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스피드 데이트
“....에 따르면 지난 해 대한민국 1인가구는 520만 3천 가구, 전체 가구의 27.2%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즉, 네 가구 중 한 가구는 혼자 살고 있었다는 말인데요. 혼밥, 혼술, 혼영, 혼놀 등 1인 가구의 수요를 겨냥한 다양한 마케팅 행사를....”
혼족. 그러니깐 혼자 사는 족속을 일컫는 줄임말이다. 같은 의미인 나홀로족보다야 처량한 느낌은 덜하고 정체성을 고민할 시간도 덜어주니 그런대로 나쁘진 않은 호칭이다. 혼자 살기로 결정한(작정한) 사람처럼 들려도 어차피 계획대로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서 반발할 가치도 털끝만치 없다. 나홀로족이든 혼족이든 그만하면 됐으니깐, 별의별 신조어로 일상을 다시 정의내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나는 이대로가 좋다.
“...헤에.”
최단일은 신선마트라고 적힌 초록색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 계란 4입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오므라이스’라고 결정했다. 그러니깐 달걀이 필요하다. 웬만하면 실내에서 꼼짝하지 말자는 주의, 안전제일주의자인데 더 굶다가는 병원에 생돈을 바칠세라 엿새 만에 외출을 감수했다. 마침 텔레비전에서 볶음밥을 감싼 달걀옷이 침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반숙 정도의 촉촉한 식감을 살리려면 얼마간 불의 세기를 조절해야 했지만, 이왕 움직일 거 제대로 먹자고 작정했다.
단일은 햄과 치즈코너에서 혀를 쯧 찼다. 걸음이 아쉬워 ‘파격세일’이나 ‘기절초풍’, ‘주인장이 미쳤어요!’라고 써 붙인 제품은 없는지 빙 둘러보았다. ‘빙’이라고 해봤자 판매대가 짧아 사정거리는 270도면 충분했다. 단일은 바구니를 옆구리에 꽉 낀 채 고개만 삐딱하게 돌려 900ml 우유를 노려보았다. 단일제품의 가격은 1,900원, 1+1 기획제품의 가격은 3,500원이다. 초딩 때 배운 나누기를 십분 발휘하여 단가로 따지면 1+1 기획제품이 150원 저렴했다. 하지만 유통기한과 우유의 양을 감안하면 단일제품만 못했다. 어차피 한 개는 먹기도 전에 상하겠지?
“...어떡하지.”
“어떡하긴요. 나누면 되죠.”
“네?”
“네?”
단일과 남자는 서로 놀란 얼굴로 마주보았다. 남자는 전날 과음했는지 술 냄새를 식식 풍기고 있었다. 제멋대로 뻗친 노란 머리와 피곤해 절은 표정은 못된 짓만 골라하는 양아치 같았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한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301호 남자였다. 단일은 여전히 그를 모르는 척하며 바구니를 슬쩍 보았다. 놀랍게도 파스타면이 들어 있었다. 설마 그걸로 해장하려는 건가.
“아, 파스타 해먹으려고요.”
301호가 양심에 찔릴 정도로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괜히 양아치라고 했나. 마트의 형광등 조명에 비친 노란 머리와 환한 미소가 꼭 해바라기를 닮았다. 해바라기는 귓불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이너컨츠에도 화이트 피어싱이 한 개 박혀 있다.
“다른 건 다 있는데 면이 없는 거 있죠?”
라고 아무렇지 않게 덧붙인다. 대답을, 해야 되는 걸까. 단일은 아직도 그를 못 알아본 척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도 해바라기는 친구 만난 참새처럼 옆에서 날개를 파닥파닥, 부리로 종알종알 떠들기 시작했다.
“달걀이네요? 여기는 4입도 팔아서 좋아요! 다른 데는 10입이라서 먹다보면 꼭 한 개는 썩더라고요. 난 그걸 파이널 보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아, 그거 알아요? 달걀은 뾰족한 곳이 아래로 향하도록 냉장보관 하는 게 오래 간대요.”
