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스 촌장은 잠을 자고 있다가 급한 소식에 옷도 제대로 걸쳐 입지 못하고 재빨리 마을 회관으로 달려왔다.
”초, 촌장님! 그러다 몸이 상하십니다!“
반스 촌장에게 소식을 전하러 왔던 실다가 뒤를 따르며 다급히 외쳤지만 반스 촌장은 들리지 않는 듯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어느새 마을 회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온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는 서 있었다.
”마, 마르코 부대장님!“
도착하자마자, 반스 촌장이 마르코에게 인사를 하자, 마르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아직도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듯 반스 촌장은 주변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하이에나의 잔당으로 보이는 스무 명의 사람들이 줄에 묶여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그 맨 앞에는 파비앙을 비롯한 피브 마을의 몇 없는 젊은 청년들이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다만 잔뜩 흥이 오른 다른 청년들과는 다르게 파비앙은 차분하게 반스 촌장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엉겁결에 인사를 받던 반스 촌장은 파비앙의 손에 사람의 머리가 들려진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하이에나의 새로운 두령 트니르의 목과 꼬리를 내린 잔당들이오. 나머진 모두 그 자리에서 죽였으니, 이들이 마지막 하이에나들이라 할 수 있소.“
멍을 때리던 반스 촌장은 마르코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며 얼른 마르코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역시 마르코 부대장이십니다. 한데 팔은….“
붕대를 감고 있는 왼팔을 보고는, 걱정스레 물었지만, 마르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별거 아니오.“
”그럼 다행이군요. 저기 두 분과 같이 의뢰를 완료하신 겁니까?“
용병단과는 거리가 멀게 생긴 젊은 여성, 메이와 흐엉을 보고는 묻던, 반스 촌장은 몸에 무리가 왔는지 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콜록, 콜록. 의뢰를 완료하는데 들소 용병단의 인원이 더 늘었다면 당연히 그만큼의 값을 더 지급하겠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어서 견적을 계산하시지요.“
반스 촌장의 말에 옆에 있던 실다가 재빨리 마을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외쳤다.
”모두 조용히 하세요! 여기 포로들을 들소 용병단에게 드려야 하니 일단 마을 회관에 가두도록 하세요!“
”됐소.“
”네?“
뜬금없는 마르코의 말에 반스 촌장과 실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르코를 바라봤다.
”이 자들은 들소 용병단이 아니오.“
”네? 아 그럼….“
”또한, 여기 포로들은 피브 마을에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시오.“
”예?“
인신매매가 반인륜적이긴 했지만, 인류가 망하고 이제는 공연하게 이루어진 거래였다. 특히 이런 젊은 남성들은 비싼 값에 팔렸기 때문에 스무 명이 넘는 포로들의 값은 제법 많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포로들을 당연히 들소 용병단이 가져갈 줄 알았던 반스 촌장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물었다.
”마르코 부대장님께서 트니르를 죽이고 하이에나들을 잡아 온 것인데 어찌 저희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피브 마을의 의뢰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저기 파비앙과 피브 마을의 청년들이 완료한 것이오. 용병으로서 자신이 한 의뢰도 완료하지 못했는데 어찌 값을 받을 수 있겠소.“
”파, 파비앙이 하다뇨?“
반스 촌장이 놀라 파비앙을 바라보자, 파비앙이 머 쩍은 듯 고개를 숙였다.
”자세한 것은 청년들에게 들으시오.“
마르코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반스 촌장이 급히 말했다.
”그럼 최소한 기본 의뢰 금이라도….“
”들소 용병단을 삼류 용병단 취급을 하는 것이오?“
마르코가 낮은 음성으로 말하자, 반스 촌장은 움찔하였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자질은 그대보다 더 뛰어나나, 아직 너무 어리고 겁이 없소. 그대에 비하면 지금은 한참 부족하지.“
”네?“”그러니 그대가 있을 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할 것이오.“
마지막 말과 함께 마르코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반스 촌장은 마르코의 말이 이해가 갔는지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조심히 가십시오. 마르코 부대장에게 또 한 번 신세를 졌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로코가 떠나자, 마을 대표들이 슬금슬금 반스 촌장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사 한번을 안 하다니, 너무한 것이 아닙니까?“
마을의 대표 중 한 명인 카오룽이 툴툴거리듯 말하자, 반스 촌장이 나무라듯 말했다.
”어허, 은인에게 무슨 말버릇인가?“
”크, 큼. 그게 아니라…. 근데 왜 값도 치르지 않고 가는 것입니까?“
”파비앙과 마을 청년들이 하이에나들을 잡았다고 하더군.“
”네?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카오룽과 마을 사람들이 놀라 파비앙과 청년들에게 고개를 획 돌려 쳐다보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마을 대표 회의를 열도록 하지.“
”예? 아, 예.“
”일단 실다는 마을 사람들을 진정 좀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게. 그리고 카오룽 자네는 하이에나들을 마을 회관에 가두고 엄중히 감시하게.“
”네. 촌장님.“
”네, 알겠습니다.“
”얼른 해산하시고 차알은 나 좀 보세.“
”네? 아, 알겠습니다.“
마을 대표들 뒤에 있던 차알이 깜짝 놀라 반스 촌장을 따라나섰다.
