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엘레나 박사님이 그렇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메이님이나 데메테르 말고는 처음 보네요.”
“저렇게까지 호감을 느끼신 적은 처음 같아요.”
데메테르가 입안의 음식을 오물거리며 흐엉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작 마르코는 관심 없는지 음식을 먹으며 식당 안을 눈으로 둘러보았다. 상당히 큰 규모의 식당이었는데 아마 엘리시온 본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곳 같았다. 비록 화려한 음식은 아니었으나 정갈하고 깔끔했으며 무엇보다 공짜라는 점이 매우 특이했다. 그런 마르코의 생각을 읽었는지 메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불법 출생아들은 굶는 것이 일상이잖아요. 초대 엘리시온 리더인 모르민님이 그런 동지들을 위해 생각해 내신 거래요. 그 뒤로 후대 리더들도 모르민님의 뜻을 이어받아 계속 이렇게 무료 급식을 실행하고 있어요. 정식 엘리시온이 아니더라도 배고픈 자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주고 있고요.”
“조직을 운영하기도 힘들 텐데 무료 급식이라니? 그 많은 자원을 어디서 얻는 것이오?”
“보통은 후원이죠. 불법 출생아 중에서 임시 보호소를 통해 입양된 분들이 후원자의 대부분이지만 일반 사람들도 최근 저희 조직에 대한 후원이 느는 추세에요. 하지만 이 역시 아직은 넉넉하지 못해 스스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자급할 생각이고요.”
“하르마게돈을 무너뜨리려는 조직인 줄 알았는데…. 그냥 새로운 국가를 만들 생각인가….”
“네?”
마르코의 혼잣말을 못 들었는지 메이가 되물었지만, 마르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 맞다. 밥 먹고 마르코님과 첩보부에 가봐야 해요.”
흐엉이 불현듯 생각나 말하자 메이가 의아한듯했다.
“첩보부요?”
“일단 공식적으로 마르코님을 받아들이긴 했어도 형식적으로라도 스파이가 아닌지 검사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참관자로 저도 같이 오라던데요.”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에이, 됐어요. 번거로우니까 둘이서만 갔다 올게요.”
“별일 없겠죠?”
“첩보부가 좀 으스스하긴 하지만 이미 리더가 결정한 일인데 별일이야 있겠어요?”
“그럼 다행이지만…. 마르코님도 조심하세요.”
“둘 다 자리를 비우면 메이님의 호위는….”
그 말에 흐엉이 웃으며 말했다.
“엘리시온 내에서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소?”
마르코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냥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흐엉을 따라 찾아간 첩보부의 사무실은 엘리시온 건물 내에서도 매우 구석진 곳에 있었다.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이지도 않고 외관 또한 휑하게 느껴져 스산한 분위기였다.
똑똑.
외교부나 생체연구부와는 다르게 흐엉이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자, 문이 열리고는 날카로운 눈매에 단발을 한 여인이 곧바로 문을 열고 맞이해 주었다.
“오랜만이네?”
“리샨? 첩보부에 있었던 거야?”
흐엉이 놀라면서도 반가운 듯 말하자, 리샨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응, 원래는 다른 지역에 파견 나가 있었는데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 네가 바깥세상에 나갈 때쯤 돌아왔거든.”
“정말 반갑네.”
“나도 너무 반가워. 아,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들어오세요.”
리샨이 마르코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그들은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첩보부의 사무실은 다른 부서와 비슷하게 간부와 부간부가 이외에 소속부원들이 공용으로 쓰는 널찍한 공간이었다. 다만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잡담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너무 조용했으며 근무하는 부원들의 눈빛이 매우 날카롭다는 점이 달랐다.
“마르코님은 곧바로 밀란님에게 안내해 드릴게요.”
“미, 밀라님? 밀란님이 직접 마르코님을 조사하시는 거야?”
흐엉이 깜짝 놀라 말하자, 리샨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첫 외지인이잖아. 그만큼 매우 중요하신 분이니까. 그리고 조사 같은 심각하고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차나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어.”
“그래? 그럼 나는?”
“넌 나랑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야지?”
“뭐?”
“방금 말했듯이 그냥 형식적인 절차니까 마르코님만 밀란님을 뵙고 너는 그냥 나랑 기다리면서 이야기나 나누자고. 10년만인데 할 이야기가 많잖아?”
