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저녁. 너울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밀란에게 차를 내어주고는 눈을 감고 계속 떠는 밀란의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해야만 합니까? 예전보다는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너울님이 나서시기만 하면 다른 강경파 동지들이 따라나설 겁니다.”
“또다시 내전을 벌이자는 건가?”
눈을 뜬 너울이 지그시 바라보자, 밀란은 눈빛을 더욱 빛내며 말했다.
“못할 건 또 있습니까?”
“허허….”
“지금 제나일과 온건파 놈들이 어떻게 정권을 잡았습니까? 그들도 내전을 통해-”
“가비님께서 양보를 해주신걸세.”
“물론 존경하는 가비님께서 저희 동지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셨지만, 그들은 그 후 어떻게 했습니까?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가비님을-”
“밀란!”
낮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엄중히 꾸짖자, 밀란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거두었다.
“가비님은 공식적으로 병사하셨네.”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봉에 서서 전투에 나셨던 분이 리더 자리를 제나일에게 넘겨주고 은퇴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병사라뇨?”
“공식적인 발표일세…. 그러니 ‘지금’은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말게.”
“그럼 정말 이대로 있으실 겁니까?”
너울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불꽃은 어떻게 됐나?”
“쳇…. 그놈들이 가비님 명 없이 움직이겠습니까? 목숨보다 가비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들이라 가비님의 유언을 어길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불꽃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전면전은 무리일세.”
“너울님!”
“병권을 모두 뺏겼어. 고작 첩보부만은 자네가 간부 자리를 지켰다고는 하나, 우리들만으로 ‘빙결’을 상대하기는 무리야. 그래서 불꽃이 꼭 필요한 걸세.”
“불꽃만 있다면 빙결 따위가 대수겠습니까? 하지만 도저히 그들이….”
끓어 넘치는 감정 때문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밀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섣부른 행동은 삼가고 지금은 한 명이라도 더 우리 쪽으로 넘어올 수 있게 포섭에 힘을 쓰시게. 다른 동지들한테 은밀히 움직이라고 전하고.”
“두 파벌 간의 감정의 골이 깊고 저희가 힘을 잃은 상황인데 누가 넘어오겠습니까?”
자신 없는 듯 투덜거리며 말하자, 너울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건 모르지.”
“네?”
“외부에 싸울 상대가 있을 때야 내부적으로 뭉쳐지겠지만…. 지금처럼 싸울 상대가 외부에 없다면…. 내부에서 싸울 상대를 찾는 법이라네.”
“아….”
“어떤 사상을 가졌든 간에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알겠습니다. 곳곳에 심어둔 동지들이 있으니 그들을 움직여 보겠습니다.”
“자, 당분간은 여기서 주무시면 돼요.”
엘리시온의 본관 건물 중에 빈 곳을 마르코에게 내어주었지만 애초에 창고로 쓰던 곳이라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마르코가 방을 둘러보자 메이가 재빨리 다시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저희와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셔서 너무나 감사하지만, 아직 몇몇 간부들은 의심하고 있어서….”
“이해하오.”
“거, 밖에 나가게 될 수 있다면 내가 술 한 잔 사지.”
흐엉도 신경 쓰이는 듯 벽에 기대어 슬쩍 말하자, 마르코는 자신의 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있었을 땐 5 지역에선 밀가루를 반죽해서 넓게 펴 기름에 부쳐 먹는 것이 유명했었는데….”
“아, 부침개 말이지? 좋아 그걸 사도록 하지.”
“누가 오는 것 같군.”
마르코의 말대로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는 10대 소녀가 문을 조심히 열었다.
“허억…. 허억…. 죄송해요…. 여기 계신다고 해서….”
“데메테르!”
“데메테르! 잘 있었어?!”
흐엉과 메이가 동시에 활짝 웃으면 데메테르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
“미안해, 데메테르. 돌아오고 곧바로 너한테 가려 했는데 일이 있었거든.”
“야, 너 더 키가 큰 거 같다?”
흐엉이 거칠게 머리를 쓰다듬는 바람에 휘청거렸지만, 데메테르는 행복한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엘레나 박사님한테 방금 들어서 이제야 온 거예요!”
“그래? 그 깍쟁이 박사님이 못살게 굴지는 않았고?”
“전혀요! 흐엉님도 잘 아시잖아요?”
