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 월요일 오전 9시 55분.
마케팅팀과 QA팀, 기획팀에서 차례로 회의실로 들어와 의자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열기 시작했다.
게임 〈메르하임〉을 서비스하는 주력 멤버들이었다.
이미 자리잡고 앉아있던 운영팀 2년차 사원 신유비는 조용히 그리고 열띠게 회의 자료를 준비중이었다.
마치 누군가와의 전투를 준비하는 전사처럼.
베이지 맨투맨, 대충 질끈 묶은 머리, 갈색 뿔테 안경 너머의 동그랗지만 단호한 눈매.
그녀의 어수선한 책상은 늘 엄언희 본부장에게 ‘쁘띠 고물상’이냐고 놀림 받지만 그에 반해 감정은 늘 정돈되어 있는 편이다.
그녀 옆에는 입사 동기이자 동갑내기 친구 양어린이 앉아 있었다.
보통 남자에 비해 여자들이 입사가 빠른 편이지만, 양어린이 군 복무를 마치는 동안 그녀는 ‘메르하임’ 유저 카페 운영진에 몰입해 있었다.
2년간 거의 직원처럼 일했던 것도 같다.
입사 2년차이지만 마치 4년 정도 근무한 베테랑 같은 면모는 그 시절 경험 때문일 것이다.
덤덤한 유비에 비해 프로젝트 전체 회의 시간만 되면 어린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조용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 손으로 쥐고 빨대를 조심스레 빨았다 놓으며 유비에게 속삭였다.
“유비야. 오늘따라 회의실 공기가 너무 차가워.”
“긴장하지 마. 네 아아만큼은 아니니까.”
유비는 농담을 건네며 슬쩍 어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어글호 사업팀장이 급하게 들어왔다.
검은 셔츠와 슬랙스, 쌍꺼풀도 표정도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 파리한 얼굴, 그리고 왠지 신생아 시절부터 있었을 것 같은 다크서클까지.
신이 어글호 팀장을 만들 때 흑백 프린터로 뽑은 것 같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시작하죠.”
그가 앉자 모든 사람이 동시에 노트북 화면을 회의 자료로 바꿨다.
“오늘은 〈메르하임〉의 신규 콘텐츠 ‘결투장’에 대한 첫 피드백 공유입니다.”
신유비가 슬라이드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기존 우리 게임의 감성 중심 플레이에 비해 긴박한 전투 콘텐츠 도입이 갑작스럽다고 느낀 유저들이 많았어요.
캐릭터가 왜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지 감정적으로 납득이 안된다, 스토리와 연결되지 않아 몰입이 어렵다는 반응입니다.”
기획팀 설정 차장이 공감한다는 듯 덧붙였다.
“전투 자체에 대한 스트레스보다 그 앞뒤 맥락이 부족하다는 거네요.
유저들 감정 선에서는 이 콘텐츠가 깊게 공감이 안 된다는 얘기죠.”
양어린은 담백하게 내뱉는 설차장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마케팅팀 온캐리 대리가 팔짱을 끼고 끼어들듯 말했다.
“근데··· 어쨌든 관련 아이템 패키지들이 좀 팔리지 않았나요? 결투장에 거부감이 든다 해도, 수치만 나쁘지 않으면 괜찮잖아요.”
어글호가 고개를 들며 덧붙였다.
“그렇죠. 감정은 지표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데이터에 없는 건 분석 대상이 아닙니다.”
‘옳게 왔군’
신유비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반박했다.
“하지만 〈메르하임〉은 원래 이런 게임입니다.
감정선, 느린 호흡, 캐릭터 서사. 그걸 좋아했던 유저들한테 이런 식의 치열한 전투나 경쟁은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수도 있어요.”
“그건 유저 입장에서만 보셨을 때죠.” 어글호는 유비의 말을 끊어냈다.
“우리는 운영자입니다. 숫자가 전부입니다.”
회의실에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때, 평소처럼 아무 말 없던 양어린이 갑자기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모두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꽂혔다.
