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박하향은 애절했다.
품 안에 쏙 들어왔다. 한 마리 가냘픈 두견새가 귀촉 귀촉 울며 들어온 것처럼 포싹 안겼다. 하향은 내 가슴에 안겨 그렇게 울었다. 나도 코끝이 시리고 찡했다. 울지 않으려고 코를 실룩였다. 하향만이 가진 향내가 코를 자극했다. 솔 향기가 났다. 이때까지 박하향에게 가졌던 일말의 의심이 봄 눈처럼 사라졌다. 그 향내 때문인지 가슴이 벌렁거렸다. 늑대가 꿈틀거렸다. 뭔가 외울 성경 구절이 없을까?
가슴에 휘몰아쳤던 묘한 감정이 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손이 나도 모르게 하향의 단단하고 풍만한 엉덩이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굉장한 탄력이었다. 손안에 가득 찼다. 엉덩이가 찰졌다. 단단한 근육질이었다. 각종 특수훈련을 마스트한 몸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이구야, 잘못하면 맞을라? 나도 모르게 너무 세게 움켜쥐는지 하향이가 아~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 미안해...
- 아냐, 괜찮아...
- 내가... 뭐라고 변명하는 거도 우습겠다... 그지?
- 맞아, 말을 안 해도 다 알 수 있어, 이심전심이잖아.
나는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하향이가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이글 타고 있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간혹 지나가는 여기서, 대낮에 화끈한 정사(情事)를 벌인다고 마다할 박하향이 아닐 거 같았다. 내게 전부 던졌다. 내가 겉만 번지르르한 짓만 하고 내적으로 아무런 감정 표현을 하지 않자 기대를 저버렸음을 느꼈는지 하향이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이제는 보란 듯이 울었다. 그래, 실컷 울어라, 모든 걸 다 쏟아내 버려라, 맺었던 응어리 따윈 날려버려라, 이젠 제발 남성혐오증에서 벗어나 좋은 사람 만나라, 그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나 좋은 사랑하거라, 트라우마여 사라져라, 불쌍한 여인이다, 얄궂은 운명에 부대낀 여자다... 나는 하향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제야 내 눈에도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 팀장님... 우는 겁니까?
- 아냐, 임마...
나는 무전기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무안해서 손으로 슬쩍 눈물을 훔쳤다. 진짜 국수본이구나, 잠깐 오해가 있었지만... 아 민망해라, 하향이가 깜빡하고 무전기 끄는 걸 잊은 것 같았다. 그만큼 나라는 존재가 하향에게는 경악 그 자체였다. 부하들이 성제와 거머리 일당들에게 당하고, 긴박한 순간 다시 쫓다가 성제를 놓친 뒤 허탈해 돌아가다가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는 나를 우연히 발견했으니... 원하든 원치 않든 자기를 여인으로 만든 남자니까... 얼마나 놀랐을까? 무전기 끌 정신이나 있었겠냐마는... 그래도 그렇지... 다 들었네, 아 씨... 비밀로 했으면 했는데 산통(算筒)이 다 깨졌다. 다음으로 넘어갈 순서가 엉망이 되어서 짜증이 팍 쏟았다. 어느 놈이냐,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놈이?... 잘 만하면 입도 훔칠 수 있었는데, 아니 나쁜 마음이 아니고 보시(布施) 차원에서... 음흉(陰凶)함이 아니고 진짜 내 솔직한 뜻이야, 딥(deep)이 아니고 가벼운 입맞춤... 울고 나니 모든 걸 털고 나니, 이런 나다운 농담이 떠올랐다.
무전기 소리에 하향이가 정신을 차리고 내 품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무전기 스위치를 껐다. 한 참 늦었는데 지금 끄면 뭐 하냐?
쑥스러워 썩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향도 우스운지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 이제 마법에서 풀려 난 거야?
- 응... 고마워...
-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 응, 그렇지만 사건을 해결하고 연애 한번 해 보지, 뭐...
- 선의 만나 볼래?
- 선의?
- 니 딸 이름이야, 조선의 국모가 되라, 조선의 뭐든 되라는 뜻에서 내가 지은 거야.
너는 니가 낳은 딸에 대해 관심 없어? 그러고 싶었지만 참았다. 쉽게 쓱 다가간다는 게 아직 어려울 것이다. 임신거부증이나 아기 기피증이나 남성혐오증이나 이런 증후군(症候群)이 갑자기 생길지는 몰라도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증세는 아니지 않는가...
지켜보며 천천히 치유를 위해 도와주자.
- 날 닮았어?
- 응...
- 그럼, 힘들겠다, 만나는 거... 넌 안 닮았어?
- 닮지, 내 딸인데, 근데 너를 더 많이 닮았어...
- 니가 잘 설득해주라...
- 알았어... 핸드폰 번호 찍어 줄래?
- 당연히, 어쨌든 핸드폰 번호는 서로 알아야 해, 연락할 일이 생길 거야, 가면서 하자... 같이 가야하잖아, 민교 씨 때문에...
- 그렇지, 빨리 가보자...
