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컴퍼니가 사람들을 모아 하르마게돈이라는 국가를 만들 동안 하르마게돈 바깥세상에도 수많은 국가와 단체가 생겨났었다. 여전히 그들에겐 루시퍼는 치명적인 역병이었고 치료할 방법도 없었지만 수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만의 노하우로 루시퍼에 대항하며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었다.
과거 최초의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 또한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에 주로 모여 살면서 집단을 이루었는데 피브라는 마을 또한 마실 수 있는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작지만 마을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식수의 양이 많지도 않고 작은 마을임에도 근방에서 거의 유일한 마을이라 서쪽을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귀중한 쉼터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인지 마을 사람들보다 외지인들이 많았고, 식수보다는 이들에게 벌어들이는 수입이 더 많았다.
이런 작은 피브 마을이 식수와 관광업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자, 자연스레 인근의 무리들이 호시탐탐 피브 마을을 노리게 되었고 그 중에 하이에나라는 도적 떼가 가장 큰 침략자들이었다. 침략에 지친 힘이 없는 피브 마을은 결국 서쪽에서 가장 강한 집단 중 하나인 들소 용병단에게 의뢰를 하였고 마르코가 부하들을 이끌고 하이에나들을 격파하면서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마르코는 언제나처럼 망토의 두건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뒤에는 커다란 대검을 등에 찬 뒤 말을 타고 피브 마을로 향하였다. 하르마게돈은 빠르게 루시퍼에게 벗어나면서 여러 분야에서 크게 발전하였으나 하르마게돈의 바깥세상은 그럴 여유가 없었기에 문명의 발전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났다. 바깥세상에서는 자동차의 개발은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이렇게 여전히 동물을 이용하여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 그래서인지 하르마게돈 보다는 동물에 대한 사육이나 이용 능력은 더 발전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피부 마을의 입구에 들어서자, 고령의 경비병이 마르코 앞을 막아섰다.
“어디서 오신-”
마르코는 대답 대신 두건을 벗어 얼굴을 보여주자, 고령의 경비병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마르코 부대장님. ‘반스’ 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 날이 저무니, 내일 따로 찾아뵙겠소. 그러니 오늘 하루는 조용히 보내고 싶은데….”
나이만큼이나 연륜이 깊은 고령의 경비병은 마르코의 말을 얼른 알아채고는 길을 비켜주며 말했다.
“은인의 말씀을 따르지요. 오늘 마르코 부대장님이 오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푹 쉬십시오.”
마르코는 고령 경비병의 배려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말에서 내려 말을 이끌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수비병 중에 가장 중요한 보직인 문지기가 저렇게 늙어서야….’
피브 마을 자체의 인구수가 적기도 했지만 최근 잦은 외세의 침략 때문에 싸울 수 있는 인원이 너무나 부족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경비병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성벽도 없이 대충 바리케이드만 쳐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까지 버틴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들 때문에 자신과 같은 용병단이 먹고 살 수
있단 생각이 들자 쓸데없는 관심을 거두기로 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간 마르코는 신분을 밝히면 촌장이 직접 마련해준 나름 고급스러운 곳에서 머물 수 있었겠으나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기에 대충 말을 맡길 수 있는 숙소를 골라잡았다. 숙소에 말과 대검을 두고 나온 마르코는 가벼운 몸으로 잠시 피브 마을을 걷다가 적당한 술집을 발견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어린 소녀가 안내해 준 구석진 자리에 앉은 마르코는 먹을 것과 술을 주문하고는 잠시 술집 안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시끌시끌한 것으로 보아 이곳 피브 마을 사람들보다는 대부분 외지인인 듯했다. 왜냐하면, 하이에나들 때문에 피브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술과 유흥을 즐기고 있을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이에나와 같은 도적 떼들이야 이카루스족과 같은 강한 단체만 아니면 누구도 가리지 않고 죽이고 약탈하겠지만, 그들의 목적은 이 피브 마을 자체였기 때문에 피브 마을 사람들 이외에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피브 마을의 주요 수입원인 외지인들을 건드렸다가 나중에 피브 마을을 손에 넣었을 때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었다. 피브 마을 사람들도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마을 깊숙한 곳에 외지인들을 안전하게 두어 수입을 계속 벌어들였고 하이에나는 이곳까지 침략하지 않는 무언의 규칙 같은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자신의 시킨 음식과 술을 가지고 오는 어린 소녀가 보이자, 마르코는 식사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식사 준비가 무색하게 소녀는 나이 든 남성의 앞에 막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나이 든 남성을 비껴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나이 든 남성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앞길을 번번이 막아서 버렸다.
“죄, 죄송합니다만 잠시 길을….”
무언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지만, 소녀는 애써 밝게 말하자, 나이 든 남성은 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이런 촌구석에 반반한 계집이 있었네?”
“네?”
