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깐, 내가 너한테 그런 소릴?”
해바라기는 반쪽짜리 달걀프라이를 유심히 노려보며 질문했다. 헤어밴드로 넘긴 노란 산발머리와 반항기 가득한 눈매가 사냥에 실패한 철부지 사자 같았다. 단일은 여유롭게 대꾸했다.
“크림 파스타와 오므라이스도 차려주었고.”
“하아, 믿을 수 없군. 이젠 그만둔 줄 알았는데.”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나봐?”
“어. 뭐, 오래 전이지만....”
해바라기는 입안에 달걀프라이를 구겨 넣었다. 그리고 빈 접시를 구석에 밀어두고는 발꿈치만 들어 부엌으로 껑충껑충 건너가는 것이었다. 아직 취기가 남았는지 발을 헛디뎠지만 용케 넘어지지 않았다. 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고 해바라기의 양손에는 맥주캔이 들려있었다. 그가 하나를 단일에게 건네자마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 비흡연자야.”
“실례.” 해바라기가 반지 낀 검지로 담뱃갑 안에 담배를 밀어 넣었다.
“갈 거야?” 스피드데이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응. 하지만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잇차! 그런데 나이가?”
해바라기가 주변에 먹다 남은 과자봉지를 포착하자 눕다시피 끌어당기며 물었다. 방바닥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손바닥 소리가 차졌다. 뭔가 대단한 거라도 건네는 걸 정중히 사양했다.
“스물아홉. 너는?”
“.....스물일곱.” 해바라기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도 금방 화색이 돌았다.
“형이라고 불러.” 단일은 싱긋 웃었다.
“좋아. 형은 이런 경험 없어? 이런 게 밀당일까? 설마 이번에도 선택해주지 않는 건 아니겠지?” 해바라기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일단 나도 스피드데이트에 신청해줘. 겪어봐야 조언을 해주든가하지.”
“이런 거 싫어하지 않아?” 해바라기는 캔에 맺힌 물기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특별히 좋아할 이유도 없잖아. 그 여자가 얼마나 예쁜지도 궁금하고.”
“아하, 역시!” 해바라기가 납득이 간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널 고를까?”
“내가 한 질문이잖아.”
“말하기 싫으면 말고.” 단일은 귀퉁이가 터진 쿠션을 등에 받치고 벽에 기댔다.
“모르겠어. 그런데 다시 오라고 말한 걸 보면 선택하겠다는, 의미 아닐까?”
그럴 생각이었다면 다시 한 주를 기다릴 이유가 없지, 단일은 빈 캔을 잡동사니 쪽으로 밀어두고 팔짱을 꼈다. 지저분해보였는데 비슷한 것끼리 구석에 모아버리니 묘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단일은 즐거운 상상을 떠벌리는 해바라기의 수다를 백색소음 삼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녁도 이 집에서 해결할 심산이었다.
“안녕하세요.”
단일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머리를 꾸벅 숙였다. 목에는 숫자 5가 적힌 명찰이 사원증 같이 걸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3번 여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눈매가 깊고 이마가 둥근 미인이었다. 여자는 몸매가 살짝 드러난 잔무늬 원피스에 롱카디건 차림이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봉긋한 가슴을 지나 촉촉하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헤어에센스 향기가 달콤했다. 단일은 프로필 카드를 꼼꼼히 읽는 척했다.
이름 : 신서영
나이 : 31살
직업 : 일러스트레이터
취미 : 산책
특기 : 수영
하고 싶은 말 : 다 같이 좋은 짝 만나서 탈출해요!
“비 오는 날에도 산책하세요?”
단일이 프로필 카드를 내려두었다. 서영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살짝 휘었다.
“바람만 세지 않으면요. 단일 씨는 취미가 요리네요. 잘 하시나 봐요?”
“아뇨. 가장 건전해 보이는 걸로 골라서 적었어요.”
“건, 건전한 거요? 그럼 다른 취미가?” 서영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 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요?” 단일이 상체를 내밀며 심각한 얼굴로 속삭였다.
“아, 음....아니요. 내키지 않으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되요.” 서영은 신중히 대답했다.
“좋아요.” 단일은 몸을 바로 하고 주먹 쥔 손에서 손가락 하나를 폈다.
“..........” 서영이 침을 삼켰다.
“일단 늦잠.”
“..........”
“그 다음은 게임,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랑 만화책 보기. 아, 최근에는 ‘기생’이라고 하나 늘었네요.”
“....기, 기생이요?” 일순 멍해있던 서영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이웃 간 왕래라고 해두죠. 건전한 표현으로요,” 단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특이하시네요. 단일 씨는.” 서영의 연분홍 입술에서 맑은 웃음이 터졌다.
“제가 특이해요?” 단일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했지만 주변에 시계가 없었다.
“네. 보통은, 그런 말 안 하잖아요.” 서영은 한쪽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생글거렸다.
“처음에 한 질문도 그래요. 보통 그림을 잘 그려서, 수영을 잘 해서 부럽다고 시작하거든요.”
“편해서겠죠? 카드에 적힌 정보는 모르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키워드니까요.”
“네. 그래서 가끔은 지루해요.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해야 되니까요.” 서영이 한숨 쉬었다.
“그럴 거 같아요. 참 지루하죠.”
단일은 서영의 둥근 어깨 너머 해바라기의 옆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서영 씨는 다음 주에도 참여하시나요?”
“그건 왜 물으시죠?” 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드러난 목선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제가 고민이 많은 타입이거든요.” 단일은 손가락으로 손목 윗부분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후후. 아니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서영은 어깨를 모으며 아이처럼 미소 지었다.
