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이른 오후, 건물 3층 사내 카페 근처 회의실.
커피 맛에 예민한 대표가 직접 공수했다는 바리스타 덕에 사내 카페 치고는 썩 맛이 좋은 커피,
안락하고 편리한 작은 회의실이 많이 밀집해 있어
특히 졸음이 밀려오는 이른 오후에는 많은 직원들이 이 곳을 아지트처럼 찾곤 했다.
신유비도 카페에서 샷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받아 안쪽 회의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베이지 니트 위에 얇은 가디건을 걸친 그녀는,
내년이면 10주년을 맞이하는 [메르하임]의 런칭 1주년 기념 굿즈 스티커가 붙은
아이보리색 노트북을 안고 조용히 회의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스티커는 색이 많이 바래 있었다.
살짝 흘러내린 뿔테 안경을 고쳐 쓰는 찰나, 카페 쪽으로 향하는 어글호와 눈이 마주쳤다.
유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이유도 없었고, 굳이 피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예상보다 먼저 말을 건 건 어글호 쪽이었다.
"별도로 유저 케어 콘텐츠를 준비하기로 했다면서요. 잘 돼가요?"
말투는 차분했지만, 묘하게 중의적인 어투였다.
의심인지, 관심인지, 감시인지. 유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섰다.
"네, 뭐... 설차장님이랑 어린씨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덕분에요."
어글호는 살짝 눈썹을 치켜 세워 올렸지만,
예리한 신유비만 알 수 있는 표정 변화일 뿐 감정은 거의 드러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저 지나가듯, 그녀의 어깨 너머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유비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응원인 줄?"
카페 회의실에 도착하니 설정 차장이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설 차장님. 일찍 오셨네요."
"덕분에 재미있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잖아? 어글호 팀장 쪽 콘텐츠 기획은 마무리만 하면 되서···“
신유비가 새로운 콘텐츠를 시도하게 된 바람에, 기획팀 설정 차장은 일이 두배로 늘어버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피곤하진 않으세요?“
옆에서 같이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양어린도 걱정 어린 눈으로 물었다.
”··· 우리 팀 대리 한 명을 유비씨 기획에 붙일 수도 있었지만..“
설정 차장은 말을 잠시 다듬으며 덧붙였다.
”어 팀장에 맞서는 콘텐츠인데 시니어 한 명쯤은 붙어야 힘이 실리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회의실 TV화면에 연결해 준비중이던 내용을 유비에게 보여줬다.
[신규 콘텐츠 명: from NPC to YOU
목적 : 유저 감성 케어용 이벤트 퀘스트]
"유저들이 메르하임에서 가장 감정 몰입을 했던 순간을 회고하는 거예요.
각 유저들의 과거 플레이 로그 기반으로 편지 텍스트를 세팅해서,
그걸 NPC들이 직접 편지를 보낸다는 컨셉으로.
거기에 추억 강조, 우리의 감사, 혹은 사과 같은 테마도 섞고요."
"그럼 편지 내용도 일괄적인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맞춤형이겠네요?"
양어린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유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 수령 기준이 특정 시점 이전의 활동 데이터면..
예전 유저들은 누구나 와서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고 싶겠네요?"
"맞아, 그리고..."
설정이 말을 이었다.
"유비씨, 지난 달 회의에서 보여줬던 유저들의 감성 어린 댓글 반응 모아놓은 거, 그걸 꼭 써먹자고.
자신의 댓글이 게임 속에서 활용될 줄 몰랐을거야. 하하.” 설정 차장은 왠지 개구지게 웃어보였다.
유비도 기분좋은 미소로 화답했지만,
머릿 속에선 당시 발표 때 있었던 일이 살짝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 댓글들을 보면 프로젝트 멤버들도 기분이 좋아질거란 생각에 열심히 정리한 자료인데,
왠지 시큰둥하게 ”아. 예. 그렇군요“라며 찬물을 끼얹었던 어 팀장의 마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했다.
”설 차장님은 왠지 우리랑 죽이 잘 맞으시는 것 같아요.“
양어린의 들뜬 목소리에 유비의 회상도 정지했다.
”.. 다들 처음엔 우리랑 결이 같았지. 글호도 원래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설정 차장 입에서 나온 어린과 유비가 들어본 적 없는 호칭에 눈이 동그라지자, 설정은 급하게 회의를 마무리 했다.
”아.. 아니야. 그럼 난 세부 기획 잡으러 먼저 올라가 볼게.
어린씨는 더 덧붙일만한 자료 찾으면 바로 공유해 주고, 유비씨는 어 팀장이랑 마케팅 쪽에 간단하게 내용 공유 부탁해.”