온캐리는 마시던 물을 뿜을 만큼 놀랐고, 설정도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글호도 멈칫하며 시선을 옮겼다.
“전··· 이 게임이 좋아서 이 회사에 들어왔어요.
고등학생 때 많이 힘들었는데, 메르하임에서 유저들이랑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고, 오카리나 연주를 따라 하다 보니까 위로받았거든요.”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동자만큼은 미동도 없었다.
“그래서... 게임에서 감정 얘기를 빼야 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어요. 유저 입장에선 그게 제일 먼저니까요.”
어글호는 정면으로 그를 바라봤다. 한 치의 표정도 드리우지 않은 채.
“그건 플레이어였던 시절의 환상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참을 수 없다는 듯 하지만 차분하게 유비가 한 마디를 얹었다. 아니 덮었다.
“그 환상을 오래 보게 해주는 게··· 리더 아닌가요?”
회의실에 흐르던 차가운 정적은 삽시간에 얼어버렸다.
회의 종료 후, 전검중 QA팀장이 노트북을 덮고 자리를 뜨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늘 회의, 누가 이긴 거죠?”
복도 끝, 유비는 조용히 앞서 걷고 있는 어글호의 등을 바라봤다.
말없이 걷는 그의 손엔 슬라이드 한 장이 구겨진 채 들려 있었다. 거기엔 유비가 강조했던 문장이 적혀 있었다.
“감정적으로 납득이 안된다.”
점심시간을 15분 남기고, 신유비는 팀 대화방에서 회의 피드백 정리를 시작했다.
오늘 회의 요약 : 신규 콘텐츠 ‘결투장’ 관련 유저 반응 및 개선 방향 정리
개선 포인트 : 1) 전투 도입 맥락 강화, 2) 캐릭터 감정선 회복 요소 추가
특별 의견 공유자 : 설정 차장, 양어린 사원
그 아래, 유비는 문장을 한 줄 더 적었다.
[게임은 사람의 감정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경쟁보다 감정이 먼저여야 합니다.]
딱딱한 요약 뒤에 감상을 남기는 방식. 유비 특유의 회의록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1분 뒤, 알림이 떴다.
[어글호] 신유비 씨,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유비는 이 메시지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평소라면 메신저로 끝낼 일로 굳이 불러내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다녀올게.”
양어린은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혼나는 거야?”
“글쎄.” 유비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데 이상하게.. 기대되네..?”
게임사업3팀 파티션.
“앉으세요.”
어글호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정리 중이었다. 유비가 먼저 말을 꺼냈다.
“···회의에서 감정적인 피드백이 과했다고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거 아닙니다.”
유비는 눈을 깜빡였다. 어글호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로 밀며 말했다.
“이거, 유비 씨가 작성한 유저 의견 정리 문서 맞죠?”
“네.”
“감정선 중심 분석, 그다지 중요하다고 느끼는 건 아닙니다만···”
그는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여튼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어글호는 다시 무심하게 시선을 노트북으로 옮기며 말했다.
“다만 다음부턴, 회의에서 ‘리더 어쩌고‘ 라는 식의 발언은 자제해주세요.”
“···네?”
유비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럼 그렇지’
칭찬과 뒤이은 경고. 무엇이 목적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어글호의 말투는 여전히 건조했고, 감정 기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노트북을 덮으며 덧붙였다.
“유저 편에 서 있는 사람, 팀 안에 한 명쯤은 있어야겠죠. 하지만 그게 팀 전체의 방향이 되면 안 됩니다.”
유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 그 균형을 잘 잡고 싶어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어글호는 유비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가보세요.”
운영팀으로 복귀하는 유비의 등에 어글호가 던지듯 말했다.
“유비 씨, 감정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기 마련입니다.
사라질 걸 알면서 붙잡고 있는 건 비효율적이지 않나요?”
유비는 멈칫 뒤돌았지만 입술을 꾹 다물고 짧은 목례만 한 후 다시 뒤돌아 자리로 향했다.
유비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라지지 않아요, 절대.
마음 깊은 곳 세이브 되어 있는 걸 잊고 살아갈 뿐인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