“탈출, 하시는 건가요?” 단일은 일부러 프로필 카드에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아아, 그건 아니에요.” 서영은 ‘하고 싶은 말’에 적힌 문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단일은 먼발치에 서 있던 남직원이 다가오는 걸 보며 주어진 시간이 몇 초 안 남은 걸 짐작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해바라기가 그녀 앞에 앉을 터이다. 어차피 두 사람의 일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걸 부탁받은 적도 없었고. 단일은 서영이 준비한 대화를 상상해보았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 해바라기와 작별할까.
“10분 경과하였습니다. 대화는 즐거우셨는지요.” 남직원이 손을 비비며 흡족하게 말했다.
“서영 씨.” 단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네?” 서영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인사도 깜박한 모양이다.
“남성분들은 다음 테이블에 착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 원래 요리 싫어해요.”
“..........”
프로필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단일은 싱긋 웃었다.
“그래서 즐기면서 하고 싶어요. 잘 하진 못해도 시도할 만한 게 취미니까요.”
서영은 4번 테이블로 이동하는 단일을 멍하니 보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바로 했다. 해바라기가 전처럼 밝게 인사했다.
“음, 잘 지냈어요?”
좀 더 밝은 노란색이 어울리는 남자라고, 서영은 새삼 깨달았다. 그녀는 입가에 맑은 미소를 꽃망울처럼 터트렸다. 프로필 카드는 뒤집어진 채 손바닥 아래에 감추어져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해바라기는 노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악했다. 액세서리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말만 서른일곱 번 한 거 알아?” 단일은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굴렸다.
“어째서 문자가 안 오는 거야?” 해바라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울먹였다.
“이거 말이야?” 단일은 핫바를 문 채 휴대전화를 흔들었다.
“뭐? 이, 이리 줘봐!”
“.........” 단일은 무심히 눈을 끔벅이며 핫바를 연속으로 깨물어 먹었다.
“.......이럴 수가. 형은, 그러니깐 형은 그냥 체험한다는 거 아니었어?”
“연애도 체험의 연장선이지.”
“......왜, 왜 선택을 안 해준 거지?” 해바라기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끙끙됐다. 늘씬하고 하얀 팔다리가 방금 세탁기에서 꺼낸 빨랫감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이거 내가 먹는다?”
단일은 해바라기가 한쪽에 치운 핫바를 집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리기 전에 가위로 흠집 낸 부분을 능숙하게 잡아당기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전부터 궁금한 건데 왜 그렇게 믿어? 서영 씨한테 선택받을 거라고.”
“그야 내가 고백, 비슷한 것도 했고....” 해바라기는 머리를 박은 채 웅얼거렸다.
“했고?”
“까놓고 말하면 내가 제일 잘생겼다고.”
해바라기는 눈만 들어 툴툴거렸다. 그래봤자 머리카락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단일은 그의 이마에 몇 초간 손을 짚은 다음 핫바를 깨물었다. 해바라기는 눈썹을 찡그렸다. 허리를 번쩍 세워 두 손을 가운데로 모아서 고양이처럼 어깨를 모았다.
“진심이야.” 해바라기가 강조했다.
“무섭게 왜 그래. 알아. 안다고. 근데 너 말이야. 혹시 인터넷에 사진 올린 적 있어?”
“갑자기 뭔 소리야?” 해바라기는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보기엔 서영 씨는 처음부터 널 알고 있던 거 같은데.”
“........설마, 물어봤어? 나에 대해서?” 해바라기는 당장이라도 죄를 추궁할 작정이었다.
“아니. 내 얘기하기도 바쁜데 무슨. 10분, 의외로 짧더라.”
“그리고 형은 커플이 되었지. 그런데 방금 전에 한 말은 뭐야?”
해바라기는 손을 바꿔 다시 턱을 괴었다. 단일은 마지막 고깃점을 삼키며 뒤통수에 깍지를 끼었다. 까만 머리카락이 찬바람에 헝클어지고 제자리에 돌아왔다. 일자로 다문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서영 씨는 왜 첫 번째 스피드 데이트 때 프로필 카드를 보여주지 않은 걸까?”
“그런 걸로 서로 평가하는 게 싫다고 했잖아.”
“그럼 두 번째 스피드 데이트는?”
“뭐, 같은 이유 아니었겠어?” 해바라기가 몸을 비틀어 바지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왜 하필 그게 너였을까, 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응?” 해바라기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고개를 들었다.
“직업 ‘일러스트레이터’, 취미 ‘산책’, 특기 ‘수영’.” 단일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하품했다.
“..........”
“프로필은 어차피 이성에게 보여주는 걸 전체하고 본인이 직접 작성해. 그러니깐 어느 정도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성하는 게 보통이란 말이지. 평가 받는 게 싫다면 모호하게 적어도 된다는 소리야. 그런데 서영 씨가 준 프로필은 평범했어. 직업도 있겠다, 산책과 운동으로 자기관리도 하잖아.”
“...그랬지.” 해바라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는 그렇다고 쳐도 두 번째까지 네가 걸린 건 특이해.” 단일은 똑같이 턱을 괸 채 해바라기와 눈을 맞추었다. 까만 눈동자가 짓궂게 번뜩였다.
“특이하다고?” 해바라기는 전에 못 본 단일의 색다른 표정을 보며 숨을 죽였다.
“그래. 굳이 너한테만 두 번씩 평가 받고 싶지 않은 이유가 뭘까. 선입견을 주기 싫다는 건 이해해. 하지만 두 번씩이나 남들과 다른 행동을 요구하는 건 어떤 편견을 심어줄까? 내가 보기엔 프로필 카드보다 인상적인 평가 기준이 될 듯한데.“
단일은 잠시간 말을 멈추고 싱글벙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