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넓고 깨끗한 화이트 톤의 거실.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아트월의 벽면엔 자인의 화려한 독사진이 걸려 있었다. 독사진 양쪽에는 TV와 에어컨이 있고, 책장과 장식장 사이에는 미소 가득한 자인의 모습이 담긴 크고 작은 액자들로 즐비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던 민지가 벽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녀는 자인의 스타일리스트 겸 매니저였다. 민지는 거실 옆 복도를 걸어가더니 제일 끝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환한 거실과 달리 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하도록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공간.
사방이 어두컴컴했지만 민지는 익숙한 듯 천장에 박힌 야광 별빛을 의지해 전등스위치를 켰다.
불빛이 켜지자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자인의 모습이 보였다.
“언니! 자인 언니! 시간 다됐어요. 얼른 일어나요!”
“음… 싫어. 오 분만….”
“오 분은 무슨. 안 돼요. 오늘 촬영 있는 날이잖아요.”
민지는 잠투정을 하며 이불을 푹 뒤집어쓰는 자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있는 물병을 자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거 마시고 잠 좀 깨요.”
자인은 비몽사몽인 상태로 건네받은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하아. 민지야. 물 마셔도 잠 안 깨는데 나 조금만 더 자면 안 돼? 응? 일분만.”
"안된다니까요. 어서 일어나요!”
단호하게 말하던 민지가 물었다.
“어? 언니, 또 우셨어요?”
“응?”
자인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손등에 묻은 물기를 확인하곤 대답했다.
“아….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또 그 꿈을 꾸신 거죠?”
“아마도….”
자인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민지는 그런 자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평소에 활달하기 그지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꿈에서는 매번 눈물을 흘렸다. 아무래도 그것이 신경 쓰였다.
“언니, 괜찮아요?”
“응. 한두 번도 아닌데 뭐. 괜찮아. 나 샤워나 해야겠다.”
자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민지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
욕실에서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민지의 찜찜했던 마음도 함께 씻어지는 것 같았다. 곧이어 자인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은 민지는 자인의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가 끝나고 욕실을 향해 소리쳤다.
“언니! 저 먹을 것 좀 사올게요! 씻고 나오세요!”
탁!
민지가 나가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인은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추고 샤워기를 껐다. 그리고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습기를 먹은 거울을 손으로 닦아냈다.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눈이 퉁퉁 부은 한 여자가 거울 안에 있었다.
“와! 진짜 못났다. 못났어….”
휴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요즘 들어 남 몰래 내쉬는 한숨이 많아졌다. 다 꿈 때문이었다.
“진짜 오늘로 벌써 몇 번째야…. 로또라도 사야 끝나려나.”
꿈은 이유도 없이 반복됐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 달, 두 달 계속 같은 꿈이 반복되자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책을 뒤져보고, 병원에 들러 상담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서럽게 울던 여인과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가 있었다는 것뿐.
자인은 더는 꿈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남겨진 꿈의 조각들을 털어냈다.
복잡한 건 질색인 성격이었다. 자꾸 생각해봤자 마음 한구석에 생채기가 난 듯 쓰라릴 뿐이었다. 그러나 심란해지는 마음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특히 오늘처럼 그 남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를 때면 더욱 마음이 힘들었다.
-더 이상 울지 말거라. 내가 곧 찾아 갈 테니….
“왜? 당신이 누군데…. 날 찾아온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 거야…. 휴우.”
자인은 혼잣말을 하다가 칫솔을 입에 물었다. 그러다 문득 흠칫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설마, 저승사잔가? 그래서 나 찾아 온다는 거고? 헉! 나 곧 죽는 거야?”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자인은 머릿속에서 맴도는 남자의 속삭임을 지우려는 듯 힘차게 칫솔질을 했다.
“아, 아니야. 점집 아줌마가 내 수명 길다고 했어. 그러니까 개꿈 따윈 제발 잊자. 잊는 거야.”
칫솔질을 끝낸 자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향해 스마일을 지었다.
“하하. 그래. 이렇게 웃고, 오늘도 힘내는 거야. 아자, 아자, 파이팅!”
* * *
“어라?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우리 배우님, 웬일로 벌써 준비를 끝내셨어?”
자인은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누군가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인의 소꿉친구이자 매니저 겸 소속사 대표인 용수였다.
“다 끝나긴. 머리도 해야 하고 메이크업도 받아야 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예정에 없던 그의 등장에도 자인은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의 곁을 지나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며 물었다.
“민지는 아직 안 왔어?”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들어온 지 오 분도 안 됐는데. 야, 나 물 한 잔만.”
“에이, 뭐야. 더 자고 싶단 사람 깨워놓고는 정작 자기가 늑장을 부리네?”
자인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자기 집인 양 편안하게 소파에 누워 있는 용수에게 다가갔다.
“나 물 달라니까. 목마르다고.”
“너 줄 물 없어. 비켜!”
자인은 아무렇지 않게 용수를 발로 찼다. 용수가 소파에서 일어나 앉으며 투덜거렸다.
“오랜만에 온 손님에게 너무 심한 거 아니냐? 환대는 못할망정 발로 걷어차다니….”
“손님은 무슨. 민폐나 끼치는 주제에. 야, 회사일로 바쁘다면서 여긴 왜 왔어? 대표님아, 일 안 하니?”
“당연히 열심히 하지. 다만! 오늘은 대표라기보단 너의 매니저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하기 위해….”
“됐고. 이거나 드셔요. 네가 원하는 환대의 표시다.”
