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10시를 막 넘긴 시각.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유비의 업무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늦은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비오는 금요일인지라 사무실은 이른 저녁부터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신유비는 빼꼼하고 파티션 너머 건너편을 보았다.
정리된 책상 너머, 어글호는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 팀장님.”
그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유비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이 시간까지 계실 줄은 몰랐네요.”
“···마찬가지 아닌가요.”
짧은 대답. 유비는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책상에 금빛 포장지의 초콜릿을 조용히 올려두었다.
“당 떨어지면 집중력 떨어지니까요.”
어글호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저 손끝으로 초콜릿을 살짝 책상 모서리 쪽으로 밀어두었다.
그 무심한 거절의 동작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곧 태연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거 진짜 맛있는건데.”
어글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유비가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 어글호는 모니터를 잠시 대기 모드로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바쁜 와중에··· 굳이 왜 오신 거죠?”
유비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금요일 밤에 같은 건물에서 야근하는데, 신경 쓰이잖아요.”
“신경이 왜 쓰이는데요.”
유비는 뿔테 안경 너머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니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뭔가를 유비는 느낄 수 있었다.
업무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선 유비는 문득, 예상보다 훨씬 거센 빗줄기에 잠시 멈춰섰다.
핸드폰에 찍힌 일기예보엔 ‘약한 비’라고 했는데, 이건 거의 소나기에 가까웠다.
“지하철까지 전력질주 각이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발을 떼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하고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자, 어글호가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난 차가 있어서요.”
어글호는 짧게 말하고, 우산을 유비에게 건넸다. 유비는 조용히 우산을 받아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거봐요. 신경 쓰이죠?”
그 말에 어글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뒤돌아서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유비는 그 등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우산을 펼쳤다.
주말 동안, 두 가지 콘텐츠가 동시에 메르하임에 업데이트되었다.
어글호가 주도한 [결투장 NEW 토너먼트 업데이트]는 긴장감 높은 랭킹전과 신규 코스튬 보상을 내세웠고,
신유비와 설정, 양어린이 기획한 [From NPC to YOU]는
감성적인 편지와 유저의 플레이 기록을 연결해주는 콘텐츠였다.
첫 날, [결투장]은 유입 유저 수와 플레이 회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온캐리 대리는 환호했고, 어글호도 조용히 숫자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3일 후, 흐름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결투장]은 고액 현질 유저들만 즐긴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고, 신규 유저 이탈률이 다시 늘어났다.
반면, [NPC 편지] 콘텐츠는 유입 대비 체류 시간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유저 커뮤니티에는 자신이 받은 편지를 공유하는 글이 쏟아졌다.
“이런 콘텐츠, 이제야 해줘서 고마워요.”
“진짜 감동··· 울었다.”
“그때 그 감정, 다시 떠오르네요.”
뿐만 아니라 [메르하임]을 플레이하지 않는 타 게임 커뮤티니 유저들 사이에서도
근래 찾아보기 힘든 감성 자극 콘텐츠라며 회자되었다.
숏폼은 숏폼대로 대량 생산되었고,
오랜만에 진득하게 [메르하임]을 플레이하는 대형 게임 유튜버들의 라이브도 줄을 이을 정도였다.
금요일 오후 회의실.
정기 회의 요일은 아니었지만 신유비는 프로젝트 멤버들 앞에서 관련 통계를 보여줬다.
이례적으로 엄언희 본부장까지 자리해, 본인의 계정이 받은 편지를 공유하며
멤버들과 기분좋은 수다를 떠는 리뷰 회의였다.
콘텐츠 개요를 공유하던 메신저 회의 때 대충 동조하던 방치형 팀장도
본인은 처음부터 먹힐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온캐리도 약간의 마케팅이지만 도와준거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두가 '이게 [메르하임]이다' 라며 한 목소리로 즐겁게 성과를 자축했다.
신유비도 한껏 업된 목소리로 어떻게 기획을 시작했는지와 커뮤니티에서 보았던 반응들을 조잘거리며
멤버들에게 이야기하다가 멈칫 어 팀장쪽 자리를 바라보았다.