“그 음식 내려놓고 잠시 앉아 봐.”
소녀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나이 든 남성이 억지로 소녀의 손목을 잡아채고는 자신의 테이블 자리에 앉혔다. 그 모습에 그 나이 든 남성의 일행들은 재미있다는 이죽거리면서도 소녀를 탐욕스럽게 바라봤다. 그들의 행동 때문에 술집 안의 사람들은 조용해졌으나, 굳이 자신들이 나설 이유도 없었고 그 나이 든 남성의 옷이 꽤 비싸 보였기에 괜히 잘못 엮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다시 자신들의 술자리에 집중하였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전 손님에게 음식을 전달 해주러-”
“시끄럽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자, 술이나 한잔 받아 보아라.”
10살도 안 되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술을 권하는 행동에 몇몇 테이블은 눈살을 찌푸리긴 했으나 나서지는 않았고 대부분은 재미있다는 듯 그 소녀를 구경하였었다.
“전 아직 술을 마실 수 없어요.”
소녀의 말에 화가 난 나이 든 남성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마시라면 마시는 거지. 뭔 말이 그렇게-”
“그렇게 술을 남아돌면 내가 마시지.”
나이 든 남성은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젊은 여인이 나타나 소녀에게 권하던 술잔을 빼앗아 들고는 본인이 쭉 들이키자 황당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캬하-. 이 동네 술맛 좋네.”
그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이 든 나이 든 남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인에서 소리쳤다.
“네 이년! 뭐 하는 짓이야?!”
나이 든 남성의 고함에도 여인 아랑곳하지 않고는 나이 든 남성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뭐 하는 짓인데?”
“뭐, 뭐?”
“어이, 꼬맹이.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 종업원이 손님에게 식은 음식을 가져다줄 거야?”
그 말에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이 든 남성은 화가 난 듯 다시 소리쳤다.
“누구 마음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낙타 상단의 부행수 ‘라이그’야!”
“낙타? 낙타가 뭐야? 난 그런 건 모르고, 술집에 술 마시러 왔으면 곱게 술만 마시다 가슈.”
“그런데 이년이?!”
“그만 하세요.”
라이그라는 나이 든 남성은 자신의 앞에 여인과 비슷한 또래의 다른 여인이 나타나 자신을 가로막자 어이가 없다는 듯 새로 나타난 여인을 노려봤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짧게 친 여인은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는 소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러자 머리를 올려 묶은 여인이 난감한 듯 짧은 머리카락의 여인에게 말했다.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
“‘흐엉’님 때문에 일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에이, 이런 자들은 ‘메이’님보다 제가 더 잘 상대해요. 잊으셨어요? 제가 원래 바람의-”
“이년들이 근데?!”
라이그는 더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렸지만,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 타자, 움찔하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뭐, 뭐야.”
라이그 뒤에 나타난 그림자는 마르코였다. 분위기에 압도되었지만 나름 마지막 허세로 마르코에게 소리를 치자, 마르코는 대답 대신 두건을 벗으며 자신의 얼굴을 나타냈다. 라이그는 처음에는 못 알아보는 듯하다가 마르코를 알아보고는 너무 놀라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부, 부대장이 왜….”
“거기 술.”
“예?”
뜬금없는 말에 라이그가 말을 못 알아듣자, 마르코는 소녀가 서빙 하다가 내려놓은 테이블 위의 음식과 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음식과 술이 너무 늦어져서 말이오.”
라이그는 음식과 마르코를 번갈아 보다가 아차 했으나, 술집 안의 시선이 본인에게 쏠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자를 괴롭히든 강자의 모습을 구경하던 이들에게는 그 강자가 또 다른 강자에게 당하는 모습만큼이나 좋은 안줏거리가 없을 것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라이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제법 당당하게 말했다.
“큼. 수, 술과 음식은 내가 다시 사도록 하지. 그러니 자리에 앉아 기다리시오!”
라이그의 말에 마르코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대장께선 낙타 상단의 호위를 맡기 위해 며칠을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술주정이나 부리려고 감히 우릴 기다리게 한 것이오?”
그 말에 라이그도 발끈하고는 비웃듯 말했다.
“그야 언제 가던 고용한 우리의 마음이지! 며칠 기다린 날만큼의 값을 지급하면 되지 않소?!”
“아니, 거래는 없던 걸로 하겠소.”
“뭐, 뭐요?”
마르코는 한걸음 라이크 앞에 더 다가가며 말했다.
“두 번 말하지 않소.”
“큭…. 낙타 상단은 근방에서 제일 큰 상단이오. 그런 상단과의 거래를 아무리 마르코 부대장이라도 함부로 결정할 수는-”
“우리 대장은 그런 것에 관심 없으시오.”
“뭐?”
“낙타 상단과 거래했던 만큼의 대신할 거래처가 있으니, 우리로서는 아쉬울 필요가 없지.”
