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레이?!!”
지옥과 같았던 꿈에서 깬 ‘마르코’는 벌떡 일어나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식은 땀에 온몸이 젖은 자신을 바라봤다.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에 자각한 듯 마르코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두꺼운 짐승 가죽으로 만든 막사 안의 문이 펄이고는 구릿빛 피부의 30대 여인이 들어왔다.
“또 악몽을 꾼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도 마르코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입에 대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윗옷을 입지 않아 붉은 피부와 근육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주전자에서 흘린 물줄기가 그 근육들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자 여자는 민망한 듯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상의를 가져다 마르코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마르코는 말없이 상의를 받아 들고 입으며 말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내 붉은 피부는 께름칙하나 보는군. 하긴 나 또한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르코는 막사 안의 거울의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꿈속에서와 달리 이제 자신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피부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과 다르게 근육질의 몸과 강한 힘을….
“그딴 피부 색깔에 내가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아요? 그런 것이 무서웠으면 애초에 당신을 주어오지 않았겠죠!”
발끈하며 말한 여자는 자신의 말이 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하며 눈을 피해버렸다.
“내 생각이 짧았군, ‘이사벨’. 루시퍼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강한 여인을…. 아직 잠에서 덜 깼나 봐.”
옷을 입은 마르코는 이사벨을 보며 말했다.
“‘사울’ 대장은…?”
“아! 사울 대장이 보자고 하셨어요.”
“그들이 도착한 건가?”
마르코의 눈빛이 번뜩이자, 이사벨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뇨. 대신 남쪽에서 손님이 왔어요.”
“남쪽이라면…?”
마르코가 생각에 잠긴듯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카로스’ 족이 찾아왔어요.”
“그들이 왜?”
좀처럼 감정 표현하지 않는 마르코조차 놀란 듯 물었지만, 이사벨을 쉽게 답하지 못했다.
“다행히 전쟁하자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일단 가봐야 알 것 같아요.”
“그렇군. 그럼 어서 가보지.”
마르코가 먼저 자리를 뜨려 하자, 이사벨은 잠시 머뭇거리다 마르코의 등 뒤에다 대고 말했다.
“이제…. 악몽에서 벗어나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언제까지 과거에….”
그 말에 마르코가 뒤돌아 이사벨을 바라봤다. 그러자 이사벨은 움찔하고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불안한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내가 꾼 것은 악몽이 아니야.”
“네? 하지만 비명을….”
“그 꿈속에서 마드레이를 볼 수가 있는데 어떻게 그게 악몽이겠어?”
“아….”
이사벨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마르코가 오랜만에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사벨도 따라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걱정 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나는 네가 악몽이라는 것을 자주 꾸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면 어쩌면 나타샤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마지막 말을 남기고 마르코가 떠나자, 이사벨은 올라갔던 입 꼬리를 내리고는 입술을 꽉 깨물며 한동안 막사에 혼자 남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장 사울이 있는 막사 안으로 들어간 이사벨은 이미 사울 옆에 마르코가 호위하듯 서 있었고 사울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근육질 몸의 마르코와 다르게 근육과 살이 섞여 커다란 몸집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사울은 평소 강하고 카리스마 있던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의자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사울이 흘끗 자신을 바라보자, 이사벨은 고개를 살짝 숙여 용서를 구하고는 얼른 마르코처럼 사울의 옆자리에 서서 자신들을 찾아온 손님, 이카로스 족을 바라봤다.
나름 서쪽에서 용맹하고 잔혹하기로 소문난 ‘들소 용병단’의 최고 수뇌부들 앞 이것만 이카로스 족의 손님들은 위축되기는커녕 당당한 눈빛으로 서서 사울을 바라봤다.
“이카로스 족의 서열 78위 ‘루칼’이라고 하오. 이쪽은 나를 보좌하는 아이인 ‘관창’이오.”
적당한 키에 마른 근육을 가졌고 머리가 긴 사내가 자신을 루칼이라 소개하면서 자신의 옆에선 10대 남자아이를 소개하자, 사울도 입을 열어 자신들을 소개했다.
“난 들소 용병단의 대장 사울, 이쪽은 부대장 마르코. 그리고 이쪽의 나의 여동생이자 참모인 이사벨이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 이사벨이 마르코와 단둘이 있었을 때와는 다르게 도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카로스 족이 남쪽에서 멀고 먼 여기까지 어찌한 일이십니까. 게다가 일반 전투원도 아닌 전사의 칭호를 가지신 서열 78위분이 직접 오시다니 말입니다.”
이사벨의 말에 루칼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카로스 족에 대해서 잘 아시나 보오.”
“저기 하르마게돈의 놈들도 아니고 바깥세상에서 이카로스 족을 모르는 사람도 있겠습니까?”
이사벨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루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손님에 대해 예우로 하는 말이었겠으나, 이사벨은 없는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카로스 족은 현재 살아남은 인류의 단체 중에 가장 강하다고 손꼽히는 단체 중의 하나였다. 이카로스 족의 시초는 하르마게돈 건국 당시 루시퍼 감염자이면서도 돈이 없어 치료 약인 미카엘을 W컴퍼니에게 사지 못해 버려진 자들이었다. 하르마게돈의 국민이 되지도 못하고 루시퍼를 치료할 수도 없었지만, 그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루시퍼를 극복하게 되었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끼리 모여 민족을 만든 것이었다. 루시퍼를 극복하는 와중에 평범한 인간들보다 강한 생명력과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자연스레 진화하게 되었다.