“......네.”
“농담이에요. 파이널 보이가 아니라, 여기요.”
해바라기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턴하여 팔짱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씨익 웃었다. 단일은 직원이 계란 4입의 바코드 찍고 단말기를 두드리는 모습을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오프닝 보이요. 퍼스트는 진부하잖아요. 그러니깐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질문은 더럽게 고리타분해! 시초는 바로 우리 집 냉장고였으니까요. 부패를 노여워하지 말라! 썩지 않으면 이 세상은 전부 콩나물시루가 되어 있을 걸요? 크하하핫! 빌어먹게 좁아터진 세상.”
단일은 어느새 301호의 거실에 멀뚱멀뚱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들고 있던 계란 4입은 어디로 가고 없다. 이윽고 탁탁, 팬에 기름 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렇게 벗어던진 점퍼와 옷가지들이 현관부터 거실까지 심다만 지뢰같이 놓여 있었다.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지만 묘하게 친숙한 분위기였다. 보다만 성인잡지와 라이트 노벨, 만화책, 몸만 쏙 빠져나온 담요, 귀퉁이가 터진 쿠션, 헤어밴드, 이불, 알루미늄 캔, 이어폰, 과자부스러기, 사탕 포장지가 천지에 널려 있었다. 단일은 무심코 깔고 앉았던 편의점 봉투를 엄지와 집게만으로 들어 홱 던졌다.
“오래 기다리셨죠? 자자, 들어요.”
해바라기는 진한 크림 냄새를 풍기며 성큼 다가왔다. 접시 세 개를 들었으면서 여유롭게 발을 휙휙 내저어 바닥에 쌓인 물건더미를 사방에 튕겨냈다. 희한하게 모두 제자리를 찾아 날아간다는 느낌이었다. 단일은 바닥에 세팅된 크림 파스타 2인분과 오므라이스를 보며 입을 딱 벌렸다. 해바라기가 크림 파스타 한 접시를 코에 박으며 신음을 질렀다. 단일은 흠칫했다.
“으음, 이 냄새야. 아까 산 우유로 만든 거예요. 그런데 달걀은 우리 집에 남은 오프닝 보이로 쓴 거니깐, 1개는 남았어요. 냉장고에 두었으니깐 다 먹으면 가져가요. 그냥 두면 다음에 또 해 줄게요. 아, 물론 뾰족한 걸 아래로 해서 넣었으니깐-”
단일은 포크로 파스타 면과 야채를 듬뿍 찍어 입안에 넣었다. 의외로 맛있었다. 허기가 가시자 긴장이 풀려 식은땀이 나던 얼굴이 약간 시원해졌다. 해바라기는 여전히 해맑게 웃으며 물 만난 제비처럼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막 헤어밴드까지 착용하여 뽀얀 이마까지 튼 사이가 돼버렸다. 단일은 겉으로만 멀쩡한 해바라기의 독특한 주정을 두고 잠시잠깐 고민했다. 이 남자, 술이 깨면 지금 일을 기억하긴 하는 걸까. 단일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포크로 오므라이스를 쿡, 찍었다. 달걀옷이 벗겨진 김치볶음밥이 매콤한 향을 풍겼다.
일단 먹고 나서 생각하자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단일은 속으로 ‘제발, 제발’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아, 제발.” 단일은 애원했다.
해바라기의 눈가에는 어느새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여기서 눈을 한 번 더 깜박이면 해바라기의 본격적인 주정이 나이지리아 폭포수를 닮은 눈물과 일시에 쏟아질 전망이었다. 단일은 포크를 쥔 손에 힘을 꽈득 주었다. 제발, 제발, 제발! 깜박이지마! 울면 안 돼!
“....훌쩍.”
해바라기가 부르튼 입술을 쑥 내밀었다. 붉은 입술이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초읽기를 하기도 전에 울음을 앙 터트리는 것이었다. 단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이 301호와의 첫날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