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불멸의 검 악마의 칼날 위에 서다.
작가 : 씨몬
작품등록일 : 202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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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색한 화풀이
작성일 : 25-06-05     조회 : 22     추천 : 0     분량 : 4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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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화

 궁색한 화풀이.

 

  내가 미쳤지... 뜬금없이 정말 웃기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박하향이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웃기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선의를 맡길 수 있기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 내 목숨 천 개 만개를 건다. 그럼 무슨 심보지? 갔든 안 갔든 내 알 바가 아닌데 시집 안 가고 있어야 하는 게 맞는 거라고 억지 부리는 건 도둑놈의 심보, 남자라는 새끼들은 다 그런가...

 

 - 가... 그래야 내가 마음이 편해...

 - 싫어, 남잔 싫어... 몇 번 시도를 해봤는데... 애정이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경멸의 감정이 도졌어... 내가 별 얘기 다하지?...

 - 니 딸 아빠니까, 니랑 살을 섞은 남자니까... 너한테 얼마든지 그런 말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 가라구 시집... 어떤 말을 듣고 싶어? 더하면 험한 말이 나올 거라는 걸 니도 짐작하지, 넌 똑똑하니까.

 

 가살스러운 감정이 갑자기 불끈 쏟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하향에게 화풀이를 했다. 아니 넌 똑똑하니까 얼마든지 슬기롭게 선의를 낳고 키울 수 있었어, 나랑! 고교생 부부도 많아! 그런 말이 나올 거 같아 참았다. 그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내가 너만큼 공부를 잘했으면? 같이 살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그럼, 공부를 못해서? 나를 피한 거야? 내가 너한테 수준이 떨어졌어? 띨빵해서? 대충 아무렇게 사는 놈이라서? 나는 내 속을 스크래치했다. 그런 자학적이고 편협된 생각에 치우치자 분함이 치밀었다. 하향을 노려봤다. 그래 잘난 것들은 다 그래? 하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왜 한 번의 교접으로 임신이 되는지, 왜 원샷, 원킬일까? 아야코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엄마나 할머니의 자랑인 내 거시기가 원망스러웠다.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하향이가 눈물을 흘렸다. 내가 심했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줬다.

 

 - 고마워,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사실... 나 니 좋아했던 같아...

 - 킥킥킥, 지나가는 개새끼가 웃겠다...

 - 몽대 니가 어느 날 내게 프러포즈하겠지 하는 꿈을 상상하면서... 학교를 다녔어,

  그게 참 힘이 되더라, 그날도 오롯이 성제가 부른다고 했으면 안 갔을 거야,

  너도 있다고 그랬어, 어릴 때 우리 우 몰려다니며 놀 때가 생각나더라구...

 

 하향이가 들떠서 속사포처럼 말을 했다.

 

 - 그래 내 탓이야?! 말 같잖은 프러포즈? 그건 아니고 한번 잘래? 그렇게는 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 공부 잘하는 애들이 오히려 지 공부 잘한다고, 그래서 어떻게 굴어도 다 용납이 되고 용서가 된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니까... 돈 많아서 까부는 것들이랑 뭐가 차이가 나?!

 - 난, 너 좋아하면 안 돼?...

 

 지독하게 삐뚤어진 내 말에 하향이가 풀이 죽어 그 큰 눈을 껌뻑이며 애원하듯

 고백했다.

 

 - 안 돼, 넌 자격을 상실했어, 너도 잘 알잖아, 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 그렇지? 참 내가 뻔뻔스럽지? 내가 생각해도 난 이기적인 인간이야...

 

 근데 왜 하향은 내게 죄인처럼 굴고 왜 나는 하향이를 죄인처럼 무시하냐? 나는 이런 깔보는 말을 하면서도 하향이의 말이 진짠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 내가 우연히 옆을 쳐다봤는데 멀리 앉은 하향이가 나를 보고 있었고 내 눈과 마주치자 얼굴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기분이 묘했다. 전국 중학교 등수 1등인 천재가 나를 훔쳐본다는 게 은근히 쾌감이 도졌다. 말을 슬쩍 붙여볼까 하다가 성제 새끼가 떠올라 참았다. 한번이 아니었다. 교회에서도 그랬다. 교회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하향이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얼마나 콩닥거리는지... 목사인 성제 큰아버지의 설교는 하향의 눈길에 녹아내려 공(空)으로 들리었다. 그 당시 하향은 중, 고를 넘어 대학, 대학원생도 보기 어렵다는 전문 서적을 읽고 있었다. 중학교 선생들이 새 학기가 되면 일성(一聲)이 박하향 질문금지였다. 박하향 질문 들어주면 진도가 안 나간다는 궁색한 핑계였다.

 

 - 말이 길어지면 서로 비참해진다, 그만 일어나자...

 

 먼저 일어났다. 어디를 갔는지 그 많던 여행객들로 붐볐던 공항 대합실은 한산해졌다.

 

 - 잠깐... 할 말이 있어...