불모지 같은 남쪽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강한 육체를 동경했고 점차 무력을 가장 중요시하는 민족이 되었다. 이카로스 족에서 가장 강한 자가 족장이 될 수 있었고 그 아래로 차례로 강한 사람들이 족장을 도와 민족을 이끌어 나갔다. 족장을 보좌하고 민족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인 그들은 ‘전사’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 숫자는 고작 100명에 불과했다. 전사는 물론이고 족장이란 자리는 언제나 강자들에게 도전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기에 그 칭호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우리 루칼님은 전사 중에서도 가장 용맹하시고, 마음만 먹으시면 그 이상의 서열을-”
“관창.”
이사벨의 칭찬에 신이 난 어린 전투원인 관창은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루칼의 말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서로가 한가하지 못하다 보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소. 난 민족의 배신자인 ‘리아’라는 여인을 찾고 있소.”
루칼이 말하자, 관창이 얼른 품에서 사진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사벨이 사진을 받아들고는 사울에게 전해주었다. 사울은 인상을 찌푸리며 금발의 젊은 여인을 한참을 보더니 사진을 마르코에게 넘겨주었다. 마르코 또한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루칼을 바라봤다.
“어떤 중죄를 저질렀기에 이카로스 족의 전사가 직접 쫓는단 말입니까?”
이사벨의 물음에 루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부의 일이라 그건 말할 수 없소. 그러나 이 여인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면 이카로스 전사의 명예를 걸고 걸맞은 보상을 약속하오.”
그 말에 아무 말 없던 사울 대장이 잠깐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자세로 바로잡아 앉으며 말했다.
“이카로스 전사의 명예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고 들었소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오.”
루칼의 말에 사울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누구의 부탁인데 협조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 사진을 들소 용병단 전체에게 전하여 찾는 데 최선을 다하겠소.”
“흔쾌히 협조에 응하니 고마울 따름이오.”
“자자, 먼 길 왔는데 하루 머물고 가시오. 내 좋은 술이 많이 있소이다.”
사울의 말에 루칼이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정성은 고마우나, 갈 길이 멀어 지체할 수가 없소. 그 여인을 잡는 날 꼭 그 좋은 술들을 마시러 다시 들리겠소.”
그 말에 사울이 의아한 듯 물었다.
“갈 길이 멀다니. 더 올라간다는 말씀이오?”
“북쪽의 여왕이나, 동쪽의 해적 등 이름난 곳들은 모두 들를 예정이오.”
“부, 북쪽의 여왕과 해적이라니…. 역시 이카로스는 다르오. 하하. 그럼 여행길에 필요한 물자라도 챙겨드리겠소. 이 또한 거절한다면 아니 되오. 하하하.”
사울의 말에 루칼이 피식 웃고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다 한마디 말도 없이 서 있는 마르코가 신경 쓰이는 듯 마르코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마르코 부대장은 혹시 이카로스 출신이오?”
그 말에 이사벨이 놀라 얼른 말했다.
“아, 아닙니다. 이카로스 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이카로스 족이었기에 다른 민족의 부하로 일한다는 것을 무척이나 불명예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사벨이 서둘러 말한 것이었다. 그러자 루칼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카로스 족도 아닌데 우리와 같은 피부를 가지고 있고 같은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러자 마르코가 처음으로 입을 열며 말했다.
“나 또한 루시퍼의 저주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오.”
그 말에 루칼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아니, 이카로스 족이 아니면서도 루시퍼를 이겨낸 사람이 있다니…. 허허…. 역시 세상은 참 넓구려. 술잔을 마주하는 날,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소.”
긍지 높은 이카루스의 전사가 먼저 호감을 표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이사벨은 내심 놀라 마르코를 바라봤지만 정작 마르코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하겠소.”
둘의 대화에 사울이 언짢은 듯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자, 이사벨이 얼른 입을 열어 말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이사벨이 이카루스 족을 데리고 나가자, 막사에는 사울과 마르코 둘만 남게 되었다. 별다른 용무가 없었기에 마르코도 나가려는 듯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사울이 손짓으로 마르코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 ‘피브’마을에서 또 지원요청을 했다는군.”
“또 ‘하이에나’ 놈들이 나타난 것입니까?”
“그런가 봐. 저번에 자네가 하이에나 놈들을 박살 내놔서 기껏해야 피라미 같은 잔당 녀석들이겠지만, 그래도 피브 마을 놈들이 막기에는 버거울 거야.”
“그럼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응? 아, 아. 됐어. 어차피 우리한테 지급할 물자도 더는 없을 건데 내버려 둬.”
사울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하자, 마르코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근방에 마실 수 있는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피브 마을 말고는 몇 군데 없습니다. 이번에 도움을 준다면 값싸게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흐음….”
마르코의 말에 손가락으로 의자를 두드리며 고민하던 사울은 계산이 끝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본인보다 어린 자신에게 언제나 한없이 깍듯한 예의를 갖추는 마르코를 보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의자에서 일어나며 사울이 말했다.
“대신 낙타 상단의 호위 의뢰가 있으니까, 인원은 많이 못 내줘. 근데 이것들은 엊그제 만나기로 해놓고 왜 안 오는 거야. 감히 우릴 기다리게 하다니 많이 컸어.”
“제가 직접 갔다 오겠습니다.”
“자네가 직접?”
사울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지만, 마르코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울이 짚이는 데가 생각 난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기에는 몸이 너무 안달 났나 보군. 그럼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마르코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나가려 하자, 사울이 마르코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자네가 기다리던 자들이 곧 도착할 테니, 너무 오래 끌지는 마. 아, 그리고 낙타 상단 호위 말고도 다른 의뢰들이 있으니까 인원은-”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그 말에 사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충분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