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박하향이 이렇게 등장할 줄 몰랐다.
나는 겉으로는 무덤덤한 채 표시 내지 않았지만, 속으론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스라치도록 놀라 자빠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게 일반적 상식인데 웬 포커페이스지? 이런 내 태도가 가증스러웠다.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같잖은 존재라고 뒤통수 한 대 갈겼다. 니가 박하향이라고?...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끔찍한 악몽을 공유한 비극적 인물 박하향... 조선의 생모 박하향... 왜 여기서, 꿈같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거지?...
* * *
- 따르릉, 따르릉~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을 하세요?...
- 누군데요?
- 몰라, 말을 안 해... 당신이 받아 봐...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 접니다...
- 누구?
- 하향이 아빱니다, 크흑...
* * *
엄마와 아버지가 그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밤에 커피숍에 나갔다.
민암재단의 집사며 성제 할아버지 오른팔이었던 하향의 아빠인 박장로와 하향의 엄마가 나와 있었다. 몰골은 최대한 불쌍하게 차려입었다. 하향의 아빠는 눈도 퀭했고 수염도 깎지 않아 더부룩했다.
눈에 핏발이 돈 하향의 엄마 품엔 보자기로 싼 아기가 있었다. 비단 보료였다.
선의는 최고급 패딩에 눈이 커서 슬픈 사슴 모양의 고깔모자를 썼다.
- 이 비극을...
- 주세요.
엄마가 두말도 안 하고 하향의 엄마가 건네는 보자기를 받았다.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는데 엄마를 보자 선의가 방긋 웃었다.
엄마의 꺼림칙한 마음이 창밖의 내리는 눈처럼 녹았다.
- 까꿍
- 까르르
- 우르르 까꿍
- 까르르
아버지가 선의의 까르르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에 엄마가 안은 선의를 덥석
빼앗아 안았다.
하향이 엄마가 이때다 싶었다.
- 아기 울음소리만 들어도 노이로제에... 지금은 공황장애까지 왔습니다, 하향이가... 공부를 해야 하는데... 우리도 키우려고 엄청나게 노력 해 봤는데 아기 기피증이 생 겨... 임신 거부증이라고도 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울증에 하염없이 울다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가... 한번은 애랑 죽는다고 나가다가 우리한테 들켜... 같 이 죽자고 대판 싸우고 울고 불고... 이러다가 애 잡겠다 싶어 이렇게 염치 불고하 고, 죄송합니다. 흑, 흑...
-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하향이 장래를 위해서라도 옳은 결정을 했습니다.
하향이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성을 놓았다. 엄마는 오히려 잘됐다고 힘들게 한
선택이지만 잘 된 결정이라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더 좋아했다. 선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우르르 까꿍을 반복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잘 키울게요... 애 아빠는 중국에서 오자마자 군에 갔어요... 얘 아빠가 워낙 싱싱하고 건강한 놈이라 단번에, 헤... 아기는 염려 말고, 지애비 닮아 건강하게 잘 자랄 겁니다. 분명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저희에게 긍휼(矜恤)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시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있겠습니까, 이젠 걱정 붙들어 매시고 만수무강(萬壽無疆)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임마누엘~여보 갑시다, 장로님 바쁘신데...
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도 충격이 컸던지 안 해도 될 말을 주저리주저리 했다. 아니 아버지 당신을 처음 보자 웃어주는 선의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버지 당신 태어나서 이렇게 긴 장광설을 늘어놓은 게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엄마가 말했다.
- 단, 서로를 위해서 찾지 맙시다, 박장로님은 성제 집에 아직 일을 봐주니까... 이런 비극도 성제 그 자식 때문에... 하긴 우리도 그것도 모르고, 내가 미친년이지...
- 변명 같지만 전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교회 일만 합니다...
엄마도 아버지 따라 일어났다. 엄마의 단호함에 하향이 아빠가 오해 말라며
눈물을 글썽였고 하향이 엄마가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엄마가 자초지종 들려줬던 이야기가 하향이를 보자 떠올려졌던 거였다.
- 검은 뿔테안경은?
어찌 되었든 10년 만에 만난 조선의 생모에게 보인 내 반응이었다.
- 안 쓴지, 오래됐어...
- 근데, 왜 니가 내 앞에 있는 거야? 의도적인 냄새가 난다.
내가 드라이하면서도 불손하게 물었다.
- 우연히...
- 오천만 분의 일이다, 만날 확률이... 하는 일이 뭔데?
- 국수본에 있어?