“아….”
다른 첩보부 부원의 안내를 받아 마르코는 밀란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회색빛 벽과 장식품 하나도 없이 책상과 손님용 테이블만 있는 삭막해 보이는 사무실이었다. 서류를 보고 있던 밀란은 마르코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로 반겨주었다.
“엘리시온의 생활이 괜찮습니까?”
손님용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밀란의 태도가 호의적이자 마르코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때 자신에 대한 향후 처우를 논의할 당시 포박을 풀어주는 것을 반대할 정도로 적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원이 차를 한잔내어 주자, 밀란은 마르코에게 권하면서 자신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바깥세상에 대한 것은 잘 모르나, 그래도 고향의 음식만큼 좋은 것이 없겠지요. 5 지역 특산물인 초초 차입니다.”
마르코도 예전에 즐겨 마시던 차였지만 아직 밀란의 의중이 잡히지 않아 그를 바라만 보았다. 그러자 밀란이 너털웃음을 하며 말했다.
“이런, 이런. 제가 반가운 마음에 순서를 뒤바꾸고 말았군요. 일단 일전에 마르코님에게 과한 언사와 행동을 한 점 사과드립니다. 당시에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첩보부라는 간부의 위치에 있었기에 그리했던 것입니다. 마르코님에게는 어떠한 악감정도 없으니 불쾌하셨더라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분명 예의 있는 말이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대놓고 하는 사과를 물릴 수 있는 상황이 아녔기에 마르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해합니다.”
“하하. 역시 들소 용병단의 부대장답게 그릇이 크시군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밀란은 목소리를 낮추며 은근하게 말했다.
“한데…. 오랜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고향에 가질 못한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큰바위 마을이라고 했나요? 저도 그 근처가 고향이어서 몇 번 들렸던 적이 있답니다.”
“큰바위마을에 말입니까?”
마르코가 처음으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자, 밀란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곳은 나름 산골 깊숙한 곳에 있었던 마을이었기에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곳이었지요. 그런 그곳이 정부군에게 발각됐다고 들었을 때 의아했었답니다. 누군가 밀고하지 않는 이상은 절대 발견되지 않을 곳이라 생각했었거든요.”
“정부군 습격 이후의 소식을 알고 계십니까? 혹시 그곳에 생존자로도….”
밀란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또한 불법 출생아 출신이었기에 정부군이 큰바위마을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여기까지 피난을 왔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대한 자세한 소식 모릅니다.”
“그렇습니까….”
마르코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밀란이 다시 차를 마시고는 말했다.
“다만…. 확실하지는 않으나 마을에서 탈출한 생존자가 있다던가 미성년자 중에 몇몇은 임시 보육원으로 보내졌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하지만 소문일 뿐입니다. 정부에서는 생존자가 없다고 공식 발표를 했답니다. 그런데 정부군의 실책을 숨기기 위해 그렇게 발표했다는 이야기가 한동안 떠돌았던 기억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밀란은 마르코의 표정이 밝아지자,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약간의 가능성이 있다면 가족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찾으려고 노력해야겠지요. 이해합니다.”
“그러나 리더가 서쪽으로는 갈 수가 없다고….”
“흠…. 맞는 말이긴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네?”
메이님 같이 특별한 예도 있긴 하나…. 저희 엘리시온에서 소수 인원이 정부군 몰래 서쪽으로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저희가 설마 이곳 동쪽에만 얌전히 처박혀 있겠습니까?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보이지 않습니까? 서쪽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 저희 엘리시온들이 활동하고 있답니다. 아까 보았던 리샨 또한 그렇고요.“
”그럼 왜 제나일 리더는 절 막는 것입니까?“
마르코가 분노를 감추지 않자, 밀란은 속으로 흡족하였다.
”그것은…. 그 드나드는 인원은 엘리시온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인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소수에 포함될 수는 없습니까?“
”능력이 있다고 바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다만….“
”다만…?“
”저의 허가가 있다면 가능합니다.“
”밀란님의 허가요?“
”저희 엘리시온 밖에서 활동하는 자들은 대부분 우리 첩보부의 일원이거나 저의 허가가 떨어진 자들입니다. 저와 우리 첩보부의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니까는 말이죠.“
”그럼 쭉 3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거야?“
첩보부의 구석진 방에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던 흐엉이 묻자, 리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4 지역으로 가고 나서 얼마 안 돼서 나도 곧바로 발령이 났어.“
”곧바로?“
”4 지역의 혁명이 성공했다면 곧바로 3 지역에서도 활동을 시작할 계획이었거든.“
리샨의 말에 흐엉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입을 다물었다.
