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저문 깊은 저녁, 홀로 자신의 막사에서 술 한 잔을 하고 있던 사울은 자신의 막사에 들어오는 이사벨을 보고는 말했다.
“무슨 일이야? 내일 일찍 떠나야 하니 얼른 잠이나 자.”
“오빠가 정말로 마르코 부대장을 보내줄 줄은 몰랐어.”
“흥, 내가 붙잡아 두기를 바랐던 거지? 악역은 항상 내 몫이었으니 말이야.”
“정말 보낼 거야?”
“그와 20년 전에 거래한 내용이야. 그는 나의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고, 난 그가 하르마게돈으로 돌아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한다. 용병에게 신용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 그러니 당연히 보내야지.”
이사벨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사울의 맞은편에 앉더니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이, 술도 못 마시면서 적당히 마셔.”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아?”
막사 안에 잠시 적막이 흐르다가 사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르코를 따라가고 싶다면 같이 따라가.”
“뭐?”
이사벨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사울은 다시 술 한 잔을 마시고는 말했다.
“여동생이 용병으로 계속 생활하길 바라는 오빠가 어디 있겠어? 게다가 넌-”
“마르코 부대장에 나까지 없으면 들소 용병단이 제대로 돌아가겠어?”
“흥, 나 혼자서도 충분해.”
“당장 마르코 부대장이 들소 용병단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용병단에서 우릴 노릴 거야. 특히 박쥐 놈들이나 해마 놈들같이 우리에게 악감정이 있는 놈들이라면 내일이라도 바로 쳐들어올걸?”
“그깟 놈들이 떼거리로 달려와도 안 무서워. 우린 들소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진작에 놈들을 청소하자고 했잖아?”
“게네들이 있으니까 우리 용병단이 빛이 난 거야. 잔소리하려면 그만 나가봐.”
사울이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자, 이사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부하들을 이끌고 마르코 부대장을 배웅하는 김에 하르마게돈 근처에서 기다렸다가 의뢰에 대한 계약서까지 체결하고 올 거야. 그리고 오는 길에는 마르코 부대장이 맡았던 피브 마을까지 해결할 거고.”
“그래,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네가 더 바빠지겠군.”
“언제는 안 그랬나?”
이사벨이 막사의 밖으로 나가기 전 뒤돌아 작은 목소리로 사울에게 말했다.
“적당히 마셔. ‘대장’답지 않으니까 말이야.”
잠이 오지 않는지 메이는 자리를 뒤척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뭐해요? 내일 바로 떠나면 며칠 동안은 행군해야 한다고요. 어서 주무세요.”
옆에서 자고 있던 흐엉이 잠에서 깼는지 졸린 목소리로 말하자, 메이가 침상에 앉고는 말했다.
“흐엉님도 안 주무셨어요? 그럼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아니, 딱 봐도 자고 있었잖아요? 이야기는 내일 해요.”
귀찮다는 듯 흐엉이 다시 눈을 감으려 했지만 메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마르코 부대장이 하르마게돈에서 무얼 하려는 걸까요?”
“그야 저번에 말한 사람들을 찾겠죠.”
“하지만 모두 잃어버렸다고….”
“글쎄요…. 눈앞에서 본 것이 아니라면 믿기 어렵겠죠. 메이님이라면 소중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면 그걸 순순히 믿겠어요?”
“그건….”
“그리고 무엇을 하던 무슨 상관이에요? 들소 용병단과 거래가 성사될 것만 생각하세요. 직접 와서 보니 규모도 제법 크고 용병들도 강해 보이는 것이 이만한 용병단을 찾기 어려울 거예요. 게다가 일이 잘못되면 베아니스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고요.”
“그러게요…. 엘리시온의 임무를 앞두고 왜 이렇게 잡생각이 나는지….”
“아직도 ‘성녀’였던 버릇을 못 고치셨나 봐요.”
“흐엉님? 그 단어는 꺼내지 말라고 했죠?”
“에고…. 잠이 덜 깨서…. 그러니까 얼른 주시십쇼. 제 잠도 그만 방해하고요.”
“쳇, 알겠어요.”