 

 하향이도 일어나며 말했다. 애절한 눈빛의 갈구였다. 큰 용기를 내서 하는 말 같았다. 지금 안 하면 후회할 거 같은 애걸이었다. 들어줘야 할 것 같이 눈빛은 강렬했다.

 

 - 뭐? 뭔데, 미리 말할 게 있는데, 난...

 

 스에마쓰 아야코라는 아주 절세의 미인에다 부자에다 올림포스 신전의 신보다 절대적 영민함의 소유자와 결혼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남자의 심리가 이런 건가?

 

 - 말해, 어떤 말이든 감수할게, 욕이라도...

 - 날 어떻게 보고, 내가 욕이나 하는 인간으로 보여, 쯧... 음, 너 말이야, 말한다?

 

 말을 돌렸다. 반지도 안 꼈는데... 대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묻고 싶은 거 물어보자는 생각이 순간 떠올랐다. 내 짐작이 맞는지 알고 싶었다.

 

 - 응, 비수로 꽂아도 좋아...

 - 왜 이래? 우울증이야?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 말은 꼭 묻고... 아냐, 아냐...

 - 제발 좀 해줘, 몽대야, 무슨 말인데?

 - 아, 참... 쑥스럽게... 중학교 때 너 날 쳐다봤지, 그러다가 내가 널 쳐다보니까 고개를 아닌 척하고 돌렸잖아, 왜?

 

 날 좋아했어? 물었다가 아니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 멍 때리다가 너하고 눈이 마주친 거야, 이러면 개쪽인 거 같아 그냥 두리뭉실하게 왜? 라고 물었다.

 

 - 니가 좋아서...

 

 맞구나, 내 짐작이 맞아떨어졌네. 사람 감정이란 오묘해, 틀리지 않아, 시치미 떼고 듣자.

 

  - 솔직하게 얘기한다... 사실 한 번만 본 게 아니고 자주 널 봤어... 넌 그때 처음 내

  눈과 마주친 거고... 그때 널 보면서 나는 속으로 그랬어, 몽대야 난 네가 좋아, 니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난

  널 좋아할 거야...

 - 왜 날 좋아했어?

 - 넌, 모성 본능을 일으키는 마성을 가지고 있어...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를 생각나게 해...

 - 그만해, 그놈의 모성 본능...

 

 그런데, 왜, 나랑 한 몸이 되는 걸 그렇게 거부했어? 둘이서 선의 낳고 오순도순 잘 사면 되잖아? 요즘 10대 부모들 많아, 그러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나간 거 같았다. 아무리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인간 말종들 보는 데서 성스러운 사랑을 나눈다는 건 그 자체가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을 거다. 비록 검은 뿔테안경을 쓴 공부벌레라고 해도 하향이 나름대로 연애나 결혼에 대한 환상이 있었을 텐데 그런 끔찍하고 치욕적인 악몽을 겪었으니 남자에 대한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인 트라우마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니가 제아무리 핑계나 변명을 댄다고 해도 이미 물 건너갔다. 난 이미 다른 여자의 남자다. 일찌감치 날 포기해라, 서로를 위해서다. 아, 내가 생각해도 뻔뻔함의 극치다. 니는 뭐가 그렇게 잘랐냐? 열여덟 공부밖에 모르는 고2가 그런 처참한 일을 겪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 모르냐? 극적인 선의 생모와의 해훈데 고작 한다는 게 상처 주기냐? 진정하고 마음을 다스려라... 박하향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 주고 위로해줘라, 스스로 나 자신을 다잡았다.

 

 나는 하향의 손에 끌려 대합실(待合室) 끝에 있는 한적한 직원용 화장실 입구로 갔다.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 한번만 안아줘?... 괜찮겠어?... 소원이야...

 

 하향의 뜬금없는 부탁에 얘가 실성했나, 아니면 성제 잡으러 온 게 아니라 김해공항 청소부로 청소하다가 날 발견한 거 아냐? 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소원이라고 하는데... 내 딸 선의 생모가 간절하게 매달리는데...

 

 - 뭔, 소리하는 거야? 왜 갑자기 1차원적인 인간이 됐어? 설마 지금도 날 좋아하는 거 아냐?

 

 내가 마음과 달리 하향을 밀어냈다.

 다시 하향이가 바투 내게 붙었다.

 오공본드처럼 붙었다.

 

 - 아냐, 그건 달라, 아니 모르겠어, 그러나 지금 감정은... 제발, 날 용서해줘... 마법 에서 날 풀어줘...

 - 악몽만 떠오를 뿐이야...

 - 아냐, 날 안아주면 마법이 풀릴 거 같아... 저속한 1차원적 인간이라고 해도 본능에 충실한 원초적 인간이라고 해도, 그 어떤 비난도 흔쾌히 받아들일게, 다만 니 앞에 서 뭐든 되고 싶어... 발에 차이는 돌이라도...

 

 하향의 간절한 눈빛이 나를 천박하게 움직였다.

 꽃이 되고 싶어? 꺾어 줘? 일종의 복수심으로 하향을 와락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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