자신의 집에 데려온 반스 촌장이 차 한 잔을 내어주자, 차알이 죄송하다는 듯 말했다.
”무얼 이런 걸…. 저한테 시키시지 그러십니까?“
”아무리 늙은 몸이어도 손님에게 차 정도는 내어줄 기운은 있다네.“
자리에 앉은 반스 촌장이 차 한 모금을 마시자, 차알도 눈치를 보며 차를 마셨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 같네.“
”아이쿠, 무슨 그런 소릴 하십니까? 촌장님이 안 계신다면 피브 마을은 끝장입니다, 끝장. 그러니 어서 병을 털고 일어나십시오.“
차알이 깜짝 놀라며 말했지만, 반스 촌장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대장간은 잘되는가?“
”예? 아, 뭐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됩니다.“
마을 사람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반스 촌장의 뻔한 물음에 차알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성심껏 답했다.
”그래도 하이에나들이 잠시 뜸했을 때 외지인들 방문이 늘어서 그런지 이것저것 잘 팔렸는데…. 뭐 하이에나들을 이번엔 모두 소탕했으니 다시 장사 좀 되겠지요.“
”그러한가? 내가 파비앙을 곁에 좀 두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대장간 일손이 부족하겠군.“
”제 첫째 놈 말입니까?“
차알이 놀란 듯 다시 묻자, 반스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청년회를 만들고 파비앙에게 맡길 생각일세. 그러려면 옆에 두고 좀 가르쳐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아이고, 촌장님도 참.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대장간에서 숟가락 하나도 못 만드는 아이인데 청년회를 맡기신다니요?“
”자넨 나보다 파비앙을 잘 모르는군.“
”네?“
”마을청년회를 만들고 파비앙에게 맡기는 것은 형식적인 것일세.“
”그게 무슨…?“
”보지 못했는가? 이미 마을 청년들이 파비앙을 중심으로 모이질 않았는가? 오늘만 봐도 맨 앞에 서 있더군.“
차알이 기억을 되짚어 보듯 생각에 잠겼다.
”너무 어리기에 혹시나 탈이 날까 봐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 늙은이의 마지막 여흥이라 생각하시게.“
”아, 네. 반스 촌장님의 말이면 뭐든 따르겠습니다. 저희 아이도 반스 촌장님을 존경하고 있으니 좋아할 것입니다.“
”대장간은 괜찮겠는가?“
”둘째 놈과 셋째 놈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매일 아침 우리 집으로 오라고 전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당장 보내지요.“
차알은 아직도 자신의 눈에는 파비앙이 어린아이라 생각했지만, 존경하는 반스 촌장의 말이니 굳이 따질 생각은 없었다. 차를 다 마신 차알은 반스 촌장의 만류에도 굳이 찻잔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한 후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머물던 숙소에서 말을 내오던 마르코는 앞에 서 있는 메이와 흐엉, 그리고 술집의 종업원인 제나를 발견하였다.
”지금 가시는 거예요?“
뛰어왔는지 숨을 작게 몰아쉬며 말하는 제나의 물음에 마르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의뢰가 끝났으니 떠나야지.“
”그럼 이곳에 이제 안 오시는….“
우물쭈물하며 말하는 제나를 보고는 마르코가 말에 실어놓은 짐들 속에서 무얼 하나를 꺼내고는 제나에게 건네주었다.
”들소 용병단의 문양이 새겨진 단검이다.“
”네?“
”누가 널 귀찮게 한다면 그걸 꺼내어 보여주거라. 들소 용병단의 사람임을 알면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소녀에게 주기에는 무서운 선물이네.“
흐엉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메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도 저 나이 때쯤 제 권총을 받았는걸요.“
”하긴 나도 손도끼를 받았으니….“
”용병이니 떠돌아다니다가 피브 마을에 들린다면 널 찾아오도록 하지. 그럼.“
마르코가 다시 말을 끌고 걸음을 옮기자, 제나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몸 건강하세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흐엉을 메이가 툭 치며 말했다.
”뭐해요? 우리도 따라가야죠?“
”네, 네?“
”제나, 잘 있어! 또 올게! 어서요!“
”어디를 가요?“
”어차피 들소 용병단에 가야 하는데 같이 가면 되잖아요?“
흐엉이 대답도 하기 전에 메이는 흐엉을 억지로 끌고 가버렸다.
”자, 잠깐만 나도 제나한테 인사 좀! 제, 제나! 몸조심해! 누가 괴롭히면 그냥 단검으로 쑤셔버려!“
”네? 아, 네. 언니들도 몸조심하세요!“
지금까지 봐왔던 성격이었다면 분명 자신들을 귀찮게 여기거나 버리고 갈 것이 생각했었지만 별다른 말없이 앞장서 걷는 마르코를 보며 흐엉이 메이에게 말했다.