같은 날 늦은 오후, 사내 메신저로 진행된 온라인 회의.
금요일 퇴근 시간 가까이에 회의를 소집하긴 민폐란 생각에
유비는 짧고 빠르게 온라인 회의로 관련 멤버들에게 내용을 공유하고자 했다.
유비가 업데이트 개요를 올리자, 마케팅팀 방치형 팀장은 “괜찮은데?”라며 대충 맞장구쳐주는 느낌이었다.
방 팀장의 찬성 메시지에 디테일한 내용을 덧붙여 쓰던 유비는 갑자기 키보드를 멈췄다.
"뭘 준비하시는 지는 알겠는데, 지나치게 감성적이라..
지금 준비중인 결투장 신규 업데이트와 서로 그 [몰입]이란 걸 방해할 것 같은데요?“
굳이 [몰입]에 볼드까지 넣어서 강조하는 비아냥.
"메시지의 톤앤매너는 조정하기 나름입니다." 유비는 차분히 대꾸했다.
그 말에 온캐리가 끼어들었다.
”마케팅적으로도 유비씨 쪽 콘텐츠를 너무 강조하면, 신규 유저들은 붕 뜬 느낌을 받을 것 같은데요?“
”결투장 콘텐츠처럼 [대대적으로 광고] 할 생각은 없었어요. 결도 맞지 않구요.”
유비 역시 ’대대적으로 광고‘에 볼드를 넣어 살짝 반격기를 날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광고에 ‘복귀 유저를 위한 특별 이벤트’도 있다는 걸 언급만 해주세요.
한 두명의 유저가 편지를 읽고 나면 자연스레 바이럴 될 거라 예상합니다.”
운영팀 유비의 단호한 멘트에 마케팅팀 방치형 팀장은 그럼 회의를 마무리 하자고 서둘렀다.
어글호 역시 뭔가를 덧붙이려는 듯 메시지를 적는 중이라는 아이콘이 보이더니 이내 멈추고
"그럼 그렇게 해보시죠." 짧게 대답했다.
그날 밤. 창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유비는 금요일 밤에 사무실에 남아 그동안 모아 온 유저들의 메시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동하는 댓글 들은 노트에 수기로 적어오던 유비였다.
“누구든 지친 맘을 쉬어 갈 수 있다면, 그 곳도 삶인 거 아닌가요?”
두어 달 전 그 댓글을 발견했던 날, 유비는 사무실에서 저도 모르게 눈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감정적인 공감.
‘그게 그렇게 힘든걸까···’
그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멀리.. 역시 야근중인 어글호가 보였다.
완벽하게 정리된 책상 위엔 모니터 3대와 키보드, 큰 텀블러만 놓여있다.
정돈되었지만 살짝 흐트러진 머릿칼, 단정한 자세,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손끝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늘 나와는 다른 그 모습이 이상하게 자꾸 걸리는 건, 그 날부터였다.
몇 달 전, 프로젝트 멤버들 모두 모이는 신규 캐릭터 컨셉 발표 회의.
운영팀장이 그만둔 후라 유비는 늘 긴장 상태로 회의에 참석했었다.
조금 일찍 회의실에 들어선 유비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기획팀과 사업팀 대리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니.. 비주얼 컨셉 시안 좀 봐.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 차갑잖아.
감정선 하나 없이 명령만 내리는 컨셉이라니. 정 떨어져."
"아니 근데.. 이거 어 팀장님 닮은 거 아님? 다크서클, 말 없고, 차가움."
“아하하. 그러게? 둘 다 냉동인간같네”
“저번 티타임때는 진짜 다들 빵 터지는 데도 본인만 뚱-하니 목석같이 앉아있더라고.. 절레절레.”
“내 AI보다도 인간미 없는듯“
그 말에 대리들 모두 깔깔대며 웃는 가운데, 유비 등 뒤로 어 팀장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요."
깜짝 놀라며 수다를 멈춘 사람들을 무심히 지나쳐 어글호 팀장은 회의석 앞쪽에 착석했다.
회의가 끝나고, 아까 수다를 떨던 대리들이 ‘어 팀장은 본인을 뒷담화 삼는 순간에도 냉정했다’고 또 곱씹어들 댔지만
유비 생각은 달랐다.
회의 중 내내 작게 떨리던 손 끝. 미세하게 쓸쓸해진 표정.
사람들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는 유비만이 눈치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 사람도 사람인거였구나..’
그때부터 어 팀장도 유비만의 [메르하임] 속 NPC가 되었다.
’냉동인간 되기 직전인 회사 상사 NP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