이른 아침 메이와 흐엉은 마르코를 비롯한 십여 명의 들소 용병단의 일원들과 떠날 준비를 끝냈지만, 사울이 나오질 않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잠시 뒤 이사벨이 한숨을 내쉬며 메이와 흐엉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숙취 때문에 힘드니 그냥 떠나라고 하시는군요.”
“너무 솔직하게 말씀하시네요?”
흐엉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자, 이사벨이 자신의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동맹이 될 사이이니 솔직해야 하잖아요? 말은 타실 줄 아시죠?”
“그럭저럭요.”
흐엉이 들소 용병단에서 준비해준 말에 올라타자, 메이도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들소 용병단에서 실무는 원래 제가 다 담당하고 있으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이제 출발하시죠.”
“네~, 네.”
“마르코 부대장님?”
모두가 말에 탔음에도 마르코가 말에 타지 않자, 이사벨이 걱정되듯 불렀다. 그러자 마르코가 자신의 말을 말뚝이 묶으며 말했다.
“먼저 출발해. 곧 따라잡을 테니 말이야.”
마르코가 사울의 막사로 향하자, 이사벨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자, 가시죠.”
침상에 누워있던 사울은 누군가 자신의 막사에 들어오자, 귀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출발하라니까, 이사벨.”
“접니다.”
사울은 마르코의 대답에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뭐야? 안 갔어?”
“용병이 대장의 허락도 없이 떠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이야? 우리 계약은 이제 끝났어. 대장이란 말도 인제 그만둬.”
“대장이 허락하지 않으면 떠나지 않겠습니다. 아직 위험 요소인 세력들도 많으니 다음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 집어치워.”
사울은 침상에서 일어나 탁자에 놓은 물병을 들어 물을 마시고는 말했다.
“용병답게, 사내답게 헤어지자고.”
그러자 마르코가 피식 웃어버렸다.
“이별 선물은 딱히 없고 가다가 배고프면 이거라도 먹어.”
사울이 어제 안주로 먹던 육포 조각을 집어 던져주자, 마르코는 건네받은 뒤 육포 조각을 바라봤다.
“쳇, 그깟 육포 조각이 뭐라고 어릴 때 그렇게 처맞았는지. 생각해 보면 그 선배들도 너무 했어.”
“덕분에 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뭐, 환자가 먹기에는 부담스러웠지만요.”
좀처럼 보기 힘든 마르코의 농담에 사울도 피식 웃어버렸다.
“하르마게돈의 생활이 따분하면 언제든 돌아와. 부대장 자리가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자리를 잡으면 하르마게돈으로 저녁 식사 자리라도 초대하겠습니다.”
“그래, 기대하지.”
“그럼, 이만.”
마르코가 이제 미련 없이 떠나자, 사울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텅 빈 막사 안을 괜스레 둘러보았다.
“벌써 허전하네.”
삑- 삑- 삑-
요란스러운 기계음이 울린 후 캡슐이 열리자 10대 초중반의 여자아이가 걸어 나왔다.
“수고했어, 데메테르.”
주황빛의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묶은 30대 후반의 여인이 가운을 건네었다. 그리곤 책상에 위에 있는 안경을 들어 쓴 후 컴퓨터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데메테르라 불린 여자아이는 알몸인 모습이 익숙한 듯 자연스레 가운을 입으며 말했다.
“좀 어때요, 엘레나 박사님?”
“아직 진전이 없어.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할 것 같아. ‘그’ 녀석이 나보다 생체 회복 기술에선 더 전문가야.”
“그런가요? 제가 1 지역에 있었을 땐 그분이 항상 엘레나 박사님이라면 더 뛰어나게 절 만들었을 거라고 말씀하시던데요?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는 없다고 말씀하시면서요.”
“스승은 무슨….”
대화를 하던 두 사람은 실험실의 문이 열리자,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여~ 별일 없으시죠?”
부스스한 머리에 담배를 문 여인이 졸린 듯 하품을 하면서 들어오자, 엘레나가 눈썹을 구기며 말했다.
“이곳은 금연이라고 했지? 베아니스?”
“불 안 붙였어요. 자, 봐봐요.”
베아니스가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집어 보여주었지만, 엘레나는 여전히 컴퓨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는 말했다.
“씻는 것도 귀찮아하는 사람이 연구실은 왜 만날 찾아오는 거야?”
“그야 데메테르 때문이죠.”
“저요?”