”의외로 스윗하네요?“
”그러게요. 말도 타지 않고 속도도 맞춰주고-“
말을 하던 메이는 마르코가 갑자기 뒤돌아보자, 움찔하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날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지.“
”얼마나 남았어요?“
”이틀이면 도착하오.“
”생각보다 머네요?“
”말을 탔으면 금방 도착했겠지.“
”크, 큼. 불이라도 피울까요?“
모닥불을 피우고 피브 마을에서 가져온 감자를 구워 먹은 메이는 나름 포만감이 든 듯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바깥세상도 밤하늘은 같네요. 낮엔 그래도 제법 푸르스름하던데….“
”달이나 별을 이야기 하는 것이오?
“어? 알고 있으세요? 원래는 밤하늘은 저렇게 뿌옇지 않고 멀리서 전등이 켜진 것처럼 무수하게 빛나는 별들과 달이 있대요.”
“에이…. 태양도 아니고 어떻게 그래요? 그랬으면 까만 밤이 아니라 훤한 낮이겠죠.”
흐엉이 못 믿겠다는 듯 말하자, 마르코가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몇 개 던지며 말했다.
“우주에 나가면 여기 지구와 같은 행성들이 수백, 수천 개, 아니 셀 수도 없이 존재하오.”
“예? 그럼 그곳에도 사람이 사는 거예요?”
“글쎄…. 300년 전 인류가 멸망하기 전에는 우주 탐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외계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소.”
“우주 탐사요? 지구 밖으로 나갔단 말이에요?”
놀란 흐엉이 묻자, 마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떠도는 소문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우주 탐사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서 살기 위해 비밀리에 작업 중이었다고 하더군. 나도 믿지는 않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아직도 그들이 우주에서 생활을-”
말을 하던 마르코는 자신의 말에 심취에 듣고 있던 메이와 흐엉을 보고는 자신이 너무 말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와…. 생각보다 지식이 많으시네요?”
메이의 물음에 마르코가 잠시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예전에….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들이오. 아주 똑똑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친구였지….”
“저번에 물어봤던 사람 중에 한 명인가요?”
“그렇소. 나의 동료, 친구, 아내 그리고…. 내 딸의 이름이오.”
마르코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흐엉은 궁금한 듯 물었다.
“어쩌다 바깥세상의 용병이 된 거예요?”
마르코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고국의 사람을 만나서인지, 아니면 분위기 때문인지 평소와 다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불법 출생을 했다는 이유로 나의 마을이 습격당했고 모두를 잃게 되었소. 그중에 난 루시퍼의 감염이 되어있었기에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생각했는지 바깥세상으로 버려졌지. 그러다 지금의 참모인 이사벨인 어린 나이에 날 발견하고 구해주고 치료해주었소. 그 뒤로 인연이 되어 그의 오빠인 사울 대장을 따라 들소 용병단을 만들었고 같이 생활하고 있을 뿐이요.”
“루시퍼요? 근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예요? 그들이 미카엘이라도 갖고 있었던 건가요?”
메이가 놀라 물었지만, 마르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왜 웃어요?”
민망한 듯 메이가 말하자, 마르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예전에 하르마게돈에서 막 나왔던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오. 하르마게돈은 지구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임은 틀림없지만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없소. 너무 편협하고 자만하지.”
“그게 무슨…?”
“바깥세상이니, 6지역이니 같은 단어도 자기들 중심적인 단어 아니오? 그저 한 국가 중 하나일 뿐인데 자신들이 유일한 국가인 마냥….”
“그럼 다른 국가가 있단 말이에요?”
“당신도 보았지 않소? 하르마게돈 말고도 무리 지어 생활하는 사람들을 말이오.”
“하, 하지만 그건….”
“하르마게돈 보다 큰 영토를 가진 국가도, 더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도 존재하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이 있으니 하르마게돈에서 겪은 일들로만 생각하려면 바깥세상에서 생활하기 어려울 것이오.”
“아무튼, 그럼 루시퍼는 나은 거요?”
흐엉이 못마땅한 듯 투명스럽게 묻자, 마르코가 다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W컴퍼니가 루시퍼를 없애기 위해 미카엘을 만들었을 땐 바깥세상에선 루시퍼와 공생하는 방법은 찾았다오.”
“네? 그게 무슨?”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잠을 자야겠소.”
궁금한 흐엉을 두고 등을 돌려 자리에 누운 마르코는 눈을 감아버렸다.
“어이, 이봐요! 이렇게 말하다 끊는 게 어딨어?”
“자, 자. 시간이 늦었으니 우리도 자요. 이틀 동안 천천히 들으면 되잖아요.”
“아…. 이러면 잠 못 자는데….”
툴툴거리는 흐엉을 메이가 달래주자, 흐엉은 그제야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물어볼 테니까 딴말하지 마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