”4 지역 일은 너무나 안타까워. 그때 원래 계획대로 5 지역에서 지원 병력만 보내줬었더라면….“
”됐어. 그 이야긴 그만하자.“
그러자 리샨은 순순히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그동안 4 지역에선 어떻게 지냈어?“
”아…. 술집을 했어.“
”술집? 네가?“
”내가 뭐?“
”네 성격에 손님들 비위를 맞추면서 일했단 말이야?“
어릴 적 고삐 풀린 망아지라는 소리를 듣던 흐엉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 듯 리샨은 입을 떠벌리며 놀란 듯하였다.
”이거 왜 이래? 나름 5 지역에서 유명한 술집이었다고.“
”쳇, 그래서 돈 버는 재미에 연락 한번을 안 했단 말이지?“
”돈 셀 시간도 부족한데 연락을 어떻게 해?“
흐엉의 농담에 리샨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담에 술을 마시러 가봐야겠어. 근데 왜 술집이야? 다른 일도 많을 텐데.“
그 말에 흐엉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의 꿈이었거든….“
”그 녀석?“
”스칼….“
”스칼? 아…. 4 지역 엘리시온의 리더 말이지?“
흐엉은 대답 대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린 나이에 지도력이 매우 출중했다고 들었어. 그런 인재를 잃다니….“
”동지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을 했어. 자신의 목을 내놓는 대신 다른 동지들을 건드리지 않기로 정부군 책임자랑 거래를 했었거든. 물론 성녀님의 바람의 기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스칼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고 생각해.“
”물론이지. 그는 숭고한 희생을 한 거야. 다만…. 그를 잃지도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나.“
리샨이 진심으로 화를 내자, 흐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난 일인걸.“
”너도 화가 나서 지금까지 엘리시온과 연락을 끊고 지낸 거였지 않아. 이제는 정말 그 분노를 잊어버린 거야?“
”뭐? 잊고 안 잊고 별수 있나.“
흐엉이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농담 식으로 말했지만 리샨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가비님이 계속 엘리시온을 이끄셔야 했다고 생각해. 그랬다면 스칼을 비롯한 4 지역의 동지들을 잃지 않았을 거고 어쩌면 엘리시온의 영토가 더 커졌을 거야.“
”하하, 리샨 너무 흥분했어. 여기 첩보부 한가운데라고. 그런 말을 했다간 바로 취조당할걸?“
”실제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들이 생각보다 많아. 지금은 온건파들 때문에 무서워서 대놓고 못나서서 그렇지.“
”그런가?“
”그리고 엘리시온 외부엔 은퇴한 강경파 동지는 훨씬 더 많고 말이야. 너도 우리와 같은 강경파 출신이잖아?“
그 말에 흐엉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일이야.“
”지난 일이라 생각하면 지난 일이지만, 난 지난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럼 저보고 첩보부의 사람이 되란 말씀입니까?“
마르코의 물음에 밀란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르코님은 잘 모르시겠지요.“
”어떤 걸 말입니까?“
”단순히 첩보부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의 동지가 되어달란 말입니다.“
”그게 무슨…?“
”엘리시온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현재는 제나일 리더를 필두로 온건파의 세상이지만…. 원래는 강경파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엘리시온을 차지한 후로는 저희는 이런 5 지역 구석진 곳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상황입니다.“
밀란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했다.
”만약 저희가 다시 엘리시온을 이끌 수 있게 된다면 단순히 서쪽이 아니라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넓힐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르마게돈을 붕괴시키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마르코님도 저희와 생각이 같지 않습니까?“”
마르코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선택하란 말은 아닙니다. 마르코님이 직접 생활 해보면서 느끼시는 게 빠를 테니까 말이죠. 지금의 엘리시온과 저희가 이끄는 엘리시온 중 어느 곳이 더 빨리 큰바위마을로 갈 수 있는지, 하르마게돈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