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와의 대결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흐엉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쳇, 데메테르 사건 이후로 꾸준히 다시 수련했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니군.”
“그대는 아주 강하오.”
흐엉의 공격에 마르코는 잔상처들이 났지만, 치명상은 없었고 흐엉처럼 호흡이 거칠어진 수준도 아니었다.
“작년에 싸웠던 올림포스 스피어만큼, 아니 그자보다 훨씬 강한 것 같군요. 그래서 묘하게 열이 받네요.”
흐엉이 눈빛을 바꾸며 자신을 노려보았지만, 마르코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제 공격에 대꾸는 하는데 묘하게 봐주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제 깨달았으면 그만 비켜주었으면 싶은데….”
“하…. 역시나…. 근데 그거 알아요? 그것 때문에 승리욕이 더 불타올랐다는 거?”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소.”
“끝까지 가봐야 알죠.”
흐엉이 다시 빠르게 공격을 해왔다. 단타로 빠르게 휘두르는 손도끼의 공격에 마르코가 처음으로 한발 물러났다.
‘기세가 위험하군.’
대검으로 공격을 막던 마르코가 크게 휘둘러 흐엉과의 거리를 다시 벌리려 했지만, 흐엉은 그런 마르코의 생각을 읽은 듯 재빨리 몸을 틀어 대검을 피하면서 텅 빈 마르코의 목을 향해 손도끼를 휘둘렀다.
캉-
“쳇….”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마르코가 손도끼를 왼팔로 막아낸 것이다. 다행히 쇠로된 건틀릿을 착용하고 있어 손도끼를 막아내긴 했지만,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듯 파편이 후드득 떨어졌다.
“용병이라면 이정도 방어구는 기본이오.”
“그리 비싼 방어구는 아니었나봅니다.”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당신의 지원군일까요? 저희의 지원군일까요?”
“상관있소?”
“하긴 어느 쪽이든 거치적거릴 텐-”
말을 하던 흐엉은 깜짝놀란 눈으 마르코 등 뒤에 나타난 메이와 데메테르 그리고 엘레나를 바라봤다.
“메, 메이님?”
메이라는 소리에 마르코도 놀란 듯 흐엉과 잠시 거리를 벌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다 모였군.”
“마르코님?”
데메테르도 놀란 듯 마르코를 바라보자 마르코는 자신이 든 대검을 자신도 모르게 뒤로 숨겨버렸다. 그러자 메이가 얼른 입을 열었다.
“마르코님 그만 하세요. 엘리시온의 정치싸움에 이용당하시는 것뿐입니다.”
“원하는 것은 준다고 했소. 그러니 이용이 아니라, 거래요.”
“차라리 제가 돕겠습니다.”
“엘리시온에서 날 도울 수 있는 위치는 아닌 거로 아는데….”
“아니에요. 메이님이라면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데메테르가 다급히 말하자, 마르코가 비웃듯 말했다.
“그럼 진작 도와주지 그랬소.”
“그, 그게….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되었소. 중요한 사정인듯한데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지.”
“끄으윽….”
정신을 잃었던 그리드가 힘겹게 눈을 떴다.
“괘, 괜찮으십니까?”
“마얀 박사님은 괜찮으십니까?”
“전 뒤에 숨어만 있어서….”
그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레나의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열댓 명의 강경파 전투원이 자신처럼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모습에 그리드는 이를 빠듯 갈았다. 메이가 어느 정도 호신술 정도는 할 줄 안다고 듣긴 했지만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최소 빙결 급의 몸놀림이었다.
“불꽃에 빙결 급이라…. 마르코 그자가 헤맬 수도 있겠군.”
“네?”
마얀이 못 알아들은 듯 바라보자, 그리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자들이 파우스트를 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파우스트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불리한 상황을 역전 시킬 수 있는 물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건 저의 금고에 있습니다. 금고의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억지로 열려 한다면 폭발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요. 그래도 그 중요한 물건을 폭발시킬 수 없으니 우선 안전한 곳으로 옮기시지요.”
“하지만….”
