔네. 홈즈, 이게 무슨 일이야?!”
“아, 와줬구나. 나의 친한 벗이자 동료 '왓슨'. 늦은 시간에 불렀음에도 와줘서 정말 고마워. 그게 말이지... 조금 전에…….”
홈즈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지미 왓슨'으로 홈즈 보다 3살 연상인 25살로 꽤 준수한 외모와 영국 신사다운 언행과 품행을 지니고 있어 여성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다. 패션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멋쟁이에 대학교 졸업 후 바로 개업할 정도로 뛰어난 의료 지식을 가지고 있다.
홈즈와는 5년 전,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대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침을 시작으로 둘의 우정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홈즈 그가 대학에서 필요한 지식만 얻고 형의 권유로 [힐링던 기숙학원]을 들어갔을 때도, 홈즈의 첫 사건인 「사라진 바위」 때도, 둘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사건에서 같이 합을 맞추며 해결해 나갔고, 세간에서는 이 둘을 <21세기의 셜록과 존 콤비>라고 부른다.
“뭐? 자네 여자친구인 레이첼이 뺑소니를 당해 심각하게 다쳐 지금 수술 중이라고?”
“맞아. 순식간에 내 소중한 사람이 다쳤어. 의사 일이 한창 많은 걸 알지만 난 왓슨 네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 예전처럼 내 파트너로서 당장이라도 갈갈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뺑소니범을 잡는데 도와줘.”
“홈즈, 당연한 말을 그렇게 길게 할 필요 없어. 내가 언제 자네의 도움을 거절한 적이 있던가? 병원이야 잠깐 휴가 내면 돼. 중요한 건 자네의 일이야. 그러니 그것만 신경 쓰게. 혹시 뺑소니범을 잡을 단서가 있어?”
“왓슨... 정말 고마워. 그리고 단서는 있어. 범인이 차에서 내리지 않고 도주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차량과 차량 번호는 알고 있어. 그래서 내가 아는 –많이 의지하는- 경감님께 협조를 부탁했으니 슬슬 연락이 올 거야. 어라? 하핫. 왓슨 이것 좀 봐. 말하자마자 데런 경감님께 전화가 왔네. 잠시만... 네, 홈즈입니다. ……네?! 그게 무슨!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홈즈는 데런 경감과의 전화가 끝나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벽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쳤다. 그리고 한참 동안 욕지거리를 내뱉은 후 급하게 병원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를 그저 쳐다만 보고 있던 왓슨은 무슨 일인지 물어볼 틈조차 없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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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와 왓슨은 10분간 한참을 뛰어 베이커 거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데런 경감이 다가오며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들을 풀어주었다.
“홈즈 군, 그리고 왓슨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홈즈 군, 미안하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당시 그때는 이게 최선의 판단이었어. 변명은 이쯤하고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을 설명해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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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닉 경위. 확실하게 메트로 은행에서 신고접수 들어온 거 맞아? 맞다고? 그럼 이 상황은 뭔가 도대체! 아무런 일도 없잖아. 당직 근무하고 있던 은행 직원들도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고. 하아... 이게 무슨 일인 건지.”
템스 강 근처 메트로 은행에 도착한 데런 경감과 닉 경위 및 경사 2명 그리고 지원 요청받고 출동한 대테러무장경찰 1팀이 눈앞에 펼쳐진 평화로운 광경에 서로 어리둥절하며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대테러무장경찰 팀장 '딘 멕캘런' 경감이 짜증나는 목소리로 데런의 부하직원 닉 경위에게 다가가 손으로 쿡쿡 찌르면서 몰아붙였다.
“어이 이봐, 자네들 똑바로 확인한거 맞아? 아니 얼버무리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해! 하, 이런 것들도 같은 경찰 소속이라니. 말세군, 말세야. 지금 너희들 때문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이 허무하게 버려진 것을 아느냐 말이야!”
터벅. 터벅. 닉 경위가 필요 이상으로 혼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한 데런 경감은 올라오는 격한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채 맥캘런 경감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여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맥캘런 경감님. 저희 애들이 실수한 것 같습니다. 똑바로 교육하겠습니다.”
“...허 참, 잘 교육하시죠. 선배님. 애들아 가자! 에에잇, 퉤.”
하필 데런 경감이 본인보다 훨씬 선배라 더 이상 말은 하지 못한 채 맥캘런 경감과 무장경찰1팀은 돌아갔다. 맥캘런 경감이 돌아가자, 데런 경감은 부하직원들을 훈육하고 있는 도중 문뜩 이상한 점을 느꼈다.
‘어라?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홈즈 군의 뺑소니 접수 건과 허위 은행 털이범 신고가 동시에 접수될 확률이 얼마나 있을까?... 설마! 맙소사. 이 은행 강도 신고 건을 그저 누군가가 시간을 벌기 위해 벌였다면 분명 뺑소니 쪽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야. 제발 내 감이 틀리기를...’
뚜루루루. 뚜루루루.
생각이 정리되는 그 순간, 불길한 느낌이 데런 경감의 등 뒤를 타고 올라왔다. 그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 CCTV 확인 팀에 바로 연락했다.
“……그래, 알았다. CCTV 수리되면 다시 연락해라.
...젠장, 홈즈 군과의 전화 이후 15분 뒤, 그 근방 CCTV가 전부 먹통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지. 안 되겠어, 무엇을 숨기려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데런 경감이 급하게 부하들과 현장에서 벗어나 20분 만에 베이커 가에 도착했지만, 뺑소니 사고가 일어났던 거리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상태였다. 이에 경감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 눈치채고 홈즈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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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 군, 솔직히 말하면 이 상황이 내 머릿속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네. 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홈즈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한 베이커 거리 상태를 천천히 훑어보고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
“이건 단지 누군가의 소행이 아닙니다. 거대한 세력이 단지 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커다란 망치로 호두를 깨는 것과 같이 작업했습니다. 과했지만 한 번에 반격할 틈조차 없이 완벽하게 깔끔히 부서졌습니다. 솔직히 말해 아직은 감조차도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겁니다. 거대한 악(惡)의 세력의 존재를.”
말을 마치고 거대하고도 어두캄캄한 베일에 싸인 세력을 파헤치려는 듯이 에런은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