* * *
내 차를 타고 하향이와 함께 부산에 있는 부산의료원 시체 안치소로 향했다.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다. 엄마, 선의, 아야코, 조한, 그리고 친구들이 모두 일본을 갔기 때문이었다. 베아트리체 엄마와 수진 누나만 남았다. 이들을 배웅하러 공항에 나와서 박하향을 만난 거였다. 그들은 스에마쓰 그룹이 마련한 초대형 최신식 에어버스 A380-800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날아갔다. 나는 부산의 일 마무리 지으면
뒤따라가겠다고 했다. 갈 수 없는 나라지만 말은 그렇게 했다. 그 이유를 자초지종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 이유를 나도 모른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아야코가 묻기 전에 엄마가 선수를 쳐서 그럼 남아서 처리할 일 빨리 매조지고 전화로 알려달라면서 엄마가 시킨 일처럼 페인트 모션(feint motion)을 취했다. 아야코도 어려운 대상인 엄마가 시킨 일이라 그 일에 관해서 더 묻지 않고 일행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 근 9년 만에 나타나 두 집안 간의 상견례를 주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주인공이라 아야코도 살짝 긴장되는 거 같았다.
- 처음에 난 돌연변인 줄 알았어?
- 뭐가?
불쑥 내뱉는 내 말뜻을 몰라 하향이가 갸우뚱했다.
- 선의 말이야, 우리 둘이 안 닮아서 예쁘구나, 했지, 근데 널 보니 너 많이 닮았다.
솔직한 내 말에, 아니 사실이기도 해서 한 말인데 박하향은 기분이 좋은 거 같았다. 하긴 female(여성, 암컷)은 자기를 예쁘다 하면 그날 잠 못 자는 종족(種族)아닌가...
- 안경만 벗었는데... 기초 화장도 안 하고 로션만 발랐어, 이제부터 화장할까 보다...
- 어허이, 남정네들 줄 서면 수사 못 한다, 화장 안 해도 줄 서니까 거기서 적당한 놈 골라...
- 고마워...
박하향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나타냈다. 내가 적당한 놈이라고 질투를 나타냈는데 그게 마음에 든 거 같았다.
- 과정은 필요 없고 어쨌든 우리 둘 사이에 선의라는 선물이며 보물인 딸이 생겼어, 니가 나보고 마법을 풀기 위해 널 안아 달라고 했을 때 선뜻은 아니지만 널 안은 이유야, 하룻밤 풋사랑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경멸하고 혐오하는 사이로 선의가 태어난 건 아니잖아. 안아 달라고 해서 어정쩡하게 넌 내 품에 안기는데 나는 두 팔을 어디 둘 줄 모른다거나 하면 넌 얼마나 뻘쭘하고 나는 얼마나 싸가지가 없을까? 반면에 내가 널 안고 손이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곳 네 엉덩이를 만졌어,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해...
- 맞아, 니 배려를 받을 자격이나 있는 줄 모르겠다... 처음엔 두려웠어, 여기서 더 발전시키면 난 어떡하지, 잠깐 망 설였어, 그러나 이내 결심했어, 니가 하자는 대로 두기로...
- 장소 불문하고 화끈한 정사로 가려는 동물적인 욕망을 꾹 참았어, 그러나 가벼운 입맞춤으로 끝내려 했는데, 그놈의 무전기가, 킥...
- 검찰 후배야...
- 치근대?
- 노코멘트, 큭...
- 선의 생모라는 걸 항상 명심해, 이건 질투야, 킥...
- 세상이 달리 보여, 내 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릴 거 같아...
- 그럼 덮쳐도 저항 못 하겠네?
- 응, 기회야, 천재일우라고도 하지, 큭...
- 하향아, 음... 넌 성제에게 상대가 안돼...
- 뭐? 왜?
눈을 치뜨고 나를 노려봤다.
- 그놈은 인간이 아냐.
- 어떤 상징으로?
- 아니, 실체로서 그놈은 악귀고 악마야, 그래서 넌 감당이 안 돼, 내가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레발을 늘어놓은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야, 성제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 선의 생모는 마약 문제나 대충 수사하고 손 떼.
- 퇴마사야?
- 아냐, 퇴마사? 그게 뭔데?... 성제 그 새끼는 니도 알다시피 원래 악마적인 사이코패슨데 술병에 가둬놓은 악귀가 성제 몸 안에 들어갔어, 평상신 인간인데 욕망이나 화가 치밀면 악귀로 변해, 그럴 때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지, 악귀의 연기가...
- 갑자기 확 구미가 당기는데...
- 성제 새끼가 아버지를 죽였어, 민교도 죽였어, 니가 아무리 특출하고 대단하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어. 선의의 생모로 있어 주면 안 돼?
- 난 총도 있어.
- 킥, 킥, 킥... 개그하냐? 걔들은 상상도 못 할 무기도 쓸 수 있어, 장성제 아버지 장제갈이 대통령 되는 건 떼놓은 당상이야.
- 그래서 장제갈이 대통령 되기 전에 잡을 거야.
- 안돼, 봤잖아, 아버지 장례식 때, 수 십 대의 헬기가 날고 웅장하고 화려한 장례
행렬에 각국 정상들이 조문오고 세계 부호들이 문상과 수십, 수백 만의 조문 행렬 그걸 보려는 엄청난 인파가 몰 리고, 중동의 왕이나 영국의 왕실도 흉내 못 낼 정도로 역대급 초상을 치르는 이유는 뭘까? 왜 그랬을까? 그건 성제 일당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어...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쪽도 힘이 장난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준
거야.
박하향은 침묵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안다. 그건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박살 내지 하는 더 확고한 결심을 마음속으로
다잡는다는 거였다.
너희들 잘나고 똑똑하고 특출난 것들아,
왜 평범하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모션을 취하면 안 되냐?
어디 덧나냐? 그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