자인은 자기가 먹던 사과를 용수에게 던져주고는 TV 채널을 돌렸다.
“쩝. 물 달라니까 물은 안 주고….”
용수는 투덜거리면서도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TV 속에 나오는 비녀를 보며 신기한 듯 말했다.
“감정가가 수억? 와! 저런 것 몇 개만 있으면 노후 걱정 없을 텐데. 안 그러냐, 자인아?”
자인은 대답 대신 용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뭐? 세삼 내가 너무 잘생겨서 반한 거냐?”
“…….”
용수의 시답지 않은 장난에도 자인은 반응이 없었다.
“뭐, 뭐야? 진짜로 반했어? 아… 난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 됐는데….”
용수는 평소답지 않은 자인의 눈빛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움직여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헉, 뭐래? 그냥 꿈속에 나오는 남자가 넌 절대 아닐 거다 싶어서 바라본 거야.”
“뭐야? 또 그 꿈 꿨어? 야, 벌써 몇 번째냐?”
“글쎄… 이젠 기억도 안나.”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용수는 그제야 안심을 하며 편안한 자세로 눕더니 남아 있던 사과를 마저 먹기 시작했다.
“하긴 기억이 나면 뭔 걱정이겠냐. 그나저나 네 꿈에 나오는 그 녀석 말이야. 어떤 의미론 대단하지 않아?”
“뭐가?”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것도 기억 못 하게 해서 궁금증을 유발시키잖아. 지밖에 모르는 천하의 자인에게 밀당을 걸다니. 한 수 배우고 싶다. 내 꿈엔 안 나타나나?”
“하! 너 좀 웃겼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꿈속의 남자와 밀당이라니.
자인은 코웃음을 치며 창가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확 걷어 젖혔다.
아직 추운 겨울이지만 곧 봄이 오려는 것인지, 제법 따스해진 햇살이 자인을 포근하게 감쌌다.
그 온기가 마음에 들어 자인은 홀린 듯 베란다 창을 활짝 열었다.
쭉 뻗은 도시 고속도로와 쌩쌩 달리는 차량들. 그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청록빛 한강. 역동적이면서도 신선한 아침 풍경을 자인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누군가 지금의 자인을 본다면 환한 아침햇살과 어울려 한 편의 광고영상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할 것 같았다. 용수도 그런 마음인 듯싶었다.
“쳇. 저게 또 아침부터 화보 찍고 있네. 괜히 사람 마음 싱숭생숭해지게….”
용수는 사과를 다 먹고도 뭔가 허전한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갑자기 화난 사람처럼 혀를 차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야! 정신 차려. 천사이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는데 잘못하다간 어우! 귀신 먼저 된다.”
용수는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 창문을 확 닫아버렸다. 그러고는 자인의 어깨에 팔을 척 걸쳤다.
“야! 이 팔 좀 치우지. 무겁거든!”
평화롭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져버리자 자인은 짜증을 내며 용수의 팔을 내쳤다. 하지만 용수는 다시 한 번 자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느끼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있잖아. 우리 자인 양이 편안해하는 모습이 싫다? 너무 꼴 보기 싫어. 왜일까?”
“에휴, 진상…. 아, 진짜! 저리 가라고!”
자인의 짜증에도 용수는 꿋꿋이 버텼다. 그런 용수를 보며 눈웃음을 지어 보이던 자인은 용수의 팔을 꺾고 그대로 비틀어버렸다.
“아야야! 항복, 항복!”
“항복은 무슨. 아주 올 때마다 매를 벌어요, 매를.”
“악! 아파, 아프다고! 진짜 아파!”
용수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자인은 계속해서 팔을 비틀었다. 버티다 못한 용수가 탭을 치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진짜 항복이라니까! 야! 야, 놔주면 내가 좋은 소식 알려줄게. 제발 좀 놔줘!”
“좋은 소식은 무슨. 어디서 수작이야?”
“야야야! 진짜야!”
“그럼 어디 말해봐. 그게 뭔데?”
“야! 놔줘야 말하지!”
“헛소리하기만 해봐. 죽는다?”
그제야 자인은 용수의 팔을 놓아주었다.
“팔 놓은 거 맞아? 감각이 없어. 아직도 꺽인 거 같아.”
투덜거리는 용수를 뒤로 한 채 자인은 소파에 앉아 도도하게 한쪽 무릎을 꼬아 올렸다.
그 모습은 조금 전 용수의 팔을 비틀던 사나운 여자의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좋은 소식이 뭔데? 아, 혹시 연말시상식에서 연락 왔어? 나 무슨 상 받는데? 인기상? 최우수상?”
“상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어휴, 너는 삐쩍 마른 주제에 무슨 팔 힘이 이렇게 센 거야? 잘하면 소도 때려 잡겠다?”
용수는 아픈 팔을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용수야. 용수야. 개용수야. 나 소 잡기 전에 너부터 잡을 자신은 있는데. 지금 한번 해봐?”
“응? 아, 아냐. 아냐! 정중히 사양할게.”
“그럼 궁금해 죽겠으니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봐. 무슨 소식인데? 상 아니야?”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지.”
“더 좋은 소식? 뭔데?”
“뭔가 하면 말이야, 크크크크.”
말하다 말고 용수가 갑자기 이상한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설마… 뻥이야? 오라! 네가 진정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참다못한 자인이 양손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용수가 뒤로 후다닥 물러나더니 대답 대신 옷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거만하게 흔들어 보였다.