어글호는 조용히 노트북으로 내용을 정리하며 자리를 지키다가, 곧 아무 말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
그날 저녁, [NPC 편지] 콘텐츠 주역 3인방은 가벼운 자축 술자리를 갖기로 했다.
설정 차장이 한턱 쏘고 싶다며 우겼지만, 유비와 어린은 얻어먹을 수만은 없다며 한사코 1/n을 주장했다.
세 사람은 회사 근처 작은 이자카야에 자리했다.
콘텐츠를 만들어가며 있었던 에피소드들과 유저들의 반응, 회사 사람들의 응원...
세 사람의 수다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분명히 가볍게 끝내기로 한 술자리인데 벌써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설정 차장은 약간 흐릿한 눈으로 술잔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글호가 함께 했다면 좋았을텐데.”
유비와 어린은 지난 카페 회의 자리에서 설정 차장이 슬적 내비친 어 팀장의 이야기가
드디어 시작된다는 기대감에 숨을 죽이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행여나 잘못된 리액션으로 설정 차장이 다시 입을 닫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건지 설정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글호말이야.."
"사실은 돌아오고 싶은 건지도 몰라.."
"...10년 전에 글호가 메르하임 첫 GM이었거든."
"!!!"
유비와 어린은 4시간 동안 먹어 온 술이 한 번에 깨는 것만 같았다.
얼어버린 두 사람 뒤 너머를 바라보며 설정은 10년 전 지금의 그 프로젝트 회의실 풍경들이 떠올랐다.
어글호와 설정은 입사 동기였다.
둘 다 워낙 겜돌이였고, 회사에서 가깝지 않은 곳에 자취를 하면서도 서로 동네가 같아서
늘 퇴근 후에는 같이 게임을 즐기곤 했다.
같이 게임을 하는 게 좋아서 한 사람이 게임을 접으면 한 사람도 마저 접을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신규 프로젝트 [M] 킥오프 회의.
두 사람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운영팀 막내 글호가 대표 GM으로 선발된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게임 커뮤니티 죽돌이면서 누구보다 장르 이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운영팀 상급자들도 큰 결정이나 판단은 본인들이 할테니 마음껏 놀아보라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설정 역시 기획팀 막내로서 유저 커뮤니케이션, 이벤트 관련 쪽 콘텐츠를 맡게 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일적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었다.
메르하임 런칭 후 1년 간, 글호는 잠자는 시간외에는 늘 [메르하임]에서 살았다.
회사에서는 운영자로서, 집에서는 유저로서.
일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메르하임]에서 충분히 힐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글호가 한 유저에게 게임의 업데이트 정보를 몰래 공개하는 방식으로 금전 이득을 취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글호는 물론 그런 적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한 유저와 오랜 시간 주고 받은 메시지를 증거로 GM 업무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메시지에는 직접적으로 게임의 정보를 거래한 정황은 없지만,
특정 유저와 꾸준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수상하다는 내부 판단에서였다.
설정은 글호의 결백을 누구보다 믿어줬지만, 그도 그때는 팀의 막내일 뿐이었다.
결국, 유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도맡는 운영팀에서 배제되어
그나마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깊다는 것을 높이 사 사업팀으로 전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나랑 게임도 하지 않고 조금씩 변하더라고."
설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열심히 일했을 뿐이라는 억울함.. 운영팀에서 보호받지 못했다는 배신감..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회사.."
설정은 술을 한 입에 털어놓고 빈 술잔을 매만졌다.
".. 돌이켜 보니 글호가 저렇게 변한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네. 하하"
술만큼 쓰디 쓴 쓴웃음이었다.
그 때 설정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리해진 유비가 물었다.
"..첫 GM이었다구요..?"
"..응?"
"..한 유저와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가 그랬다구요..?"
"..으응.. 그랬지..? 나한테는 그냥 상담을 해 준 것 뿐이라고 했어.
게임을 좋아하는 고등학생인데, 꼭 대학을 가야 게임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거냐.
1주년 굿즈 아이디어를 막 제안하기도 하고..."
그때, 유비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쏟아진 눈물이 테이블에 후두둑 떨어질 정도였기 때문에 설정과 어린은 깜짝 놀라며 유비를 바라보았다.
"유비야.."
"...저에요."
"..뭐?"
"그 유저가.."
"..저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