- 충분히 짐작이 가네, 니 능력을 반추해보면... 국수본이 김해공항에도 있어, 파견 나왔어?
- 아니 수사 중이야.
- 나? 뭐, 뭐, 내가 왜?
수사라는 말에 내가 더듬거렸다.
- 큭...
하향이가 짧게 웃었다. 웃는 얼굴이 화사했다. 특히 덧니가 매력을 풍겼다. 얘가 이렇게 예뻤나? 하긴 선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검은 뿔테안경이 사람을 후지게 고착시켰구나 싶었다. 캄보디아 화장실에서 하향과의 강제 교합 때 머리에 각인된 건 하향의 펑퍼짐한 엉덩이였다. 하향이 벗은 몸을 안 보려고 눈을 감았는데 성제가 내 배를 발로 내지르며 눈을 떠라, 했을 때 처음 보였던 게 유달리 큰 하향이 엉덩이였다. 의자에 죽치고 앉아서 책을 파다 보니 엉덩이가 텃밭에 앉은 늙은 호박만 하게 컸구나, 그러면서 그 악몽의 순간을 넘겼다. 그 기억만이 뚜렷하게 남았다.
- 그럼, 왜 여기 나타난 거야?...
- 넌 한 번씩 툭 던지는 말이 재미있었어.
하향이가 딴 소릴 했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걸까?
- 이 접근법은 뭐야? 딸 돌려달라 이런 말 하지 마, 살인 난다.
- 아냐... 내가 무슨 자격으로... 진짜 우연(偶然)이라니까, 살인사건 수사 중에...
- 살인사건? 혹 성제가 연루되었어?
- 어떻게 알았어?
하향이 눈이 동그래졌다.
- 그렇구나,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니? 일급 비밀이니 이런 개소리 하지 말고...
그렇게 되어서 박하향 말을 듣고 앞서 말한 서민교 사건의 전말(顚末)을 재구성한 거였다.
- 성제라고 의심 가는 부분이 있어?
- 미세하나마 지문을 뜬 게 있어, 10년 전 성제 지문과 대조해 봤는데... 이다 아니다 말하기가 좀 그렇네, 애매해... 지문이 일치했다고 해서 성제가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 산 넘어 산이야...
- 근데, 여기 김해공항은?
- 눈치를 챘는지, 김해공항에 떴다고 해서 만나서 뭘 물어보려고 하는데 허겁지겁 갔어, 미국으로...
- 개새끼 토낀거네... 분명하고 확실해 내 감이야, 민교 살인범은 성제가 백퍼야.
- 나도 심증은 가는데, 그래도 수사는 해봐야지...
- 수사할 거도 없어, 바로 잡아넣어, 미국을 왜 여기서 가? 그게 이상한 거잖아?
- 그러게 말이야, 인천공항 경유해서 서둘러 가는 거 보면... 여긴 직항으로 미국 가는 비행기가 없는데 말이다.
- 바주카포 사건도 성제가 사주한 거야, 조폭 쫄따구 새끼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러시아 마피아한테 그 비싼 바주카포를 사, 다 성제 짓이지... 그 돌아가신 분이 누군지 알지?
- 응... 면목이 없어... 가기도 그렇고...
- 그래서 넌 엑슨(X) 거야, 그래 가지고 니가 어떻게 제대로 쟁취하고 살겠어...
아야코의 세상을 휘어잡는 결단력과 파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데 그 머리 좋은 하향도 내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 눈을 껌벅였다.
- 가만 보니까 놓친 거네, 얻어맞았지?
- 응, 우리 애들이... 신분증 제시해달라다가 느닷없이 덤벼서 몇 명이 좀 심하게
상해를 입었지.
- 거머리 애들이랑 붙었어?
- 어, 어떻게 알았어?
- 몰라? 아 그렇지 넌 국제고지... 고딩 때부터 한 패였잖아, 성제랑 거머리랑...
지금은 성제 보디가드하잖아...
- 그럼, 캄보디아 화장실에도?...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향이 눈에 불이 이글거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거머리 그 새끼도 박하향의 벗은 몸을 봤겠구나, 생각하니 치가 더 떨렸다.
하향이가 측은해졌다. 왜 하필 민암 재단의 학교를 다녀서 더럽고 끔찍한 일을 당하냐... 이런 바보 같은 생각에 속이 시렸다.
- 그래, 민교가 많이 망가졌어?
하향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순간 폐소공포증 환자처럼 꽉 막혔다. 나 때문에 애먼 처녀 하나 잡았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렸다. 마음이 아팠다. 가슴이 시렸다.
- 시집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