“마, 마르코 부대장!”
“요즘 도마뱀 상단 때문에 낙타 상단이 꽤 머리 아프다던데…. 얼마 전 그들이 찾아왔었소.”
그 말에 라이크는 사색이 되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의뢰 내용은 말할 수 없으나, 꽤 재미있는 것을 제안하더군.”
“그, 그게 무슨….”
“난 호위 같은 누군가를 지키는 것에는 젬병이오. 대신 누군가를 죽이고 박살 내는 것은 자신이 있지. 그런 나를 재미있게 한 의뢰한 일이니….”
섬뜩한 눈빛으로 마르코가 자신을 바라보자, 라이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마도 자신이 도마뱀 상단이라면 서쪽 지역에서 가장 강한 들소 용병단에게 할 의뢰는 단 하나였을 것이다. 낙타 상단의 파괴.
“허허, 제가 잠시 술에 취해 마르코 부대장님을 언짢게 했나 봅니다. 자자, 내 새로 음식과 술을 주문해 드리고 정식으로 사죄를 올리겠습니다.”
비굴한 표정으로 굽실거리는 라이크를 보던 마르코는 그를 지나쳐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자신의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품에서 돈을 꺼내 소녀에게 쥐여주고는 자리를 뜨려 했다.
“마, 마르코 부대장님? 어딜 가시려 합니까? 같이 식사로도-”
“입맛이 사라졌소.”
“예, 예? 하지만 하던 이야기를 마저….”
“내가 할 이야기는 끝났소.”
마르코는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술집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라이크가 황급히 마르코를 따라가 말했다.
“하, 하지만….”
마르코는 살짝 짜증이 난 듯 인상을 썼다가, 뒤돌아 소녀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내일 다시 이곳에 왔을 때, 저 소녀가 당신의 사죄를 받고 용서를 했다는 말을 듣게 한다면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볼 용의가 있소.”
“네?”
“만약 거짓으로 소녀를 협박하려 한다면 내일이 당신과 낙타 상단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오.”
마지막 말을 남긴 마르코가 술병을 들고 술집을 나서자, 라이크는 욕을 하며 중얼거렸다가 뒤돌아 소녀를 보며 노려보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술병 채로 술을 들이켜던 마르코는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하아…. 하아…. 걸음이 되게 빠르시네요?”
자신을 따라온 사람은 바로 전에 술집에서 소녀를 도와줬던 검은색 머리카락을 짧게 친 여성, 메이였다. 작은 체구였지만 이상하게도 은은하게 강한 여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볼일이 있소?”
건조한 목소리로 마르코가 물었지만, 메이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조금 전에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난 당신을 도와준 적이 없소.”
메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자른 마르코는 다시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전 그렇다 치고, ‘제나’도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그 말에 마르코가 다시 뒤돌아보며 물었다.
“제나?”
“아까 그 술집에서 일하던 소녀 말이에요.”
“난 그 소녀를 도와준 적이-”
“아뇨, 확실하게 도와주셨죠. 그렇지 않나요?”
이번엔 메이가 마르코의 말을 자르며 미소를 머금고 말하자, 마르코는 대답 대신 이번엔 정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버렸다.
“메이님도 참…. 저희 지금 놀러 온 게 아니라고요.”
뒤늦게 흐엉이 뛰어와 메이를 타박하자, 메이가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 너무 신나네요.”
“네?”
“평생 4 지역에서만 지냈었는데…. 세상이 이렇게 넓은 곳인지 몰랐어요. 저도 이정도인데 ‘데메테르’도 같이 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데메테르는 데메테르가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흐엉은 하르마게돈 보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확실히 좋긴 하네요.”
“역시 그렇죠?”
자신의 말에 흐엉이 동의하자, 메이가 신난 듯 말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바깥세상은 하르마게돈보다 공기도 더 좋은 것 같아요.”
“음…. 아뇨. 확실히 더 좋은 것 같아요. 6 지역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마스크를 착용하면 안 된다고 들었을 때는 죽으라고 한 소리인 줄 알았는데, 몇 주 동안이나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녀도 몸에 별다른 무리가 없잖아요.”
“그럼 그것참 이상하네요. 같은 하늘이고 같은 공기인데 왜 하르마게돈과 바깥세상의 공기가…. 아, 참!”
말을 하던 메이가 말을 멈추고 얼른 말했다.
“계산은 했어요?”
“당연하죠. 전직이 술집 사장이었었는데 설마 술값을 떼먹었을까 봐요.”
“그것참 다행이네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식비 좀 줄여야겠어요. 메이님의 술값을 감당하기가….”
“크, 큼. 뭐 저 혼자 마셨나요. 가시죠. 날이 늦었으니 얼른 숙소로 돌아가야죠.”
메이가 황급히 말을 돌리고는 먼저 걸음을 떼자, 흐엉이 메이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1년 만에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가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