데메테르가 올림포스의 힘을 과하게 쓰는 바람에 생명이 위험했을 때 치료해 준 사람이 엘레나였다. 무뚝뚝한 성격만 뺀다면 좋은 실력을 갖춘 의사이자 박사라는 것을 흐엉이 모를 리 없었다.
“몸은 괜찮은 거지?”
“메이님도 참. 최근 1년 동안 한 번도 아픈 적 없었잖아요.”
“그래도 조심해야 해.”
“네, 알겠어요. 그런데….”
데메테르가 궁금한 듯 마르코를 바라보자, 메이가 재빨리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6 지역-, 아니 바깥세상에서 들소 용병단이라는 유명한 용병단의 부대장이신 마르코 부대장님이셔.”
“와…. 바깥세상이요? 바깥세상 사람은 처음 봐요. 바깥사람들은 모두 저렇게 피부가 빨개요?”
“데메테르!”
악의 없는 말이었지만 메이가 재빨리 눈치를 주자, 데메테르는 의아해하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괜찮소. 바깥세상 사람도 너와 똑같단다. 물론 생김새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같은 사람이야. 그중에서도 난 특이하게 붉은색 피부를 가졌을 뿐이고.”
“아…. 그렇군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데메테르가 얼른 고개를 숙이자, 마르코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듯 하여지자, 흐엉이 데메테르에게 말했다.
“앞으로 외교부 소속으로 우리랑 같이 생활하기로 했으니까, 바깥세상 궁금하면 언제든 마르코 부대장을 찾아와.”
“와, 진짜 그래도 돼요?”
“흐엉님!”
이번엔 메이가 흐엉에게 주위에도 주었지만, 흐엉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마르코 부대장도 심심할 것 아니에요?”
“하지만….”
“난 괜찮소. 아, 그런데…. 이제 부대장이란 호칭은 뺏으면 좋겠는데….”
“아, 그렇네요. 이제 여기서 생활하실 거니 그렇게 할게요.”
“고맙소.”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푹 쉬시고 내일 다시 올게요.”
“알겠소.”
“안녕히 주무세요. 마르코님!”
“잘 자거라.”
“의외로 아이들한테 다정다감하단 말이죠?”
자신들의 숙소에서 침대에 데메테르를 재워두고는 술을 마시던 흐엉이 말하자,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신의 딸 때문이 아닐까요?”
“아….”
“가족은 없지만, 가족만큼 소중했던 친구들을 떠올리면 마르코님의 심정이 이해가 가요.”
“친구? 아, 그 어렸을 적에 같이 생활했다던 사람들 말이죠?”
“네, 맞아요. 각자의 길을 가느라 헤어져서 못 본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제게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헤어진 지 20년도 넘었다면서 기억이나 나세요?”
“그럼요. 중간에 편지도 쓰고 멀리서 서로를 본 적도 있거든요.”
“흠….”
“흐엉님도 가족만큼 소중한 사람이 있나요?”
“가족은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다 죽었네요.”
“네?”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을 안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는데…. 4 지역으로 파견된 순간, 부질없는 다짐이 되어버렸죠.”
“아….”
“그래도 지금은 메이님과 데메테르만 생각할 거예요. 너무 많은 사람을 떠올리면 임무에 방해되거든요.”
“그럼 저도 흐엉님과 데메테르만 생각해야겠네요.”
“메이님은 술 생각뿐이잖아요?”
“아니거든요!”
“오늘만 해도 임무 끝나서 복귀하자마자, 술을 마시다니….”
“누가 보면 저 혼자 마시는 줄 알겠네요.”
“아, 들소 용병단 파견은 과학부의 캐스가 간다고 하던데요?”
“캐스가요? 성인도 아닌 아이를 보낸단 말이에요?”
“들소 용병단에게 도움이 되려면 과학부에서 차출하는 게 맞기도 하고 본인이 적극적으로 원했다고 하더라고요. 캐스 녀석의 호기심이라면 당연히 그럴법한 아이죠.”
“그래도 그렇지….”
“근데 제 생각엔 마얀님이 꾸미신 것 같아요.”
“마얀님이요?”
“아시잖아요? 어린 캐스가 천재 소리 들으면서 벌써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마얀님 성격상-”
“흐엉님! 사실도 아닌 이야기를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최근에 생체연구부가 신설되고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마얀님에서 엘레나님에게 쏠리는 바람에 마얀님의 심기가 불편하잖아요. 그런데 밑에서는 치고 올라오니 이해는 가는 일이죠.”