마얀이 머뭇거리자 그리드가 재촉하며 말했다.
“박사님의 희대의 걸작이 아닙니까?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도 되는 물건입니까? 파우스트 연구를 멈추셨지만 폐기하지 않고 계속 두셨다는 것은 박사님께도 미련이 남아있다는 뜻 아닙니까?”
마얀은 머리를 감싸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 그리드를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옮기죠.”
“아닙니다. 아직 바깥은 위험합니다. 저와 부하들이 옮기겠습니다.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시지요.”
“아닙니다. 제가 옮기-”
“강경파 동지들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이곳에 잠시만 계십시오. 파우스트를 확보하고 나면 박사님을 모시러 오겠습니다.”
“후…. 알겠습니다. 금고의 비밀번호는….”
“뭐라? 아직 제나일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냐?!”
밀란이 화가 난 듯 소리치자 리샨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리시온 본관 대부분은 장악했지만, 아직 제나일 리더의 집무실을 장악했다는 보고가 없습니다.”
“마르코 이자가…. 그리드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이냐? 이 중요한 때에 종일 보이지가 않아.”
“그것이…. 생체연구부와 과학부를 맡으시겠다고 하셔서….”
“그리드가? 엘레나 때문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뒤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너울이 엘리시온 본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상보다 지체되는군. 시간이 없네. 우리가 기습한 사실이 코모그나 부우에게도 알려졌을 것이야.”
“죄송합니다. 서두르라 다시 연락을-”
“자네가 직접 현장으로 가시게.”
“네?”
“한가하게 뒤에 있을 이유가 없지.”
“하지만 제가 자리를 비우면 너울님의 경호가….”
“늙은이 걱정은 하지 마시게. 나이가 들어서 이제 슬슬 피곤하군. 빨리 끝내야겠어.”
그 말에 밀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너울의 마음이 확고한 듯하여 보이자,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현장으로 가겠습니다.”
마르코는 이제 전력을 다해 빠르게 흐엉을 제압하고 제나일에게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메이의 실력이 대단하였고 둘의 합 또한 좋아서 전력을 다한다 한들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흐엉이 저돌적이고 파괴력이 있다면 메이는 부드럽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방어력이 높았다. 마르코의 공격을 메이가 부드럽게 흘러낼 동안 뒤에서 흐엉이 공격을 한다. 흐엉의 저돌적인 공격을 막고 나면 다시 뒤에서 메이가 가볍고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식이었다. 대검이라는 커다란 무기로 따라가기 벅찬 공수였다.
“어쩔 수 없군. 조금 아플 것입니다.”
마르코가 결심한 듯 비교적 정직한 공격을 하는 흐엉의 공격을 힘으로 멀리 쳐내고는 재빨리 뒤를 돌아 메이에게 대검을 휘둘렀다. 메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직 대비하지를 못한 듯 놀란 눈으로 자신에게 날라 오는 대검을 바라봤다.
“메이님!”
촥-
“끄윽….”
치명상을 피하고자 재빨리 몸을 돌리기는 했으나 완벽히 피하지는 못했던 듯 메이의 등은 찢겨진 옷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마르코, 너 이 자식!”
흐엉이 분노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마르코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며칠 움직이지는 못하겠지만 당장 치료를 받는다면 목숨엔 지장이 없소. 그러니 얼른 메이님을 데리고 의사에게 가시오.”
“메이님!”
멀리서 세럼의 전투를 바라보던 엘레나와 데메테르는 쓰러진 메이의 곁으로 어느새 달려와 있었다. 엘레나가 빠르게 메이의 상처 부위와 맥박 등을 살펴보더니 데메테르에게 말했다.
“출혈보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야. 그러니 일단 지혈을-”
데메테르는 엘레나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메이의 등에 난 상처 위로 손을 올리더니 두 눈을 감았다.
“데메테르! 지혈만 해야 해. 무리하게 힘을 쓰다간….”
“제발 조용히 좀 해주세요.”
데메테르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 말하자, 엘레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식을 잃지 않았던 메이가 데메테르를 피해 몸을 돌리려 하자, 데메테르가 엘레나에게 소리쳤다.