데메테르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자 베아니스가 데메테르의 머리카락을 헝클어지도록 쓰다듬고는 말했다.
“너에게 이상이 생기면 날 죽이겠다고 협박한 녀석이 있어서 말이야. 몸은 괜찮지?”
“아, 네 그럼요. 엘레나 박사님이 치료해 주신 뒤로 큰 이상은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 박사님도 아시죠? 생체 개발연구도 중요하지만, 데메테르의 건강이 일단 최우선이에요.”
그 말에 엘레나가 안경을 벗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1 지역에 있을 땐 생체 연구 관련해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지. 못 미더우면 지금이라도 이곳에서 떠날게.”
“어이쿠. 죄송합니다.”
베아니스가 장난스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엘레나는 못마땅한 듯했지만, 다시 안경을 쓰고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봤다.
“데메테르는 그만 나가봐.”
“네? 아직 몸이 괜찮아요. 한 번 더 캡슐에-”
“점심시간이잖아. 밥 먹고 와.”
“그럼 박사님도….”
“난 됐어. 데메테르좀 부탁할게, 베아니스.”
아쉬운 듯 데메테르가 엘레나를 바라봤지만, 엘레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자 베아니스가 한숨을 내쉬더니 데메테르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이 보모역할도 곧 끝날 테니 추억이나 더 쌓자고.”
“그게 무슨?”
“메이님과 흐엉이 곧 돌아올 거야.”
“그게 정말이에요?”
데메테르가 기쁜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로 말하자, 엘레나가 눈썹을 구기며 말했다.
“사적인 이야기는 나가서 해줄래?”
“네~, 네. 죄송합니다.”
데메테르와 연구실에서 나온 베아니스는 여전히 잠이 안 깬 지,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을 했다.
“밥 먹는 것도 귀찮아.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는 약 같은 걸 개발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치?”
“전 음식 먹는 것이 즐거워서, 그런 약이 있어도 안 먹을 것 같아요.”
데메테르는 대답하면서도 베아니스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러자 베아니스가 데메테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뭔데? 아까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래?”
“아, 그게….”
데메테르는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엘레나 박사님이 나쁜 마음이 있으셔서 베아니스님에게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 아닌 거 아시죠?”
베아니스는 의외의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푸하하하. 당사자인 나도 신경을 안 쓰고 있는데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네?”
“이래서 메이님과 흐엉이 널 그렇게 좋아하나 보다. 보모역할을 끝내기 아쉬운 걸?”
“무, 무슨 말씀이세요.”
계속 웃는 베아니스 때문에 부끄러운지 데메테르의 얼굴이 빨개지자, 베아니스는 웃음을 거두고는 데메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엘리시온이 엘레나 박사에게 한 짓이 있으니 당연한 거야. 이곳에 남아서 같이 일하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지.”
“그게 무슨….”
“자세한 건 알 필요 없고. 나도 엘레나 박사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아. 물론 엘리시온들에게는 아직 악감정이 남아있으니 까칠하긴 하지만…. 그래도 메이님이나 너한테는 나름 살갑게 굴잖아?”
“저한테요?”
“몰랐어? 무뚝뚝한 양반이라 대놓고 표현은 못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표현한 것 같은데….”
“아….”
“어이쿠, 늦겠다. 나 결재해야 할 서류가 한가득해. 알지? 이래 봬도 외교부 준간부인거? 얼른 가자.”
걸음을 재촉하던 베아니스는 복도에서 나온 남성을 발견하자,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하였다.
“마얀 박사님도 이제 식사하러 가세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키가 작고 머리카락 숱이 없는 마얀이 몸을 돌렸다. 그러다 베아니스 옆에 있는 데메테르를 보고는 입술을 씰룩거리고는 말했다.
“생체연구부에 들렀다 오시는 겁니까?”
“네? 아, 네. 하하.”
베아니스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지만 마얀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더께서도 그렇고 다들 진전이 없는 생체연구부에 매달리시는지…. 우리 과학기술부에 그만한 집중과 투자를 했다면 벌써 더 큰 성과가 있었을 겁니다. 강경파 출신이라고 차별하는 것이지 쯧.”
마얀이 획 돌며 자리를 뜨자, 베아니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게 악감정이라는 거란다. 마얀 박사님은 당분간 피해 다니도록 해.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