“흐엉님?”
다시 한 번 주위에도 주자, 흐엉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알겠어요. 입 다물겠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아침 일찍 찾아온 메이와 흐엉을 따라 베아니스 집무실로 찾아갔다. 베아니스는 생각보다 호의적인 태도로 마르코를 맞이했다. 아마도 마르코에게 얻어낼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 그럼 다시 정리하자면…. 북쪽은 얼음 여왕이, 동쪽은 해적왕이, 남쪽은 이카루스 족이 다스리고 있다는 말이죠?”
집중하며 메모를 하며 정리를 하던 베아니스가 묻자, 마르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스린다기보다는 현재 가장 강한 세력이란 말이 올바릅니다. 그 의외에도 다양한 세력들이 있고 비견 될만한 세력도 있긴 하지만 일단은 그 정도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그럼 서쪽은요? 들소 용병단이 가장 강하나요?”
“서쪽은 딱히 주인이 없습니다. 모두 비등비등해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죠. 물론 그중에서 제가 있었던 들소 용병단이 강한 축에 속하긴 합니다.”
“흠…. 그럼 역시 서쪽에서부터 엘리시온의 세력을 키우는 게 좋겠네요.”
“시작하기에는 가장 나을 것입니다.”
“그래도 북동남의 주인들한테 선물과 사람들 보내어 인사라도 하는 게 나을까요?”
“아뇨. 워낙 제멋대로인 자들이라 선물을 좋아할지 싫어할지 모릅니다. 변수가 있는 곳에 굳이 투자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호….”
생각보다 마르코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자 베아니스는 마음에 드는 듯했다.
“일단 지금 말씀해주신 걸 문서로 작성해서 아친님에게 보고 드려야겠네요. 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뭐야, 끝났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흐엉이 기지개를 피며 말하자, 베아니스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다.
“엘리시온에 충성을 다 하라고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밥값은 하자?”
“뭐래. 엊그제까지 바깥세상에 갔다 온 것 몰라?”
“식사 시간이네요.”
두 사람이 싸우기 전에 서둘러 말하자, 베아니스가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아, 식사하러 갔다 오세요. 마르코님은 당분간 메이님과 같이 다니면 돼요.”
“같이 다니면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어…. 메이님 경호요.”
“?”
자신이 알기로는 간부가 아닌 직급이 없는 일원으로 알고 있는데 경호라고 하니 마르코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흐엉이 있긴 하지만, 메이님의 경호원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베아니스님, 전-”
“안 돼요. 리더의 명령이기도 해요. 애초에 두 분이 바깥세상에 나간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고요.”
“알겠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베아니스의 말에 메이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러자 흐엉이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밝게 말했다.
“자, 데메테르한테 갈까요?”
“이곳은 엘리시온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 중의 하나인 생체연구부입니다. 어제 봤던 데메테르랑 엘레나 박사님 두 분으로만 구성되어 있죠.”
“가장 중요하다면서 두 명뿐이오?”
“엘레나 박사님이 일당백 역할을 하기도 하고 좀 예민하셔서….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메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흐엉이 뒤에서 마르코에게 말했다.
“까칠한 분이니까 조심해요.”
“안녕하세요, 엘레나 박사님.”
데메테르와 이야기를 나누던 엘레나는 메이를 발견하고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표정이 풀어지고는 인사를 하였다.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네, 아주 건강하답니다. 아, 이쪽은….”
메이가 마르코를 소개하려 하자, 엘레나는 흥미로운 눈빛을 하며 말했다.
“외지인이군요. 한데….”
엘레나가 불쑥 마르코에게 다가가자, 메이는 당황한 듯 마르코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 하르마게돈 사람이라 들었는데 처음 보는 피부색이군요. 후천적으로 변한 것 같은데…. 골격이나 근육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발달 되었네요?”
“루시퍼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루시퍼요? 설마 자연 치료가 된 겁니까?”
“바깥세상에는 루시퍼를 극복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이카루스족이죠.”
“흠…. 혹시 시간이 되실 때 연구실에 다시 한 번 방문해 주실 수 있나요?”
까칠하다는 말과 다르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엘레나가 말하자, 마르코는 메이와 흐엉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