“환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으세요!”
엘레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데메테르의 말대로 메이가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잡았다.
“이런 상황에선 박사나, 전투원이나, 성녀보다 의사의 말이 최우선이랍니다. 미안해요, 메이님.”
마르코는 자기 생각대로 메이의 부상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는 흐엉을 보자, 재빨리 흐엉도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검을 높게 치켜든 순간 데메테르의 손에서 빛이 나오더니 메이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가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넋을 놓고 멍하게 그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마르코의 말에 흐엉이 다시 손도끼를 치켜들며 말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더니 바깥세상에서는 보지 못했나 보죠.”
“예전에 친구가 들려주던 홀리교의 신이라도 나타난 듯하군….”
“홀리교 신자셨어요?”
“아니, 난 아니오.”
“그것참 아쉽네요. 데메테르만큼 깜짝 놀랠 킬 수 있었는데.”
흐엉의 말을 이해 못 한 듯했지만 길게 잡담을 나눌 때가 아니었기에 마르코도 다시 대검을 고쳐 들었다.
쿠우웅-
하지만 그 순간 자신들에게 가까워지는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자, 긴장된 눈으로 복도의 끝을 바라봤다.
“이런, 이런. 아직도 정리를 못 하셨습니까?”
그리드와 강경파군의 등장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리드가 차고 있는 기괴한 건틀릿이었다. 아니 그것을 건틀릿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원래 그리드의 체구가 작긴 했으나 바닥에 끌릴 정도로 커다란 건틀릿은 어깨까지 이어진 기계로 만든 장치였다.
“기계로 거인의 손이라도 만든 것인가….”
마르코가 정신을 차리며 흘끗 흐엉을 바라보자, 흐엉도 자신만큼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네요.”
“들소 용병단의 명성이 제법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군요. 하긴 바깥세상의 수준이 그렇죠. 뭐.”
“이제 막 끝내려던 참이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썩 불쾌하군.”
“흥, 어차피 버릴 카드였다. 모두 죽이고 제나일을 잡는다!”
그리드의 외침에 수십 명의 강경파 군이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메이님을 생각하면 괘씸하긴 한데 그래도 잠시 휴전을 하죠.”
“그래야겠군. 혹시나 했지만 역시였어.”
마르코가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강경파군을 향해 먼저 뛰쳐나가더니 혼자 대검으로 베어내기 시작했다.
“역시 날 봐주고 있었네. 데메테르 얼마나 남았어?”
흐엉의 물음에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려내려는 데메테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루시퍼를 치료했을 때보다는 덜 걸릴 것 같아요.”
“그것참 다행이군.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치료에만 집중해.”
너울은 밖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다 문득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원래는 내일쯤에 오는 것이 아니었나?”
“예감이 좋지 않아서 말이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코모그와 코모그를 따르는 온건파 군이었다. 어느새 너울을 지키던 호위병들을 제압했는지 누구 하나 너울을 지키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다.
“책상에만 틀어박혀 지냈던 것 치고는 감이 남아있었군.”
“묘하게 딱딱 들어맞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소. 상대가 당신이었는데 말이지.”
“그러한가?”
“우리가 파놓은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다니…. 까딱하다간 정말 위험할 뻔했소.”
“글쎄…. 아직은 모르지. 자네가 왕을 잡은 것처럼 우리도 왕을 잡았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 말에 코모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체포해라. 나머진 날따라 본관으로 이동한다.”
“저희도 가겠습니다.”
너울은 처음 보는 사람 중에 젊은 사내가 나서자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홍윤, 아직 그대들의 검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함부로 엘리시온 안으로 들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숫자로 안의 병력을 모두 상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홍윤의 말대로 코모그가 휴전선에서 데려온 병력은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너울이 움직인 이상 어설픈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저희가 찾는 사람들이 본관에 있을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저 그들이 무사한지만이라도 들어가 확인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번엔 샤샤가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자, 코모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대들이 우릴 도와준다면 더 이상의 검증은 하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